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아이 캔 스피크] 침묵 깨기와 연대의 힘
[2018 오늘의 영화 - 아이 캔 스피크] 침묵 깨기와 연대의 힘
  • 유지나
  • 승인 2018.09.10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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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 감독 '아이 캔 스피크'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영화텍스트가 이 세상이란 콘텍스트 속에서 내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 지 자문해보곤 한다. 〈아이 캔 스피크〉를 거듭 보면서 새삼 좋은 영화에 대한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시차를 두고 다시 볼 때 더욱 흥미진진하게즐길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진 작품이 좋은 영화라는 깨우침이 그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뜨거운 감자처럼 작동하는 콘텍스트 속에서 이 영화 텍스트가 일으키는 파장은 강렬하다. 이 작품을 다시 보면, 처음 볼 때 인식하지 못했던 이미지 기호들이 예시적 의미화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이를테면 돈독 오른 개발업자, 그에 부응하는 구청장의 태도, 막판에 등장하는 위안부 문제를 위로금으로 무마하려는 일본측 태도는 자본 코드로 이어진다. 현상 유지와 승진에 몰두하는 공무원 코드 읽기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런 맥락을 짚어가며 서사 흐름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아픈 과거를 침묵 속에 묻어 두었던 한 여성이 청문회에서 위안부로 당했던 아픈 과거를 당당하게 고백하기까지 벌어지는 변화를 웃음과 눈물 속에 풀어내 보인다. 도입부에서 옥분(나문희)은 재개발 위험에 처한 재래시장에서 옷 수선을 하며 20여 년간 8천 여건 민원을 구청에 넣는 ‘도깨비 할매’ 로 코믹하게 설정된다. 옥분이 검은 우비를 입은 뒷모습으로 비오는 날 구청에 등장하자, 업무 상황이 급변한다. 한가롭게 업무 시작 시간을 즐기던 직원들이 갑자기 숨거나 중요한 전화를 받는 척 한다. 비 오는 날이면 황산을 퍼붓는 남자 사진을 들이대며 따지는 그에게 양 팀장(박철민)은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란 노래를 인용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릴라이언스 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명필름
ⓒ릴라이언스 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명필름

바로 그날, 첫 출근을 한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는 처음부터 옥분과 대립 관계로 설정된다. 번호표를 한 번도 뽑아 본 적이 없는 옥분에게 민재는 모든 것을 절차에 따라 해야 한다는 원칙주의자다운 태도로 맞대응한다. 이후 이 둘의 관계는 삐걱대며 부딪치지만 강한 연대를 보여주는 역동적 관계로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재개발업자 일당과 재래시장 상인들의 대립 사이에 끼인 구청장과 구청 직원들은 (그들 대사처럼) ‘공무원스럽게’ 행동한다. 그러나 원칙주의자답게 민재는 절차대로 행정소송을 제안하여 구청장의 명예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절차는 결국 재래시장을 지키는 방향으로 풀려 나간다. 심지어 민재의 지혜로 구청장의 명예욕을 자극해 옥분의 신분을 보장하는 서명 작업으로까지 유도하는 이례적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공무원 신조 몰라? 나대지 말자! 복지부동!”이라고 외치는 상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민재는 여느 공무원과 다른 자신의 원칙을 수행하는 캐릭터 발전을 보여준다. 

민재와 옥분의 관계는 수차례 갈등을 겪지만 결국 더 깊은 소통으로 이어지는 반전이 거듭 발생한다. 첫 번째 갈등은 영어 과외 건이다. 우연히 영어 학원에서 민재의 뛰어난 영어 실력을 목격한 옥분은 영어 과외를 해달라고 조른다. 민원처리보다 더 골치 아프게 매달리는 옥분에게 민재는 어려운 시험으로 그 요청을 거절한다. 옥분이 못 맞춘 ‘탄핵’, ‘좌절’, ‘음모’는 초보자에겐 너무 난해한 영어 단어이다. 그와 동시에 이 단어들은 이후 전개되는 서사의 흐름과 옥분의 심정을 대변하는 의미심장한 기호이기도 하다!

시장 뒷골목으로 가는 동생 영재(성유빈)를 몰래 따라간 민재가 옥분의 된장찌개 곁들인 밥상에 초대받은 동생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이 둘의 관계는 반전된다. 잘못 보관해 녹아 터진 냉동 만두국을 해 먹으며 동생 보호자 노릇을 해온 그에게 옥분은 따스한 보호자로서할머니와 같은 존재로 다가온다. “생라면 뿌셔 먹는 애기가 안 돼 보여 밥 먹으러 오라”고 초대한 옥분은 “나도 혼자 먹으면 적적하니까”라고 해명한다. 밥상 코드로 감동받은 민재는 자청해서 영어 선생이 된다. “할머니가 왜 시장에서 오지랖 떠는 줄 알아? 외로워서 그래.”라는 영재의 말은 어머니의 죽음을 숨겼던 아버지의 비밀을 간직한 채 외로운 보호자가 된 민재의 비밀스러운 내면을 (영어로) 고백하게 만들기도 한다. 민재 형제는 한가위 명절날 제례주를 들고 옥분의 집에 방문한다. 텅 빈 시장 뒷골목 살림집에서 홀로 라면을 끓여 먹던 옥분은 이들의 방문을 반기며 호박전과 생선전을 부쳐 먹는 대안 가족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릴라이언스 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명필름<br>
ⓒ릴라이언스 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명필름

그러나 또 다른 갈등 상황이 벌어진다. 어려서 헤어진 LA에 사는 동생이 한국말을 못해 그와 소통하려고 영어를 배운다는 옥분의 설명은 민재가 바로 그 LA 동생과 통화한 후에 거짓말로 들통나기도 한다. 게다가 미성년자 음주로 영재가 시장에서 잡혀가자, 옥분이 신고했을 것으로 오해한다. 곤경에 처한 옥분에겐 더 큰 불상사가 발생한다. 둘도 없이 소중한 위안부 시절의 친구 정심이 치매증 초기로 입원한 병원에 다니느라 시장을 비우게 된다. 동시에 발생한 이런 불상사들은 구청 계단에 잘못 붙인 화살표 기호로 그 전조를 예고한다. 계단을 걸어서 오르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홍보용으로 구청 직원들이 계단에 ‘↑’라고 붙여야 하는 스티커를 ‘↓’로 잘못 붙였는데, 그것은 마치 추락하는 관계와 파국으로 치닫는 서사 방향을 보여주는 기호 작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단원을 위한 반전이 발생한다. 코믹하게 펼쳐졌던 옥분의 영어 공부는 이제 미국 하원의회 청문회에서 “아이 캔 스피크”라 외치며 상처를 토로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다. 위안부 증언을 못할 정도로 치매가 진전된 정심과의 조우, 유언같은 정심의 부탁이 담긴 편지는 옥분의 변화에 불을 지른다. 전복적 결단을 내린 옥분이 어머니 산소에 찾아가 오열하는 명장면이 펼쳐진다. “엄마! 나한테 그때 왜 그랬어유! 왜? 엄마! 나한테 ‘욕봤다’ 한마디만 해줬으면 됐는데…” 가족이 가장 가까운 관계인데도, 억울하게 당한 아픔을 침묵 속에 묻어두는 이상한 한국적 가족관이 폭로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극장에서 볼 때도 그랬지만, 다시 보더라도 울컥하게 만드는 정서적 효과를 발휘한다.

절정을 이루는 시퀀스는 (실화에 근거한) 2007년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이 통과된 후 벌어진 워싱톤 D.C. 청문회장에서 벌어진다. 옥분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도 난관에 봉착한다. 과거 위안부 등록을 안했기에 신원 증명 문제가 발생하지만 서명 작업을 주도하고, 결정적 증거인 사진을 갖고 그곳까지 날아온 민재의 분투가 연대의 힘을 발휘한다. 막상 단상에 오른 옥분은 환청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아무 말도 못하는 곤경에 처하지만 회의장 뒤에서 소리쳐 응원하는 민재의 격려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자신의 소명을 실현해 낸다. 이중 삼중 유리문 속에 갇혀 영어 공부하는 옥분을 담아낸 미장센에서 예견되었듯이, 수십년간 감춰왔던 과거 상처는 욱일 승천기가 흉터로 새겨진 복부를 증명으로 드러내면서 전복적인 반전이 벌어진다. 불화했던 LA 동생도 찾아와 누이를 자랑스러운 존재로 화해의 손을 먼저 내민다. 이렇게 위안부 증인으로 제2의 인생을 일구는 옥분은 시장으로 돌아와 진주댁과 소원해졌던 관계도 회복한다. 친하게 지내면서도 과거 상처를 감춘 것에 서운해하며 옥분을 외면했던 진주댁과의 눈물젖은 화해는 진실한 우정의 연대이기도 하다.

 


유지나 영화 평론가. 파리7대학 기호학과 문학박사(영화기호학). 저서로 『유지나의 여성영화 산책』 『한국영화, 섹슈얼리티를 만나다』(공저) 등이 있음.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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