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꿈의 제인] 마성의 캐릭터를 만드는 완벽한 방법
[2018 오늘의 영화 - 꿈의 제인] 마성의 캐릭터를 만드는 완벽한 방법
  • 윤성은
  • 승인 2018.09.10 15: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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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훈 감독 '꿈의 제인'

〈꿈의 제인〉의 내레이터는 ‘소현’(이민지)이다. 엄마가 돌아가셨고, 가출팸(한 집에서 가족family처럼 리더인 ‘엄마’나 ‘아빠’를 두고 살아가는 가출한 아이들의 집단)을 전전했다는 것 외에 소현의 과거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티미한 눈빛, 소심한 말투, 답답한 행동들에서 그녀가 사회성이 부족한 인물이라는 것만 드러날 뿐이다. 사실 그걸로 충분하다. 영화에 묘사된 소현은 사람들과 어울리려 무던히 노력하지만 반복해서 혼자가 되어버리는 아이, 그럴 수밖에 없을 만큼 호감이 가지 않는 아이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관계 유지에 실패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 또한 서너 단계쯤 더 높다. 그래서 관객들은 소현의 얼굴이 클로즈업 될 때조차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바라본다. 외로움을 토로할 때, 사람들 사이에서 겉돌 때, 조직과 개인 사이에서 갈등할 때 등 소현에게 감정이 이입되는 순간은 몇 번 있지만, 먼저 다가가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의 인력引力이 그녀에게는 없다. 그러나 트릿한 주인공 대신 이 영화에는 ‘제인’(구교환)이 있다. 소현이 동경을 갖고 응시하는, 소현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를 이루는 제인은 영화의 모든 매혹이 응축되어 있는 인물이다. 〈꿈의 제인〉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는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구현하는 완벽한 방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엣나인필름, CGV아트하우스

제인은 첫 등장부터 관객을 완전히 압도한다. 초반부, 가출팸에서 떨어져나와 ‘다시’ 혼자가 된 소현은 전에 ‘정호’와 살던 모텔로 가서 자살을 기도한다. 욕조에 소현이 손목을 담그고 있는 이미지 위로 “거기라면 누구라도 있지 않을까”라는 내레이션이 얹히고, 거의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오프 스크린 사운드가 삽입된다. 그리고 “누군가 날 데려가 주지 않을까 기대했거든요.”라는 소현의 목소리에 이어 리듬을 타듯 제인이 등장한다. 녹색 귀걸이에 반짝이는 아이섀도,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소현에게, 동시에 관객들에게 특유의 중성적 목소리로 인사한다. “안녕?” 아름답고, 우아하고, 뇌쇄적이면서도 따뜻한 제인의 캐릭터가 잘 소개되는 이 장면은 비단 〈꿈의 제인〉에서 뿐 아니라 작년 한 해 동안 개봉한 독립영화를 모두 놓고 본다 해도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녀가 등장하는 부분은 초반 32분과 후반 7분에 한정되어 있으며, 이는 러닝타임의 절반도 되지 않는 분량이라는 사실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제인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하며 이끌어가는 캐릭터다.

숨막히는 첫 등장 이후 제인은 왜 그녀가 영화의 제목 그 자체일 만큼 중요한 인물인지 입증해나간다. 트렌스젠더인 그녀는 ‘뉴월드’라는 게이바의 가수이면서 가출한 아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가출팸의 ‘엄마’다. 그녀의 첫 번째 특별함은 강함과 약함을 동시에 드러낸다는 데 있다. 남성의 육체와 여성의 영혼이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누구보다 자유롭고 강한 듯 보이지만 그녀는 날 때부터 거짓(남근)을 육체에 지니고 태어난, 슬프고 연약한 존재다. 제인은 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반면, 쇠약한 육신 때문에 아이들의 돌봄을 받기도 한다.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백발의 철학자 같은데 개와 장난을 치거나 해변에서 튜브볼을 슬쩍 가져올 때는 천생 개구쟁이고, 휘파람을 불기도 하지만 불어달라고도 하는 사람,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제인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제인의 캐릭터를 함부로 규정하지 못하게 만들고, 더 알고 싶게 만들며, 그녀의 동작 하나 하나를 주시하게 만든다.

제인에게 빠져들게 만드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그녀의 대사들이다. 공히 공동체성이 강조된 그녀의 대사들은 제인의 이미지나 목소리와 함께 영화를 오래 기억하도록 만든다. 가령, 애들을 왜 데리고 사냐고 묻는 소현의 질문에 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난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쭉 이어지는 기분? 근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이런 개 같은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중략)…아무튼 그래서 다 같이 사는 거야.”

어린 소현은 이 말을 다 같이 불행해야 공평하다는 의미로 오인하고 말지만, 제인의 삶의 태도나 다른 대사들과의 맥락을 고려할 때 이 문장들은 오히려 어쩌다 있을까 말까 한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이들에게 “네 명 중 하나라도 케이크를 포기하게 만들어선 안 되는 거야…(중략)…차라리 셋 다 안 먹고 말아야지.”라고 말하거나, 뉴월드에 온 손님들에게 “오늘처럼 이렇게 여러분들이랑 즐거운 날도 있으니까 말이예요…(중략)…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만남의 인연과 공생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다. 모태로부터 ‘조경환’(제인의 본명)으로 세상에 나온 ‘거짓’과 불행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대신 가출한 아이들을 받아주고 해변가의 쓰레기를 줍는 등 타인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라는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좌우명 삼아 살아가는 ‘진실’된 인물이다.

이러한 제인의 캐릭터는 영화의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가출팸’을 소재로 하면서도 폭력이나 성매매 문제를 자극적으로 부각시키기보다 그 또래의 대안 가족에서조차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한 청소년과 매력적인 트렌스젠더를 중심으로 인간의 고독과 공동체에 대한 주제를 끌어냈다는 점은 〈꿈의 제인〉의 우수한 독창성을 말해준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따돌림 당하고 사랑받지 못했던 제인은 소현과 또 다른 차원에서 사람들과 섞이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이었지만, 그 고통을 그녀만의 삶의 철학으로 승화시킴으로써 그녀를 떠나지 않는 아이들,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뉴월드의 관객들과 ‘함께’ 있게 된다. 그리고 소현의 손목에 도장을 찍어줌으로써 제인은 소현을 뉴월드에 입장시킨다. 여기서 뉴월드는 게이바의 이름임과 동시에 소현이 다른 사람들 속에 자연스럽게 파묻힐 수 있는,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다. 미러볼이 알록달록한 색을 내며 돌아가는 세계, 사람들이 기분 좋게 몸을 흔드는 세계,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이 세계에서 소현은 드물게 행복해 보인다.

 아트하우스<br>
ⓒ엣나인필름, CGV아트하우스

그러나 허무하게도, 이토록 멋진 제인의 존재가 거짓이었음이 서서히 밝혀진다. 영화는 소현이 실제 겪은 이야기와 상상한 이야기, 두 개의 플롯을 문턱 없이 오가며 관객들을 혼란시키다가 종반부에 가서야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그 전까지는 같은 인물, 같은 집, 같은 캐리어, 같은 상황, 같은 대사등이 두 이야기 모두에 등장하고, 편집 또한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 시간적 순서조차 짜맞추기 쉽지 않다. 이러한 형식은 몽환적 음악이나 슬로우 모션과 더불어 상상과 현실, 거짓과 진실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경계를 파고들면 제인이 등장했던 초반부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소현의 상상임을 알 수 있다. 정호를 따라 간 뉴월드에서 소현은 제인을 만났고, 덕분에 뉴월드에 입장해 그녀의 노래를 들은 적은 있으나 그녀의 집에 산 적은 없으며, 따라서 제인과의 추억이나 ‘제인팸’의 생활은 모두 지어낸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실이 잘 구축되어 있던 제인이라는 캐릭터를 한낱 물거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화 속 영웅처럼 더욱 환상적으로 가공한다는 사실이다. 제인을 완벽하게 이상적 존재로서 완성시킨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소현의 상상 속에 재구성된 인물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엣나인필름, CGV아트하우스

대부분의 인생을 시시한 인간들과 보내고, 시시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평범한 우리는 종종 거짓을 현실로 느끼고 싶을 때 영화관을 찾는다. 제인과의 만남은 어쩌면 관객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거짓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등장인물의 매력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인생의 드문드문한 행복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윤성은 영화학 박사. 201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이후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공연과 리뷰 PAF 평론상 수상. amee9@naver.com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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