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진옥출을 아시나요?: 최산, 『파란 나비』
[북리뷰] 진옥출을 아시나요?: 최산, 『파란 나비』
  • 윤중목(시인, 영화평론가)
  • 승인 2022.01.01 0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옥출, 진옥출을 아시나요? 특정 인물을 거명하여 묻는 ‘아시나요?’에는 통상 두 가지 의미 복선이 담겨있지 싶다. ‘이 사람 모르신다고요? 혹 아실 줄 알았는데.’라는 유감의 조가, 비난조까지는 아니라도, 하나일 것이요. ‘네, 모르실 수 있죠. 그러나 앞으론 꼭 기억해 아셔야 해요.’라는 바람과 다짐의 조가 다른 하나일 것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동무들과 YMCA 기관지 《청년》을 함께 읽고 토론하며 해맑게 웃던 충주 노은의 시골 아이. 아버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잃어버린 조국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살겠다고 말하던 귀하고 사랑스러운 딸. 경성으로 유학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 그만 눈물을 흘리던 갈래머리 소녀. 자유연애를 실천하려다가 자가당착에 빠진 듯하여 어쩔 줄 몰라하던 얼뜨기 모던걸. 기독교사회주의를 놓고 경성제대 남학생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던 당찬 이화여전 학생.

몽양 여운형과 동지적 연애 관계를 맺게 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르던 20대 초반의 동경 유학생. 몽양의 딸 여순구를 낳자마자 조국과 아기와 자신의 당당한 미래를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겠노라 결심하던 젊디젊은 엄마. 그리고는 곧바로 중국 태항산으로 건너가 항일 무장투쟁에 몸을 던진 여전사.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의 부대원으로 중국 화북 일대의 일본군을 공황 상태에 빠뜨린 ‘타이항산 스라소니’. 일제의 밀정으로 밝혀진 남편 허갑을 단박에 사살해버린, 때로는 비정함도 마다치 않는 냉철한 여성.

도둑같이 찾아온 해방 직후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꿈꾸며 좌우합작, 남북합작 성사를 염원하던 이상주의자. 이를 위해 무정과 몽양 두 거인의 공조를 돕던 열혈 인민군 장교. 이후 조국분단의 비극과 한국전쟁의 광기에 투철하게 맞서며 또 고민하고 고뇌하며, 그러면서도 몽양과의 붉은 사랑, ‘적연(赤戀)’을 변치 않고 간직한 여인. 그러다 끝내 서른넷의 나이에 평양의 대동강 대동교에서 하늘하늘 ‘파란 나비’로 산화해간 영혼.

아니, 이게 대체 한 명의 여자였단 말인가? 정말로 그녀 단 한 명이 살아낸 인생이었단 말인가? 인생이란 소설 같고 영화 같다는 말이 상투적인 비유라서 꺼려하거늘, 이토록 광대무변한 스토리와 스케일을 지닌, 정말로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인생이라니. 그리고 그자가 글 서두에 ‘아시나요?’라는 바로 그 물음의 특정 인물 진옥출이라니.

‘몽양 여운형과 붉은 사랑을 나눴던 여인’, 진옥출! ‘죽음의 길조차 당당한 삶의 길로 걸어갔던 여인’, 진옥출! 그녀의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일대기가 작가 최산에 의해 웅대하면서도 치밀한 서사로 극화되어 장편 소설 『파란 나비』로 최근 세상에 나왔다. 최산 작가의 솔직하고 진지한 고백인즉, 여운형의 막내딸여순구의 생모였던 진옥출에 관한 짧은 글을 우연하게 접하고는 마치 빙의를 입은 듯 오랫동안 그녀에게 사로잡혀 있었노라고. 도저히 떨칠 수 없는 호기심과 연민으로 가득했건만 실존 인물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막상 소설로 써 내려가기 막막해하던 어느 날, 문득 그녀가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와 자신의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간절히 말하는 걸 들었노라고. 그리고 그것이 본인에게 내려진 작가로서의 소명과 사명이라 새기고 새겨가며 숱하디숱한 밤을 새우고 새워가며 만 3년 동안을 쉼없이 작업해 나갔노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대한민국의 현대사, 특히나 해방 전후사의 공간에서 불꽃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진옥출의 일생이 흡사 오늘의 것처럼 여기 500페이지 대하급 소설로 복원된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손에 잡아 읽노라면, 서사의 근간을 이루는 사건과 인물이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영민하게 넘나들며 참으로 광대하면서도 섬세하게 직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남과 북 한반도와 일본 및 중국을 가로 지르는 공간적 시대적 배경과 흐름이 거시적 역사관으로 꿰뚫어져 있고, 그 안 개개의 사건들과 인물들은 서로서로 조각보처럼 촘촘히 꿰매어져 있다. 그렇게 역사의 격랑과 광풍 속에 불꽃으로 던져진 진옥출 그녀의 사랑이, 그녀의 사상과 투쟁이, 그리고 숨 가쁜 운명이 읽는 이의 눈앞에 한 편의 초대형 웰메이드 스펙타클 영화로 장쾌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무릇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 일제 강점기 이래 해방 전후사의 역사적 인물들을 담아내는 소설과 평전에 있어서 당대 가히 최고봉인 안재성 작가는 〈파란 나비〉에 대해 아래와 같은 추천평을 내놓았다.

“이 책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선물을 가져다준다. 하나는 진옥출이라는 탁월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부활시켰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최산이라는 작가가 우리 문단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작가는 기록이 거의 없는 전사 진옥출의 생애를 상상으로 복원하되, 실제 사실을 토대로 정확하게 그려냄으로써 학자 출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서사적 신뢰성 높은 최산 작가가 우리 역사 속에 잊히고 숨겨진 인물들을 앞으로 계속 생생히 복원해주길 기대한다.”

그래, 위의 분명 상찬에 힘입어 이제 다시금 물으련다. 유감의 조는 거두고, 단지 바람과 다짐의 조로 물으련다. 이제는 세 배 네 배 더 높아진 바람과 다짐의 조로 물어보련다. ‘진옥출을 아시나요, 진옥출?’ 그러면 아마 이렇게 답해 주실 것을 믿으면서. ‘진옥출요? 알죠. 진옥출 알다마다요…….’

 

 


윤중목
1989년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저서로는 시집 『밥격』, 에세이집 『수세식 똥, 재래식 똥』, 영화평론집 『지슬에서 청야까지』, 아울러 인문학적 영화 평설서인 『인문씨, 영화양을 만나다』 등이 있다. 

 

* 《쿨투라》 2022년 1월호(통권 91호)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