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박열] 사랑과 저항, 혹은 겹쳐지는 역사와 영화의 둘레
[2018 오늘의 영화 - 박열] 사랑과 저항, 혹은 겹쳐지는 역사와 영화의 둘레
  • 임대근
  • 승인 2018.09.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준익 감독 '박열'

박열, 朴烈은 이름 그대로 치열하게 살다 갔다. 영화는 그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을 좇아간다. 그의 삶은 사랑과 저항이라는 두 낱말에 모여 있다. 그는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사랑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그의 삶과 사상의 동지였다. 그들은 함께 저항했다. 제국주의와 국가주의, 남성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분할 통치와 편 가르기

영화는 우리를 1923년 도쿄로 데려간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자신이 “고증에 충실한 영화”이며, “등장인물은 모두 실존 인물”임을 선언한다. 역사와 영화의 둘레를 가능한 가깝게 겹쳐놓으려는 이 선언은 곧바로 관객의 동질성을 구성해낸다. 관동대지진으로 생겨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분할 통치, 디바이드 앤 룰의 기술. “조선인이 지진을 틈타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錬太郎의 궤계는 조선과 일본을 분명하게 획분한다. “십오 엔 오십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하게 조선인을 학살하는 차별화 전략은 정체성 검열을 통해 “너는 어느 편인지”를 묻는다. 관객은 영화와 더불어 모두 박열의 편이 된다.

 

관객의 동질성을 구성하는 방식

이런 구별 짓기는 조선과 일본을 갈라놓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영화는 성공적인 구별 짓기를 위해 두 가지 선택을 수행한다. 하나는 아나키스트로서 박열의 색깔을 조금 묽게 하는 선택이다. 물론 박열은 이렇게 말한다. “천황 같은 기생충을 살려두는 건 인류, 사회, 민족의 참된 평화를 해치는 거아냐?” 또 이런 말도 한다. “일본뿐 아니라 우주 만물을 멸망시키는 게 내 꿈이다.” 민족이 아니라 인류와 사회를 앞세운 건 과연 아나키스트답다. 그러나 영화는 조선인을 차별하고 학살하는 참혹한 일본 제국주의와 그에 저항하는 박열에 더 관심을 갖는다. 물론 그건 조선인 아나키스트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숙명이었다. 또는 스물 남짓한 젊은 아나키스트에게 무르익은 사상을 기대하기엔 무리일 수도 있다. 박열은 국가와 정부를 악으로 간주하는 아나키스트로서 사상가보다는 조선인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투사여야 했다. 재판정에 한복을 입고 임하겠다는 그의 고집이 관철되는 장면은 이런 주장을 상징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는 재판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외친다. “얼마 전 간토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기억한다. 죽창과 일본도로 찌른 것은 기본이오, 양손을 묶어 강 속에 던지고 불 속에 산 채로 집어던지고 오토바이에 몸을 묶어 죽을 때까지 달렸다. 그리고 3·1만세운동 때처럼 조선인 대학살도 묻으려 한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묻으려고 발악할수록 드러나는 것이 자연의 순리요, 역사의 흐름이다. (…) 너희 천황을 지키기 위해 육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이유 없이 죽었다. 이의 있는가!” 영화의 이런 선택은 아나키즘의 급진적인 주장이 조선 대 일본의 이분법보다 관객의 동질성을 구성하는 구별 짓기 과정을 수월하게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렇게 제국주의에 대한 적극적 저항,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을 형상화한다.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다른 하나는 바로 카네코 후미코의 등장이다. 조선과 일본을 갈라놓는 구별 짓기는 이 영화의 관객에게는 어쩌면 선험적인 의식이다. 선험적 의식은 일상적이고 관습적이기 때문에 창의적이지 않다. 가네코 후미코는 그 일상성과 관습성을 깨버리기 위한 장치다. 저항의 대상은 일본 제국주의일 뿐, 일본 민중은 아니라는 인식을 통해 단조롭지 않은 관계를 구성해낸다. 그런 면에서는 자발적으로 박열을 변호한 후세 다츠지布施辰治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인물로서 2004년 대한민국 건국훈장까지 수여받은 그 또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자리매김된다. 무엇보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박열의 애인이자 동지로서 저항의 삶을 살아간다. 어쩌면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는 그녀에게서 더욱 도드라진다. ‘폭탄 사건’을 숨긴 박열에게 싸다구를 날리면서 큰소리를 칠 때, 그건 남성주의에 대한 저항의 한 장면이다. 자서전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절하게 차별화되면서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는가에 대한 고백은 아나키스트로서 그녀를 합리화한다. 카네코 후미코는 조선 대 일본이라는 이분법 구도를 벗어나서 민중 대 지배자라는 새로운 구도를 구성함으로써 대립과 저항의 이중 구조를 만들어낸다. 가네코 후미코가 지바 감옥으로 이송된 뒤, 비현실적인 큰 창문으로 밝은 빛이 들어올 때, 그건 이 영화의 가장 밝은 장면이 된다. 저항의 결과가 얼마나 큰 빛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대한 영화적 고백이다. 그건 그녀의 삶이 결코 어둡지 않았다는 위로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남성주의에 대한 저항, 나아가 불합리한 국가주의와 무자비한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형상화한다.

ⓒ메가박스(주)플러스엠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원작’을 설명하기

역사와 영화의 둘레를 가깝게 겹쳐놓으려는 영화의 시도는 때때로 ‘원작에의 충실성’ 여부와 같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영화의 독립성과 상상력보다는 ‘원작’으로서의 역사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완성도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과 더불어 등장하는 이 영화의 자막은 그런 점에서 또 다른 논의의 시작점이다. 다만, 영화가 그걸 넘어설 수 있었던 까닭은 박열이 누군가를 반복적으로 묻는 과정 속에서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관객은 이 영화의 ‘원작’으로서 역사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원작’을 설명하는 과정을 거듭함으로써 사실은 역사와 영화의 둘레를 겹치려는 시도를 영화적 상상력이라는 둘레로 치환해 버린다. 

영화의 시작과 더불어 소개되는 인물, 박열은 그의 시와 함께 등장한다. 한 허름한 노동자, 인력거꾼의 형상에 겹쳐지는 시 한 대목. “와타시와 이누코로데아루.” 이 말은 직유가 아니다. 은유라 하기엔 직설이다. 박열은 자신을 이렇게 규정했다. 그러므로 ‘개새끼’로서 그에게는 어떤 선택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박열이 차별과 구속과 억압과 절망 속에서도 자유와 해방, 여유와 해학을 온몸으로 내뿜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그 자신을 ‘개새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급식을 거부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고, 심지어 신문 중에 연인과 더불어 사진까지 찍으려 했던 낭만적 인간이 등장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끊임없이 박열이 누구인가를 규정하려고 한다. ‘불령선인’, 그러니까 “말 안 듣는 조선인”도 그 중 하나다. 박열에 대한 정체성 확인의 절정은 신문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예심판사 다테마스의 질문들은 박열의 이름, 나이, 직업, 주소 등을 파고든다. 교차 편집이 이어진다. 재판정 또한 그런 과정의 변용이다. 신문이란 정체성 확인의 과정이다. 우리는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자와 확인 받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 속에서 다시 한 번 박열의 편이 된다. 이건 다르게 말하면 ‘원작’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접근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 권력 관계를 통쾌하게 뒤집어버리는 박열의 면모를 통해 관객을 위로한다. 

 

다시, 사랑과 저항

무엇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소중한 생각을 새롭게 되뇌곤 한다. 영화적 상상력에 관한 논의, 혹은 역사와 영화의 둘레 겹치기에 관한 논의를 남겨두더라도 영화는 이런 말을 곱씹게 해주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구실을 했다. “원래 국가나 민족이나 군주라 불리는 것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뿐인 군주에게 권력과 신성함을 부여한 것이,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자격 하나로 평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이걸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그건 사랑과 저항이라는 자격을 갖춘 자여야 한다.

 


임대근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사단법인 아시아문화콘텐츠연구소 대표. 중국영화, 대중문화, 문화콘텐츠 등에 관심을 갖고 강의, 번역, 연구 등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음. 한-중 영화의 초국적 교류와 상호 관객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음. dagenny@daum.net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