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속의 詩] 이근화 시인의 「과도」
[새 시집 속의 詩] 이근화 시인의 「과도」
  • 이근화(시인)
  • 승인 2021.10.01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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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

이근화

사과를 깎는데 자꾸 네조각이 되었다. 4란 무엇인가. 집 안을 발칵 뒤집어 먼지를 일으켰다.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호흡하고 재채기를 하고, 맛과 기분과 호흡을 나누는 사이 우리는 부지런히 가구를 옮기고. 그래서 달라졌는가. 곤충은 온갖 소리를 낸다. 팔십만종의 곤충이 한꺼번에 울어댄다면 이 세계는 거대한 스피커처럼 울리겠지만. 썩은 것을 부지런히 파고드는 입들. 사과를 깎는데 여덟조각이 가능하다. 8이란 또 무엇인가. 발가락이 간지럽다. 소리가 없는 개미는 쉽게 눌러 죽일 수가 있다. 개미는 돌아가고 개미집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구멍으로 부지런히 드나드는 발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과는 열두조각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 사과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 다른 손은 너무 쉬워지지만 개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 시집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중에서

 


이근화
2004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등이 있음.

 

* 《쿨투라》 2021년 10월호(통권 8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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