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추상미술, 숭고와 초월의 미학: 서울 환기미술관과 수화 김환기
[미술관 탐방] 추상미술, 숭고와 초월의 미학: 서울 환기미술관과 수화 김환기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1.12.02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술관 탐방〉 두 번째 서울 방문이다. 서울역에서 7022버스를 타고 부암동 주민자치센터에 내려 미술관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30분, 도착하자마자 2시까지 방역시간이라 미술관에 입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식당 바로 앞 서울 성곽의 사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 주변을 우중산책했다. 촉촉하게 내리는 빗속을 거닐며 먼발치로 보이는 북악산과 인왕산 능선을 바라보니 지난번에 들른 김종영미술관이 생각난다. 같은 산자락이라 미술관 주변 풍광이 비슷하게 느껴지고, 오르락내리락 연결된 언덕과 골목길이 고즈넉하고 정겹다. 그림엽서의 한 장면처럼 예쁘게 꾸며진 카페부터 빛바랜 간판에서 느낄 수 있는 오랜 방앗간까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부암동은 산책하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새로운 보물찾기하기 좋은 동네이다. 2시 정각. 사전예약으로 입장 가능한 환기미술관은 역시나 예상대로 관람객이 많다.

  환기미술관은 한국근현대미술을 대표하고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를 기리고 현대미술 발전에 공헌하고자 부인 김향안(金鄕岸, 1916-2004) 여사의 헌신과 건축가 우규승의 설계로 1992년 11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미술관 홈페이지에 실린 ‘설립자 메시지’를 읽어보니 미술관 설립에 강한 의지와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한 건물을 지어 놓았다고 해도 미술관을 돌아보고서 깊은 감동을 주는 예술이 없을 때, 그 미술관은 아무것도 아니다. (중략) 오늘의 미술관은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 모두가 요구하는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 시각적인 것, 음악적인 것 그리고 시가 읊어져야 한다. 최근에 읽은 어느 비평가의 말이 생각난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가리켜, “푸르되 풍경이 아니고 파랗지만 하늘이 아니고 노랗지만 태양이 아닌 빛깔과 마티스의 종이 오림이 아닌 포름을 토왈에 유채로 그린 새로운 그림이다”라고 했다. 나도 그런 새로운 미술관을 만들고 싶고, 만들 것이다.
  - ‘설립자 메시지’ 중에서 「미술관은 내용이다」, 김향안, 1993년 9월 23일.

  반듯하지 않은 경사진 터에 자리 잡은 미술관은 주변 자연에 순응하고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건축의 품새로 본관, 별관, 달관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각의 건물은 서로 다른 형태와 기능의 의미를 갖고 있다. 주요전시는 지상 3층의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본관에서 진행하고 있으며, 특히 본관의 구조는 필자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미술관과는 다르게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거나 연결된 것이 아닌 위로 치솟는 형태다. 외곽 지붕이 2개의 돔(dome)형상이기도 하지만 1층과 2층 사이 천장이 트여있고 3층도 천장이 높아서인지 개방적인 궁전 분위기다. 또한 1층에서 3층까지 각 전시실과 중심공간이 하나로 연결된 듯, 둥근 고리 모양으로 서로 만나게 설계되어 있어 관람객이 동선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환기미술관은 매년 김환기 학술연구의 일환으로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작가의 예술세계를 다각도로 연구하는 전시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데, 현재 전시는 〈김환기, 그·리·다·D·R·A·W〉전이다. 이번 전시는 김환기의 예술적 사유와 도전이 어떻게 가시화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공간에서 음향, 빛 등과의 조우를 통해 형성될 예술적 수신호가 작품과 우리들의 대화를 얼마나 새로운 접점으로 즐겁게 확장시킬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함께 탐구해보기를 제안하는 전시로 유화(33점), 드로잉(135점), 오브제(2점) 작품 및 사진·영상 자료와 예술적 각색으로의 음향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전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작품 감상과 아울러 전시구성장치의 복합적인 변주를 위한 ‘예술적 각색(영상 및 Sound Installation)’을 통해 김환기 작품세계의 시각적 전달에 더해진 공감과 교감의 스토리텔링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시기획이라고 미술관 측은 설명한다.

  화가 김환기는 천부적 재능과 기질,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한국미술계의 아방가르드와 추상미술의 선봉에 섰으며, 우리 민족의 정서와 감흥을 고유의 조형언어로 승화시켜 서정적이며 현대적인 조형 시(詩)를 구현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1950년대 중반까지의 도쿄와 서울시대, 이후 1950-60년대 초반까지의 파리와 서울시대 그리고 1963년 이후 별세할 때까지의 뉴욕시대로 나눌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초심으로 돌아가 예술로써 추구할 궁극의 목적에 전착하며 뉴욕시대 작품들 위주로, 자연과의 일체로부터 관조를 거쳐 초월에 이르는 숭고의 미학을 조형적으로 완성해가는 그의 예술 여정을 엿볼 수 있다.

  본관 1층 입구로 들어서면, 작업에 몰두하는 김환기 작가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김향안 여사와 다정하게 걷고 있는 사진이 관람객을 반긴다. 1층 전시실 초입은 도입공간으로 전체 전시 경향을 예시하는 듯, 몇 점의 드로잉 작품과 소형의 완성작, 그리고 영상물이 있다. TV영상에는 작가의 일기 글들이 줄지어 천천히 지나간다. 예술을 위한 구도자처럼 글귀 하나하나에 담긴 말에서 작가의 예술창작에 대한 애정과 고뇌가 느껴지고, 하나같이 명언이다.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다.” (1965년 1월 19일)
  “예술(창조)은 하나의 발견이다. 그렇다. 찾는 사람에게 발견이 있다.” (1965년 2월 1일)
  “오늘의 미술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가질 수 있는 모든 형태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1968년 5월 1일)
  “흑백회색조란 참 아름다운 것” (1968년 5월 6일)
  늘 조심할 것은 상식적인 안목에 붙잡히는 것이다. 늘 새로운 눈으로, 처음 뜨는 눈으로 작품을 대할 것이다.” (1968년 7월 2일)

  도입공간을 지나, 다음 전시실은 70년대 작품구상을 위한 다수의 드로잉 작품과 완성작이 나란히 전시되어있다. 작가의 드로잉(drawing)에서 시작한 에스키스(esquisse)가 작품으로 완성되기까지 하나의 과정을 엿볼 수 있으며, 창작의 흔적이 드러나는 드로잉 또한 한편의 멋진 작품의 일부로 보이고 완성작에서 그 미적 감흥을 느낄 수 있다.

  2층 전시실은 뉴욕시대 초기(1964-69), 화면을 십자로 분할한 ‘십자구도(十字構圖)’와 화면의 사방 모서리를 선이나 면으로 분할시키면서 사각형들을 설정하여 가운데 화면이 자연스레 십자형이 형성되는 ‘사방구도(四方構圖)’ 작품들이 마찬가지로 완성작을 위한 드로잉과 함께 전시되어있다. 이 시기 김환기는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통한 조형적 실험을 수없이 거듭하면서 구체적인 형태가 점차 사라지고 화면을 분할하고 점과 선들이 화면을 메우기 시작하는 변화를 모색했다. 즉 유화물감이 스며든 선과 면을 먹이 퍼지는 듯 선염이 번지는 듯한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표현하여 이후 작품세계의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 그림 참 좋아요. 이제까지 것은 하나도 안 좋아. 이제부터의 그림이 좋아. 내 예술과 서울과는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애. 저 정리된 단순한 구도(構圖), 저 미묘한 푸른 빛깔. 이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일이야. 어두워졌어요.”
  -『김환기, 뉴욕일기』 중에서. 1963년 12월 12일.

  “나는(飛) 점(點),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들을 시도하다. 이런 걸 계속해 보자.”
  -『김환기, 뉴욕일기』 중에서. 1968년 1월 23일

  김환기 작가의 『뉴욕일기』에서 그 당시 작업 경향을 알 수 있으며, 대표작 〈Serenity〉, 〈Echo of Morning〉, 〈Sounds of Spring〉, 〈South East〉 등의 작품은 계절, 바람, 소리, 공기와 음악처럼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화면에 담고 색으로 이야기하며 마음으로 작품을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김환기, 7-Ⅶ-74, 1974, 코튼에 유채, 235x183cm
ⓒ김환기, 7-Ⅶ-74, 1974, 코튼에 유채, 235x183cm

  3층 전시실은 점을 중심으로 한 구성적 패턴인 ‘전면점화(全面點畵)’가 시작된 1970년부터의 대형점화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필자가 환기미술관에 와서 직접, 실제로 보고 싶었던 작품들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자연스러운 번짐과 스밈이 주는 점화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하였고, 완전한 추상정신의 세계이며 숭고의 미학인 결정체로서의 감동적인 작품들로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서울시대에 백자항아리와 둥근달로 표상되는 백색이 우리의 고유한 정서와 연결되면서 독특한 의미를 유출해내듯이 뉴욕시대는 프러시안 블루, 코발트블루를 비롯한 청색이 기조가 되면서 우리의 자연을 느끼게 하는 독특한 정서의 조형화가 진척되었다. 이 시대의 작품들은 칠하는 방법이 아니라 물들이는 방법에 지지된다고 할 수 있다. 화선지에 묵으로 글씨나 그림을 그리던 잠재된 방법이 유화라는 매체를 통해 구현된 것이다. 서양화라는 매체를 통해 동양화를 그렸다는 표현이 가능한 면에서 말이다. 김환기의 점이야말로 그의 예술이 지니는 진정한 내면이자 불후의 위상을 점하게 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오광수, 「김환기 예술의 내면과 표상」 중에서

  간결한 색점이 수없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물감의 농담에 의한 강약의 조절과 색이 캔버스 화면에 흡수되고 번져 나타나는 차이에 의해 순수 추상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전면점화. 자연에서 산책하고 작품을 구상하며 조화로운 우주를 발견하는 그의 작품 속의 제목, 표현하려는 주제, 제작방법, 색채를 통해서 우리가 김환기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미학은 바로 그의 예술이 우주의 질서와 균형 그리고 조화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환기, 에어 앤 사운드 II 10-X-73 #322, 1973, 코튼에 유채, 264x208cm
ⓒ김환기, 에어 앤 사운드 II 10-X-73 #322, 1973, 코튼에 유채, 264x208cm

  층마다 트여있는 벽과 천정 덕분에 음향소리(Sound Installation)는 공기의 흐름을 따라 울려 퍼져 작품 관람을 한층 더 충족시키고, 문득 2층 난간에서 내려다본 벽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그리는 선(線),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點),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江山).
  -『김환기 뉴욕일기』 중에서. 1970년 1월 27일.

  한국추상미술의 기틀을 마련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작품 속의 별과 점이 되어버린 김환기 작가. 예술가는 가셨지만 그의 예술론은 현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작가들에게 큰 귀감과 영향력을 주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마음의 울림을 이끌어내고 있다.

 

 


참고자료
환기미술관 http://www.whankimuseum.org/
『환기미술관 하이라이트』 (재)환기재단ㆍ환기미술관, 2019
『김환기 뉴욕일기』 (재)환기재단ㆍ환기미술관, 2019
오광수, 「김환기 예술의 내면과 표상」. 월간미술, 2004. 11

 

* 《쿨투라》 2021년 12월호(통권 90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