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살부(殺父)’의 운명에 맞선 영웅, 샹치. 그의 텅 빈 내면이 주는 허탈함: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영화 월평] ‘살부(殺父)’의 운명에 맞선 영웅, 샹치. 그의 텅 빈 내면이 주는 허탈함: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 라이너(영화 유튜버·영화 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01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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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스틸컷

  MCU(Marvel Cinematic Universe)라는 단어가 이제는 히어로 영화와 동의어처럼 느껴질 정도로 친숙해 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나 ‘토르’ 같은, 우리나라에는 잘 소개되지 않았던 히어로들도, 이제는 ‘배트맨’이나 ‘슈퍼맨’ 만큼이나 친숙해졌다. 그뿐 아니라 ‘케빈 파이기’ 같은 영화 제작자의 이름이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디즈니의 마블 영화는 충분히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MCU 영화’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감염증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영화계를 구원할 구원투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디즈니는 앞으로 나올 MCU 영화들을 모두 극장 단독 개봉하기로 결정했고, 〈이터널스〉,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과 같은 작품들을 연내 개봉할 것을 확정했다. 당장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은 역대 예고편 영상 조회수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엄청난 관심 을 이끌어 내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MCU 영화가 준비한 페이즈 4(Phase 4, 4번째 국면이라는 뜻)가 제대로 발동을 거는 분위기다.

  그 선봉에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라는 영화가 섰다. MCU 영화 사상 최초로 아시안 히어로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MCU는 그간 여러 작품에서 아시안을 영화에 등장시켰지만 그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히어로를 돕는 보조이거나 악역에 지나지 않았다. 또 할리우드에서 제작하는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이 아시안이 라는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디즈니가 추구하는 PC(Political Correctness), 다문화주의에 관심이 가게 된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MCU의 새로운 히어로로서 MCU의 세계와 현실 세계 양측에 모두 유의미한 영향을 주는 쉽지 않은 역할을 부여받은 셈이다.

  영화는 주인공 ‘샹치(시무 리우 분)’의 미국에서의 삶을 조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호텔의 주차관리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샹치는 친한 친구 ‘케이티(아콰피나 분)’와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던 중 그의 펜던트 목걸이를 노리고 나타난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게 된다. 달리는 버스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른 샹치는, 그들이 샹치와 오래전에 헤어진 여동생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마주하기로 한다.

  ‘샹치’가 지닌 운명은 ‘살부(殺父)’의 운명이다. 그의 아버지인 ‘웬우(량차오웨이 분)’는 ‘텐 링즈’라는 조직을 이끄는 수장으로, 자신의 팔에 장착된 열 개의 고리, ‘텐 링즈’의 힘으로 영원불멸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역사의 중요한 국면마다 개입하며 세계의 운명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꿔온 어둠의 거물이기도 하다. ‘탈로’라는 신비한 마을로 향하던 웬우는 운명처럼 아내를 만나고, 잠시나마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나, 그의 가혹한 운명은 그에게서 아내를 앗아갔다. 분노에 눈이 먼 웬우는 아들인 샹치를 암살자로 훈련시키고, 그 자신은 다시 한번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 아내를 해한 자들에게 비정한 복수를 감행한다.

  암살자의 삶과 미쳐버린 아버지를 피해 미국으로 달아났던 샹치는 결국 아버지 웬우와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웬우는 어느 순간부터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서글픈 착각에 사로잡힌 웬우는 신비의 마을 ‘탈로’를 불태울 작정이다. 샹치는 아버지를 막기 위해 ‘탈로’로 향하고, 여기에서 자신의 진정한 힘을 깨닫고 히어로로 각성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가벼운 히어로 영화, 팝콘 무비로서는 손색없는 작품이지만, 앞서 언급한 새로운 시대의 히어로 영화로서는 부족함이 많은 작품이다. 부실한 서사도, 어설픈 오리엔탈리즘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샹치’라는 인물의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영화에서 ‘샹치’는 아시아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충실히 그리는 역할에만 머물 뿐, 히어로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지금껏 MCU의 영화가 보여 준 ‘영웅의 인물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이는 샹치에게 영웅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고뇌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아이언 맨〉에서 토니 스타크는 ‘텐 링즈’에 의한 납치 사건을 통해 군수업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의 힘과 기지로 위기를 극복하며 영웅 ‘아이언 맨’으로 다시 태어난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신에 눈을 뜨는 것으로 ‘각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퍼스트 어벤져〉는 정신적으로 완성된 히어로의 숭고한 헌신을 그렸고, 〈스파이더맨 : 홈커밍〉에서는 피터 파커라는 히어로의 정신적 성장을 공들여서 그린다. 영웅심리에 들떠 무리한 행동에 나서는 피터에게, 토니는 ‘수트가 전부라면 수트를 벗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영웅의 자격에 대한 MCU의 고민을 잘 보여 주는 장면이다.

  하지만 샹치에게는 그러한 고뇌가 허락되지 않는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샹치가 아닌 웬우가 있다. ‘양조위’ 라는 이름으로 사랑받은 량차오웨이의 뛰어난 연기와 캐릭터 해석은 웬우라는 인물에 깊이를 더해준다. 웬우의 분노도, 타락도, 선택도 모두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동력을 제공한다. 반면에 이에 맞서는 샹치의 캐릭터는 희미하다. 아버지에 맞서 마을을 지키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샹치라는 인물이 어떤 생각과 어떤 신념을 지녔는지, 어떤 개성을 가진 인물인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힘’에 대한 고민도,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그에게는 없다. 그저 아버지에 맞서다 우연히 강한 힘을 얻은 인물이 하나 있을 뿐이다.

  샹치에게서 영웅의 고뇌도, 인간적인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기능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샹치는 두 가지의 목표를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아시안 히어로로서 대중들에게 어필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MCU의 새로운 히어로로서 강력한 힘을 선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그저 껍데기만 덜렁거릴 정도로 얄팍한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아시안의 외모와 서사적 배경을 지녔지만, 그 정체는 서구식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70년대에 나온 코믹스 자체가 ‘리샤오룽’ 열풍에 기대고 있으니만큼 샹치의 ‘마샬 아츠’는 예정된 흐름이었지만, 정작 샹치가 겪는 집안 문제, 가부장적 가풍 등의 뻔한 구도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아시안 히어로를 배려한 듯한 ‘동양풍 배경’이 우수수 나열되는 장면에서는, 서구가 가진 동양에 대한 판타지를 무성의하게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샹치가 지닌 힘은 분명 강력하다. 샹치는 아버지로부터 ‘텐 링즈’라는 강력한 무기를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용의 품성’을 받았다. 신비로운 두 힘을 바탕으로 샹치는 무시무시한 적을 물리치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힘에는 목적이 없고, 그 힘을 다루는 데에는 규칙이 없다. 이는 존재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한 힘인가? 샹치는 그 힘을 어떻게 평가하고 다루려고 하는가? 이 질문에 영화는 ‘용의 품성’이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만, 전가의 보도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유치한 농담과 개연성이 부족한 전개는 ‘재미를 위한 선택’이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존재에 대한 의문이 결여된 것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홍콩식 액션과 오마주들, 경쾌한 마블 영화 식의 진행과 화려한 동양 판타지의 향연에도 허탈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 영화가 샹치라는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이너
영화 유튜버·영화 칼럼니스트. 《매경 ECONOMY》에 영화 칼럼 연재 중. MBC 〈섹션TV 연예통신〉, KBS Cool FM 〈사랑하기 좋은날 이금희입니다〉, KBS 1Radio 〈주진우 라이브〉, 인기 팟캐스트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바 있다. 앞으로 디지털 시대의 글쟁이로서 계속 글에 파묻혀 살며 양질의 콘텐츠를 선보이고자 한다.

 

* 《쿨투라》 2021년 10월호(통권 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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