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온다] 두 개의 이야기, 두 마리의 호랑이를 마주하는 법: 〈라이프 오브 파이〉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범 내려온다] 두 개의 이야기, 두 마리의 호랑이를 마주하는 법: 〈라이프 오브 파이〉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송경원(씨네21 기자)
  • 승인 2022.01.01 0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두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침몰한 원인은 설명이 안 되고 어떤 게 사실인지는 아무도 입증 못하죠. 두 가지 이야기 모두에서 배가 침몰하고 가족이 죽고 난 고통을 받아요.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세요?”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의 엔딩은 긴 여운을 남긴다. 어른이 된 파이(이르판 칸 분)는 우리에게 믿음과 해석, 그리고 선택의 가치에 대해 질문한다. 두 가지 방향의 해석이 다 가능하다면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기억하고 싶으냐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 지점에서 다시금 이야기가 시작되며 오랜 여운으로 남는 작품들이 있다.

특히 이야기 속의 동물을 묘사하는 방식 중엔 꽤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동물은 대체로 마음의 표상이다. 우리는 이야기 속 의인화된 동물들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동물이 사람처럼 행동하는거나 반대로 사람에게 동물의 특색이 반영되는 것만큼 직관적이고 풍성한 비유도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동물은 이야기의 욕망이 투영된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두 가지 이야기, 아니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다. 이야기 속 호랑이의 매력과 쓰임은 각각 다르다. 2022년 임인년 호랑이의 해를 앞두고 당신은 어떤 호랑이에게 더 끌리는가.

첫 번째 호랑이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리처드 파커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227일간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표류한 소년 파이와 호랑이의 생존기가 주요한 내용인 일종의 표류기인데, 디즈니 식의 고난, 성장, 극복의 모험담과는 결이 사뭇 다르다. 126분의 러닝타임 중 거의 대부분을 낡은 구조선 안에서 소년 파이와 굶주린 호랑이 단 둘이서 이끌고 간다. 얼핏 좁은 배 안에서 일어난 일을 파이의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플롯에 적합한 소재처럼 보이지만 이안 감독은 ‘들려주기 좋은’ 이 소재를 직접 보여주면서 시각적인 황홀경을 안긴다. 파이가 수면 아래에서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는 장면,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위로 수많은 날치 떼가 날아오는 장면, 밤바다에 빛나는 해파리 등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은 호랑이 리처드 파커다. 실제 대역 호랑이와 컴퓨터 그래픽을 절묘하게 섞어서 창조해낸 리처드 파커는 그 어떤 배우보다 사실적인 연기를 펼친다. 파이는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겪지만 동시에 리처드 파커 덕분에 망망대해에서 장기간 생존할 수 있었다. 리처드 파커는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서 생존을 위한 긴장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역경을 함께 이겨내면서 오랜 동료 같은 친근감마저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의 말미 잔혹하고 놀라운 진실이 밝혀진다. 어쩌면 배 위에 호랑이 같은 건 없었고, 모든 게 다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파이의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파이는 호랑이와 단둘이 남게 된 경위를 이렇게 진술한다. 배가 침몰하여 표류하고 있던 구조선 위에 올라탔는데 잠시 뒤 상처 입은 얼룩말이 뛰어오고 이어서 하이에나와 오랑우탄이 차례로 배 위에 탔다고 말이다. 굶주린 하이에나가 얼룩말을 잡아먹으려 하자 오랑우탄이 이를 말리다가 죽고, 배 안쪽에 숨어서 잠자고 있던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물어 죽여 버렸다고. 파이의 기억은, 실은 이렇게 바뀔 수 있다. 배가 침몰하자 구조선 위에 몇몇 사람이 올라탔는데 상처 입은 얼룩말은 채식주의자 스님을 상징한다. 하이에나는 난폭한 요리사, 오랑우탄은 자신의 어머니다. 표류하던 배 위에서 요리사가 스님과 어머니를 죽이자 자신 안에 있던 내면의 분노가 호랑이처럼 튀어나와 요리사를 죽여 버린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인지가 아니다. 이야기의 향방은 당신이, 아니 우리가 ‘무엇을 믿고 싶은가, 믿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파이는 망망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언가를 믿어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가 살기 위해’ ‘사실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영화다. 호랑이는 그저 파이의 상상 속에서 창조된 허구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를 선명한 영상과 함께 목격하면서 호랑이의 쓸모와 존재를 실감한다.

두 번째 호랑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의 호랑이는 정반대다. 영화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고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관객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힌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일본의 여성작가 타나베 세이코의 단편 소설을 이누도 잇신이 영화화한 작품이다. 쾌활하고 솔직한 성격의 대학생 츠네오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의문의 여성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사랑의 완성에서 끝나는 해피엔딩이 아니라 이별 뒤에 사랑이 완전히 숨을 거두는 과정까지 담담히 지켜본다는 점이 애틋하고 성숙하게 다가온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는 호랑이가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는 동물원에 갇힌 호랑이가 잠깐 나오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제목에 박혀있듯 이 영화에서 호랑이가 상징하는 바는 적지 않다.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 싶어 하지만 무서워서 동물원에 가보지 못한다. 조제에게 호랑이는 츠네오와 사귀고 난 뒤에야 마주할 수 있었던 겁나는 존재다. 아니 어쩌면 바깥세상을 마주한다는 것이 조제에게는 호랑이와 같은 공포였을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는 모두 어딘가에 갇힌 존재들이다. 몸이 불편한 조제는 방 안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야하고, 호랑이는 무섭지만 우리 속에 갇혀 있고, 자유로워서 좋다고 하는 물고기들도 실은 수족관에 갇혀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호랑이를 대면한 조제는 끝내 세상과 마주하는 법, 홀로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엔딩에서 조제는 외롭고 고독하지만 과거의 달콤함에 매달리지 않고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하여 조제에게 이별은 끝이 아닌 과정이 된다.

다시, 여기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는 당신 내면에 잠든 야수다. 그것은 비록 상상의 산물이지만 무엇보다 생생하게 재현되어 당신이 역경 속에서 버틸 수 있도록 돕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호랑이는 당신 안의 공포다. 그것은 영화 속에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당신이 세상과 마주할 수 있도록 적절한 통과의례가 되어준다. 폭력의 통제와 공포의 극복. 당신은 어떤 호랑이가 더 마음에 드는가. 당신 내면의 호랑이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분명한 건 결국 두 호랑이 중 살아남는 건 당신이 먹이를 주는 쪽이라는 사실이다. 

 

 


송경원
《씨네21》 기자. 영화평론가.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수상, 동국대 영상대학원 영화이론 박사과정수료. 부산일보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의 여러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았음. 인디 다큐 페스티발 프로그래머. 영화 뿐 아니라 게임, 애니메이션 등 영상 문화전반에 대해 비평 활동.

 

* 《쿨투라》 2022년 1월호(통권 91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