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순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방법: 함돈균, 『순간의 철학』
[북리뷰] ‘순간’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방법: 함돈균, 『순간의 철학』
  • 해나(본지 에디터)
  • 승인 2022.01.01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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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철학』은 문학평론가이자 연구자인 함돈균이 펴낸 인문학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 문학은 물론 역사와 철학, 종교와 사회 등 인문학의 영역 곳곳을 넘나들면서 ‘시간’의 본질과 의미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그 한가운데를 지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우리 삶의 ‘시간’, 일상의 특별함을 새롭고도 낯설게 되돌아보게 하는 글들을 묶었다.

저자는 매일 반복되는 ‘시각’의 숨은 의미를 포착하고, 동사로서의 ‘순간’을 재발견하며, 저마다의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보편의 시간 속에서 개별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책이자. 순간의 고유함과 일상의 특별함을 새롭고도 새삼스럽게 깨우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의 철학』은 『사물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바 있는 인문 에세이와 동시에 기획하고 집필했던 시리즈물이기도 하다. 전작에서 흔히 마주하는 사물들을 사회나 인간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고찰했다면, 이 책에서는 일상 속 ‘시간’, 너무 익숙해 우리가 그것의 의미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순간의 특별함과 존재의 의미를 내밀히 다루었다. 가시적 사물이 아닌 추상적 시간을 탐구하는 만큼 보다 도전적인 자세로 끈질긴 ‘길어올림’에 투신한 결과물이다. 저자의 본령이라 할 문학 텍스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을 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일상 속 매체에서 가림 없이 사유의 단초를 포착했다.

이전과 이후를 바꾸어놓는 것,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특이점을 철학적 의미의 ‘사건’이라고 한다면, 그 사건은 찰나와 순간에 이루어진다. 찰나와 순간에서 연쇄적 시간의 고리들이 쏟아진다. 무한한 연기(緣起)적 계기들은 하나의 특이점, 찰나 - 순간이 낳은 자식들이다. 그리고 시간의 자식들은 다시 무한한 계기의 연쇄를 낳는다. 그것이 ‘존재’를 생성한다. 플라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엘레아의 현자 파르메니데스에게 찰나 - 순간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한 물질성으로 이해되었고, 이 모호성을 견디지 못한 그는 물질성을 일종의 공간성으로 규정했다. 그가 이 공간적 물질성에서 거세한 모호함은 ‘시간’이었으며, 그 시간의 본래 이름이 바로 ‘찰나 - 순간’이다.
  - 「찰나 또는 순간」 중에서

‘찰나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깊어지는 인문학 이야기’라는 이 책의 부제는 저자가 가닿고자 하는 시간의 본질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담고 있다. 저자는 「찰나 또는 순간」이라는 글에서 겁의 어원인 ‘kalpa’, 찰나의 어원 ‘ksana’라는 산스크리트어와 불교적 해석을 실마리로, 빅뱅과 시공간이라는 현대물리학의 설명을 거쳐,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현대철학자 벤야민의 관점을 아우르고, 소설 『구운몽』과 보들레르의 시를 빌려 짧은 순간에 깃든 우주적 계기와 사물 세계의 인연, 연기(緣起)를 본다. 그는 무한대의 ‘영겁’과 무한소(無限小)의 ‘찰나’를 관통하는 것이 시간의 특이점, ‘사건’이라 말한다. 책의 여정을 따라 경계 없는 배움과 한계 없는 사유를 지나온 우리는 매 순간을 ‘사건’의 차원으로, 스쳐 지나는 찰나를 영원한 의미의 층위에서 되돌아보게 된다.

함돈균은 이 책에서 전방위적 지식에 특출한 직관을 더해 이제껏 없던 새로운 사유를 펼쳐내고 있다. “문장 중심으로 논리적 통제 없이 정서적 흐름을 자유롭게 써나갔다”고 밝힌 바대로, 독자에게 보다 친근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촘촘한 해석을 풀어냈다. 크리스마스캐럴, 새벽 2시 라디오, 공항의 입국장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정경은 물론, 서태지의 〈소격동〉이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같은 노래, 〈스타 이즈 본〉 〈감기〉 〈러브 액츄얼리〉등 친숙한 영화를 통해 우리 곁에 바짝 다가서서 시간을 듣는 귀와 영원을 보는 눈을 열어준다. 스스로 ‘사유자’이기에 앞서 ‘글쟁이’에 가깝다 말하는 저자가 선물하는, 철학서를 대신하기에 충분할 ‘에세이’인 셈이다. 

문화와 사회의 규율이 온전히 신체와 얼굴을 통제하지 못하는 찌뿌둥한 표정의 오전 8시, 삶의 안전선과 조화되지 못한 도시의 개별적 신체들은 사회적 페르소나를 쓰지 못해 방심해 있다. 그래서 도시의 민낯이 방심한 틈새로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과 과학이 추구하는 원리인 ‘하나이면서 모든 것(hen kai pan)’은 오전 8시에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역설로, 삶의 개별성을 생활 속 ‘같은 것’으로 흡수해버린다. 모든 타인이 서로의 거울이 되는 도시적 삶에서 나의 얼굴도 타인의 얼굴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 「지하철 플랫폼 오전 8시」 중에서

총 3부로 나누어진 본문을 읽다 보면 단순히 이해하고 끄덕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간을 경험하고 체험 하게 된다. “왜 ‘첫비’는 없는데 ‘첫눈’은 있는가” 물어올 때, “책상 ‘위’에 놓인 『장자』를 집어드는 순간을 생각해보자” “서른, 서른, 서른……이라고 입으로 몇 번 소리내어보자” 제안할 때, 우리는 어느새 반복되던 일상에 낯선 방식으로 ‘참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늘 마시던 커피잔에 비하자면 작기만 한 찻잔이 반복되는 ‘따뜻함’이자 주고받는 대화의 그릇임을 상기하며, ‘서른’이라는 소릿값 속에 ‘서러운’ ‘(낯)설은’이라는 언어철학적 통찰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연상에도 가 닿는다. 예컨대 『순간의 철학』은 시간의 철학을 알려주는 이론서가 아니라 순간을 ‘철학하게 하는’ 가이드북이라 하겠다.

집필에서 출간까지 9년여의 시간을 거치며 저자는 그간 글에서 드러냈던 뜻을 사회제도, 문화적 현실에서 실현할 사회적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액티비스트’로서 삶을 병행하고 있다. 인문학의 변치 않는 가치와 교육의 비전이라는 믿음 아래 ‘배움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고 있는 그는 이 책 『순간의 철학』을 통해 과거의 가르침을 닦아 현재를 깨닫고 미래를 배우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가 머리말을 대신한 글에서 밝힌 것처럼,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영원은 찰나에 깃들어 있기도 하다”. 그것을 보는 것이 시인이라면,이 책을 읽는 우리의 순간이 곧 영원이자 ‘시’가 되기도 할 것이다.

 

 


 

* 《쿨투라》 2022년 1월호(통권 9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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