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낯선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서 만나는 ‘진심’: 조해진 소설 『완벽한 생애』
[북리뷰] 낯선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서 만나는 ‘진심’: 조해진 소설 『완벽한 생애』
  • 손희(본지 에디터)
  • 승인 2021.11.02 0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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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미한 삶들에 대한 환대. 희미한 삶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지만 따뜻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 그런 목소리를 꾸준하게 들려준 소설가 조해진의 신작 『완벽한 생애』는 삶의 희미함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경장편 소설이다. 작가는 삶의 ‘완벽함’이라는 곳의 주변에 서서, 그 바깥에 있는 삶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삶의 희미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이번에 출간한 작품은 창비의 젊은 경장편 시리즈 소설Q의 열한번째 작품이다. 2020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로 선정되기도 한 동명의 단편을 좀 더 촘촘하게 확장해 이번에 경장편 소설로 출간하게 되었다.

  직장을 돌연 그만두고 제주로 향하게 된 윤주, 윤주의 제주 생활 동안 그의 방을 빌리며 한국여행을 하게된 시징, 꿈을 접고 신념을 작게 쪼개기 위해 제주로 이주한 미정의 이야기가 다정히 주고받는 편지처럼 이어진다. 인물들은 발버둥치며 지탱해온 자신의 삶과 노동이 타인에게 너무도 쉽게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무너지기도 하고, 한때는 너무 거대했던 사랑과 신념이 고통으로 돌아와 이를 “잘게 조각내는 일”을 시도하기도 한다. 삶에서 잠깐 스쳐갈 뿐인 타인에게 ‘방’을 내어주고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주며 “필연적으로, 그렇지만 그림자처럼 은근한 방식으로”(발문 최진영) 연결되는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불완전하게 흔들리는 세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 있음’의 증인”(작가의 말)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는 단단하고 따스한 희망을 품게 하는 소설이다.

  미안한 동시에, 그 미안함 뒤에 안전하게 숨어있고 싶은 마음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떤 미안함은 편리하다는 것을 문영이 알까. 누군가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 둘레에 벽을 쌓아서 자신에 대한 의심과 혐오 그리고 열등감을 사전에 차단하는 그런 미안함도 있다는 것을.
  - 본문 33~34쪽

  기회가 와서 잡았을 뿐이고 애정을 갖고 노동했으며 그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아 꾸려졌던 삶…… 평범해 보이지만 그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바빴고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다녔는데, 이 세계에선 그런 삶이 언제라도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윤주를 무기력하게 했다.
  - 본문 54쪽

  궁금하기도 했다. 그 끝을 확신할 수 없는 신념은 애초에 갖지 않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어째서 고민을 거듭하고 애쓰며 투신할수록 생애는 엉망이 되는 것인지, 미정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 본문 85~86쪽

  소설은 인물들이 각자의 생애가 기반을 두고 있던 견고함에서 도망치며 시작된다. 윤주와 시징 그리고 미정은 자신이 발을 디딘 삶에서 벗어나 ‘타인의 방’에 머물며, 그곳에서 너무도 거대하고 아름다워서 오히려 고통이 되었던 사랑과 신념을 작게 조각내는 일을 기꺼이 시도한다. 어느 날 갑자기 떠나간 은철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던 시징은 오랜 시간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야 했다. 출장 차 방문한 서울에서의 짧은 일정에도 은철을 찾아 헤매며 영등포 구석구석 눈길을 보내던 시징은, 윤주의 방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마침내 은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민간인에게 총과 칼을 들이댔을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둔 미정은, 자신이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 아래 판결을 내리는 법조인이 될 수 있는가 끊임없이 물었다. 그 과정에서 커져 버린 내면의 갈등은 미정을 제주로 도망치게 만드는데, 미정은 제주에서 머무는 동안 자신이 “언제까지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내려놓고 가벼워지는 연습을 하게 된다. 늘 발버둥쳤지만 그렇게 버텨온 자신의 생애가 타인에 의해 너무도 쉽게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무너졌던 윤주는, 제주에서 미정과 지내며 그리고 시징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침내 자신과 화해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익숙한 일상에서는 기만이나 거짓으로 모른 척했던 진심”(발문)을 비로소 제대로 마주한다.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이 익숙함을 흐트러뜨릴 때, 그제야 비로소 고개를 내미는 솔직함을 놓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비정규직 문제나 제주 난개발 문제, 베트남전쟁, 홍콩 민주화 시위, 세월호 참사 등 시대적 상흔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여전히 그 상처 안에서 살아간다. 소설은 인물들의 생애를 통해 각자가 지닌 상처들을 담담히 그려내며, 그럼에도 훼손되지 않는 것들에대해 이야기한다. 이제 막 ‘가벼워지는 연습’을 시작한 이들이 서로의 곁을 내어주며 자기 자신과도 화해하는 과정을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 보인다. 익숙한 곳을 떠나 타인의 방에서 숨을 고르는 인물들은 윤주가 시징에게 보내는 편지 속 글처럼, 모두가 “이 행성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일 뿐”임을 받아들이며 서서히 회복해 나간다. 

  “혁명은 끝나도 혁명의 방식은 남는다는 믿음”으로. “타인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신념은 텅 빈 집념”이 될 수도 있다는 작가의 말을 따라 우리는 조해진이 마련한 타인의 자리에 발을 디뎌볼 수 있겠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 것,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이 생애의 한가운데”에서 가만히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제 그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시작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쿨투라》 2021년 11월호(통권 8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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