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오면 좋겠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오면 좋겠다
  • 엄태웅(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22.01.0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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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동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호랑이를 직접 보려면 동물원에 가는 수밖에 없다. 동물원에서 영물인 호랑이의 늠름한 자태와 신성한 면모를 보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울타리 속 삶에 ‘적응 당한’ 호랑이의 무기력하고 졸린 모습을 보게 되면, 호랑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동물원에 대한 분노가 교차하며 마음이 착잡해진다. 호랑이는 분명 하품을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저건 분명 호랑이의 포효일 거야. 포효여야만 해.’ 라고 자기암시를 거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날에는 착잡하다 못해 허탈해진다. 만약 그 호랑이가 정말로 ‘으르렁!’하고 우렁차게 포효했다면 기겁하고 뒷걸음질을 쳤을 텐데도, 일단은 호랑이에게 위엄 있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호랑이에 대해 잘 모른다. 호랑이의 실물보다 영상 속 호랑이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영상에서 본, 언제나 기개를 뽐내는 호랑이의 모습이 전부인 양 생각한다. 물론 동물원이라는 갇힌 공간에서 사육되다 보니 야생동물의 성향을 잃고 무기력해진 측면이 크겠지만, 사실 호랑이가 야생에 있다고 해서 자주 포효하는 것 또한 아니다. 

  호랑이에게 이러한 기대 섞인 오해를 하는 것은 주변에 호랑이가 없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처럼 곁에 둔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 야생의 호랑이가 없다는 말이다. 한반도에 살던 호랑이는 일제가 무분별하게 포획하는 바람에 거의 사라졌고, 남북이 나뉘면서 동서로 이어진 철책때문에 남녘 땅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만약 호랑이가 여전히 이 땅에 존재했다면 우리가 마냥 호랑이를 신비로운 이미지로 대상화 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전통 시대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보다 더 호랑이와 가까웠을 것이다.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때는 종종 호랑이나 표범이 사람 사는 마을에 출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산을 오가는 사람들은 더 자주 호랑이의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옛이야기 속에서 호랑이는 위엄 있는 모습으로만 형상화되지 않는다. 때로는 인간에게 잘 속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때로는 인간과 매우 친근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의리 있는 모습으로도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리는 모 연예인 덕에 유명해진 ‘으리!’와는 좀 다르다. 의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즉 호랑이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호랑이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어 인간에게 은혜를 갚는 이야기인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키다(金現感虎)’가 있다. 제목에는 사람(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켰다고 되어 있고 실제로 작품의 본질적 해석은 이에 맞춰져야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야기의 대부분은 호랑이가 김현을 감동시키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신라 원성왕 시절에 젊은 남자 김현은 흥륜사라는 절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우연히 아리따운 여성을 만나게 되고, 이 둘은 첫눈에 반해 곧바로 정을 통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여성은 본래 ‘호랑이’였다. 김현은 이 여성이 호랑이가 변신한 존재임을 알 수가 없었다. 이 여성이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서산 기슭의 한 초가집이었다. 서산 기슭이라는 위치만 들어도 뭔가 외딴 곳, 무서운 곳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곳에는 한 할머니가 있었고, 그녀는 그 할머니에게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할머니는 김현을 반가워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했다. 곧 그녀의 세 오빠가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텐데, 세 오빠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작품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김현은 이런 상황에도 두려움보다는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선 것 같다. 그녀가 본래 호랑이였음을 알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김현의 그런 모습에 그녀는 큰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사람 냄새가 난다며 킁킁거리는 세 오빠에게 그녀가 말한다, 세 오빠가 세상에 지은 벌을 본인이 대신 받을 테니 오빠들은 멀리 떠나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라고. 철없고 이기적인 세 오빠는 그 얘기를 듣고 오히려 기뻐하며 집을 떠난다.

  그리고 그녀는 숨어 있던 김현을 불러내어 말한다. 우선 본인이 세 오빠의 악행을 감당해야하는, 곧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임을 밝힌다. 그러고는 김현과의 인연이 비록 하룻밤에 불과하지만 이 사랑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니, 감사한 마음으로 김현에게 보답을 하겠다고 말한다. 이 보답 또한 자신을 희생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자신은 어차피 세 오빠의 악행을 감당해야 하는, 죽을 목숨이라는 것이다.

  김현은 한사코 반대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귐이 아니어서 도리에 어긋나지만, 그는 이 사랑을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여겼다. 더구나 사랑하는 이의 목숨이 담보된 보답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결심한 그녀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다음 날 그녀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마을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해쳤다. 그러고는 숲속에서 김현을 만난다. 김현을 만난 호랑이는 다시 낭자의 모습으로 변해, 다친 사람들의 상처를 낫게 해주는 방법을 일러준다. 그리고는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신의 몸을 찌르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김현은 마을을 어지럽힌 호랑이를 잡은 공로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녀가 일러준 방법대로 다친 사람들을 돌보니 상처가 모두 나았다. 김현은 그녀의 뜻을 따라 절을 짓고 호원사(虎願寺)라 이름하였다. 이 절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 있었다. 이 절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옛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둘의 사랑과 안타까운 이별은 정말 있었던 일일까?

  이 이야기를 통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만 남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희생에는 당연히 동의할 수 없지만, 의리를 지키는 동물의 모습을 통해서 사람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범 내려온다? 아마 많이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범이 내려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들을 일깨워줬으면 좋겠다. 올해가 범의 해이니 올해 내려오면 더 좋을 것 같다. 

 

 


엄태웅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 재직 중이다. 석사논문에서는 활자본 고전소설을, 박사논문에서는 방각본 영웅소설을 다뤘다. 두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도출됐던 고민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여전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아울러 『삼국유사』를 읽으며 역사와 서사의 거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운몽』을 비롯한 고전소설 작품을 읽으며 이본의 존재 및 전승 양상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하고 있다.

 

* 《쿨투라》 2022년 1월호(통권 9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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