[문학 월평] 비평의 가치: “언어는 모험을 시작했다”; 정명환 『프루스트를 읽다』
[문학 월평] 비평의 가치: “언어는 모험을 시작했다”; 정명환 『프루스트를 읽다』
  • 이지아(시인)
  • 승인 2021.11.02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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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언어는 모험을 시작했다. 새로운 것을 찾아서.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게 비평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시절을 후회하며, 그것은 사실 참혹한 현실을 보기 두려워 계속 던진 질문이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말이다. 한때, 세상으로부터 돌아올 대답, 탄력 없는 정답, 희망 없는 시대를 마주하기 힘들어, 스스로를 혐오하며, 그 책임을 모른척하며, 멀리 있었다고.

  그의 고백을 생각하며, 기어이 나는 무엇인가를 얻은 것 같은데 고민하다가, 어떤 시간을 잃어버렸지만, 분명 정확해진 것들이 있다. 문학은 모든 걸 걸고자, 모든 걸 버리고, 조건 없이 “세계의 비밀을 탐구”(『철학과 현실』)하는 ‘진실한 대화’라는 것. 요컨대 그 대화는 작품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의”를 찾는 것이며, 인간의 “비전”(385쪽)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정명환 비평가는 어렵고 복잡한 시대 속에서 한국의 근대 문학을 고민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실존주의자였다. 식민지 상황과 해방의 짧은 기쁨과 비참한 한국전쟁, 독재 정권의 시대를 통과한 그는 한국문학을 위해 우리들의 올바른 학문 태도 및 연구 방법을 성립하고자 했다. 아울러 프랑스 문학과 동서양 철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국문학의 지성과 이성에 대해 고뇌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만난 적도 없고 앞으로 뵐 일도 없는 그의 이런 말이 철렁했다. ‘정명환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그러니 “마음껏 비판”(《조선일보》) 하라고, 93세 비평가가 툭 던진 깊은 사유들. 내가 그의 단단한 책을 받아 읽는 것, 울컥이는 감정을 잠시 접는 것이 나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프루스트를 읽다』(현대문학, 2021)는 20세기 최고의 명작 중 하나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형식 역, 펭귄클래식출판사, 전12권)에 대한 180가지 비평 소고론이자 문학에세이집이다. 이 소설은 많은 이들이 독서를 시도하다가 포기한 책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역동적인 구조나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섬세한 인간상에 대한 묘사, 예술과 철학을 접목한 무의식의 관념과 진술, 과거 기억에 기댄 현실의 읊조림, 점층적인 심리 묘사, 처음과 끝이 들어맞는 구조, 광범위한 텍스트 독해에 대한 끈기 등을 요구하는 특별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왜 이 소설을 죽음과 경쟁하며 비평하기로 결정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평생 진실로 믿어왔던, 문학을 대하는 비평적 가치를 다시 찾고 싶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썼던 과거의 이론서들과 번역서, 평론들과는 다른 색채로,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문장들을 설계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 이 작품이 가진 엄청난 감성과 지성, 관찰력과 상상력, 분석력과 구상력에 놀라며 독해를 시작한다.(7쪽) 그 후, 5년 동안 이어진 독서와 글쓰기는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화내고, 때로는 이해하고 동감하며, 때로는 포기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즉, 작품과의 객관적 거리를 다소 버리면서, 논리적으로 솔직하게 독자에게 다가간다. 저자는 진정한 예술은 진실된 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포착하고, 그것을 우리들에게 알리는 데 그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384쪽)

  그렇다면 창작자나 독자들은 어떤 비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에즈라 파운드는 「휴 셀윈 모벌리」의 시 안에 ‘닉슨씨’라는 부분에서 “비평가에게 기름칠을 하”라고 쓰며, 자본과 출세에 병든 비평가를 비판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 문학장의 비평이 서로를 감싸주기만 하는 감정을 지닌 것은 아닌지, 정명환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지나, 객관적인 주제비판을 써야 하며, 그 논리성과 합리성이 한국문학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 후세에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개인 ‘나’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왜 작게 느껴질까. 창작의 현장은 왜 제자리에서 점프하는 트램펄린의 기분이 드는 걸까. 분명 상승하고 먼 것을 보았고, 땀도 흘렸는데, 왜 이 자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걸까. 오늘날, 이 실존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나는 프루스트를 읽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평생 ‘자기비판’으로 문학을 지탱해 왔다는 정명환 비평을 독해한 것이다. 그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분석하며 매우 세세한 인식에 이르렀다. “프루스트의 글 자체는 그런 순수성이나 명료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멸시당한 후자들의 비순수의 언어, 파격적인 엉뚱한 언어야말로 문학의 혁신을 가져온 것이며 순수성은 그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비난의 대상으로 겨냥한 리얼리즘, 자아 탐구,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에 의해서 지양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한때 앙드레 지드에 의해서 버림받았던 프루스트도 이 계열에 속하는 작가”(218쪽)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이 작품에 나타난 세 가지 비판의식을 엿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랑에 관한 인식이다. 저자는 이 소설에는 두 가지 화자가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섬세하고 철학적인 화자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사랑에 있어서 윤리적이지 못하고 의지적이며 의심 많고 이기적인 화자, 결핍이 많은 화자가 있다고 말한다. 소설에 나타난 사랑의 관계는 스완과 오데트, 화자와 알베르틴, 샤를 뤼스와 모렐의 사이가 있다. 이성애이든 동성애든, 상대를 소유하는 “욕심과 그 욕심에서 연유하는 질투와 괴로움으로” 스토리가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늘 이기적이며, 그 소유욕은 항상 억압 욕망을 겸하고있어, 특히나 화자와 알베르틴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파국의 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의 소설을 비교한다. 프루스트의 사랑은 자신의 불안 때문에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도스토옙스키의 사랑은 타자를 향해 열려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한 개인의 증상, 겪어내야 할 문제라고 했을 때, 프루스트는 자신 안에 갇혀 사랑을 구원받지 못했으며, 도스토옙스키는 사랑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자기희생과 타자의 감정을 구원했다고 비교하고 있다.

  두 번째는 소설에 나타난 화자의 사회적 계급의식에 관한 것이다. 정명환은 그가 “귀족 내지는 부르주아의 입장에서 하층계급을 내려다”(172쪽)보고 있다고 분석한다. 프루스트의 소설 중 한 대목을 예로 들면서 “그리고 사교계에서는 현장에 없는 사람에 대해서 험담을 하는 일이 물론 있지만, 그 사람이 불행해졌을 때는 모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어떤 계층의 서민들에게는 더 노골적인 이중성이 있는 것이 아닌지, 내게는 그런 의심이 생겼다.”(7권/350쪽) 프루스트는 계급에 대한 이해와 앙가주망의 인식이 부족했으며, 그가 속한 지배계급의 부조리와 하층계급의 입장에서 비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동시대의 다른 소설가 에밀 졸라나 옥타브 미르보의 작품을 함께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덧붙여 프루스트의 소설에 나타난 여성은 수동적이며, 남성보다 열등한 위치에 서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프루스트는 문학이 가진 사회적 기능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일까? 비평가는 이 부분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 부분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프루스트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했던 것은 사회적 문제와 모순을 통해 인간 회복만을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 번째 특징으로 자연스레 넘어갈 수 있다. 비평가는 프루스트의 예술론에 언제나 항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예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차이는 각자의 영원한 비밀로 묻혀 있으리라. 우리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자신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으며, 이 세계를 타인이 어떻게 보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이 보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보는 세계와 같은 것이 아니며, 예술이 없다면 그 풍경은 달에 있을 풍경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미지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예술의 덕분으로 우리는 자신의 세계라는 단 하나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세계를 볼 수가 있고, 독창적인 예술가가 많이 존재하면, 그만큼 더 많은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 본문 385~386쪽

  위 예문은 프루스트의 예술론을 분석한 한 부분이다. 세 번째 항목은 정명환 비평가가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가장 백미로 꼽는 면이며, ‘예술론의 가치’에 해당한다. 프루스트의 예술론에 대해 저자는 곳곳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칸트의 철학관이나, 희곡에 대한 이야기, 고전 음악에 대한 프루스트의 “그 음악은 알려진 모든 책들보다도 더 진실된 것으로 느껴졌다.” 문장에 공감하며 음악은 언어가 본질상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며 설명이나 분석이 힘듦에도 불구하고 인간 내부에 감동을 일으킨다고 한다. 위의 예문에서 우리는 음악이나 미술 문학 등 “예술을 통해서만 자신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으며” 예술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계로까지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 예술론에 대해 정명환 비평가는 완전히 동의하며 예술가에 대한 존중과 독창적인 작품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인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나와서 “더 많은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우리의 삶과 정신은 상승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예술과 사람을 연결시키고, 세계의 상호작용 관계를 형성하는 기능과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비평은 지성과 이성, (감성이 바탕이 된) 진·선·미의 균형을 통해 불확정한 이 세계의 진리를 찾아 떠나야 한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서 작품을 바로 보지 않고 안위를 추구한다면 예술과 사회는 계속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비평가는 비평적 언어로 모험을 떠난다. 논리적인 비판의식을 함의하여 비평은 “우리는 향유자로서 예술 작품을 읽고 보고 들음으로써 예술가와 함께 이러한 변용에 참여하는 것이다.”(51쪽) 비평이라는 고전은, 우리의 의식을 깨어있게 하고 그 무한과 진리의 궤도를 더 벗어나, “문학이라는 그 괴물”을 끝내 키워(『문학을 생각하다』), 몰락한 이 삶과 경쟁하며, 인간이 끝나지 않게 한다.

 

 


이지아
2000년 《월간문학》에 희곡이, 2015년 《쿨투라》 신인상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트 쿠튀르』가 있다. 

 

* 《쿨투라》 2021년 11월호(통권 8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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