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온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범띠 가수 조용필
[범 내려온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범띠 가수 조용필
  • 유성호(문학평론가)
  • 승인 2022.01.0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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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C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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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산중에서 지금도 호시탐탐(虎視耽耽)하고만 있을 것 같은 ‘범’과 아프리카 밀림에나 나올 것 같은 ‘표범’이 같은 동물일 리는 없을 것이다. 이네들은 같은 고양잇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어서 사촌쯤 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표범은 대표적인 멸종 위기종으로서 원래 한반도에도 널리 서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최상위 포식자로서 오래도록 살아온 것이 범과 표범이었지만 조선 창건 이후 진행된 포호(捕虎) 정책으로 그네들은 거의 절멸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더욱이 ‘호사유피(虎死留皮)’라고 하여 그네들이 죽어 남긴 가죽도 많았을테니 그 감소 속도는 훨씬 더해졌을 것이다. 예로부터 ‘산군(山君)’이라 불렸던 그네들은, 비록 ‘호환(虎患)’이라는 말 속에 아직도 공포의 속성이 깊이 묻어있지만,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라는 말에서처럼 용기와 의지를 말할 때 빈번하게 인용되곤 하던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동물이었다. 

작년에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이라는 책을 통해 조용필 노래를 문학의 관점에서 읽어보았다. 1950년생이니 범띠이기도 한 조용필은 대중예술이 가지는 통속성이나 하향평준화의 가능성을 자신과 철저하게 분리한 위대한 아티스트였다. 조용필 노래의 기원을 나는 〈고추잠자리〉와 〈못 찾겠다 꾀꼬리〉로 보았다. 유년시절에 대한 선연한 기억으로 구성된 이 노래들은 그의 예술적 속성을 일찌감치 암시해주었는데, 그것은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가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길이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아름다움을 순간적으로 탈환해가는 꿈의 길이었다. 그리고 또 한 편의 대표작이 있었으니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양인자가 대학 1학년 때 쓴 단상(斷想)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일기장에 적힌 메모에 살을 붙여 완성한 이 노랫말은 내레이션과 노래가 교차하는 형식과 함께 5분이 훌쩍 넘어가는 긴 시간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비장미와 예술가적 도전 정신이 함께 어울려 있어 많은 이들이 지금도 좋아하는 곡이다. 길지만 한번 읽어둠직(노래함직)하지 않은가.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
  아는 이 없으면 또 어떠리

  (…)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사랑이란 이별이 보이는 가슴 아픈
  정열/정열의 마지막엔 무엇이 있나/모두를 잃어도 사랑은
  후회 않는 것/그래야 사랑했다 할 수 있겠지

  (…)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모두가 야망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에 표범의 고독을 택하겠다고 노래하는 한 남자가 있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 찾아다니는 산기슭 하이에나의 삶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바람처럼 이슬처럼 살다 사라져가는 삶으로부터의 원심력을 택하면서 고독과 사랑의 운명을 노래하는 남자말이다.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와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속(俗)과 성(聖)의 선명한 대조를 보이면서, 이 남자로 하여금 도시의 불빛으로부터의 역주행을 택하게끔 하는 원형적 구도(構圖)로 작용한다. 여기서 연기처럼 사라질지라도 불꽃으로 타올라 끝내 살아남는 정신은 그 자체로 조용필 생애의 정점을 상징한다. 마침내 남자는 고독을 넘어 사랑을 노래하는데 그 어떤 것도 스스로를 위안해주지 못할 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라는 탁월한 사랑론이 펼쳐진다. 끝없는 고독과 사랑이 교차하는 삶에서 그는 “한 가닥 불빛/한 줄기 맑은 물소리/한 그루 나무”로 남은 것이다. 저 높은 킬리만자로에서 만나는 고독과 손을 잡고 그대로 산이 되어 자신을 완성해가는 ‘운명을 건 사랑’의 순간은 우리가 지상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순간이 아니겠는가. 순연한 세계를 탈환해가는 노래가 위안이 되는 순간을 우리는 이 위대한 예술가를 통해 이렇게 만나게 된다. 

‘표변(豹變)’이라는 말이 있다. 표범의 무늬가 가을이 되면 아름다워진다는 뜻으로, 허물을 고쳐 말과 행동이 뚜렷하게 달라진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주역(周易)』의 「혁괘(革卦)」에 나오는 말인데 정확히 인용하면 “군자표변(君子豹變) 소인혁면(小人革面)”이다. 군자는 표범처럼 변화하지만 소인은 겉모습만 바꾼다는 뜻이다. 그 안에는 새끼 표범은 볼품이 없지만 성장을 거듭하면서 멋지게 바뀐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가끔 정치인들이 상대편 쪽에서 소신을 바꿀 때 ‘표변’했다고 비난하는 오용(誤用)을 범하기도 한다. 우리도 올해,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도,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표변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으로 등단하여 한국 문단의 주요한 비평가로 활동해왔다. 저서로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침묵의 파문』, 『정격과 역진의 정형 미학』 등이 있다. 대중서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현재 본지 주간으로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 《쿨투라》 2022년 1월호(통권 9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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