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덩케르크] 시간의 3중주로 구축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
[2018 오늘의 영화 - 덩케르크] 시간의 3중주로 구축한 역사적 사건의 의미
  • 이채원
  • 승인 2018.09.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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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덩케르크'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1. 프롤로그

지난 며칠 동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찾아온 것이 바로 이 해변이다. 그러나 지금 그와 장병들이 바라보고 있는 해변은 이제까지 보아온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곳은 혼란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퇴각 행렬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 그냥 이렇게 된 것이다.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수천 명, 아니 수만 명,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군인들이 넓디넓은 해변에 퍼져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들은 검은 모래알 같았다. 그러나 밀려오는 파도를 따라 해안 근처에서 뒤집힌 흔들리는 포경선 한 척을 제외하면 배는 한 척도 없었다. 긴 방파제 옆에도 배는 없었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가 다시 바라보았다. 그것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방파제였다. 군인들의 긴 줄, 예닐곱 줄로 이루어진 긴 행렬. 무릎을 구부리거나 허리를 펴고 망연자실하여 서 있는 군인들의 긴 행렬이 얕은 물 속까지 거의 5백 야드나 이어져 있었다.

— 이언 매큐언(Ian McEwan), 『속죄』(Atonement) 중에서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으로 불리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치열한 전투도, 짜릿한 승리도, 비장한 패배도 아닌 단지 철수 작전이었다. 단지 퇴각에 불과한 덩케르크 작전이 비중 있게 기록되고 인상적으로 기억되며 문화텍스트를 통해 계속 다시 소환되고 있다. 영국인 작가 이언 매큐언Ian McEwan이 그의 대표작 『속죄』(Atonement)에서 남자주인공인 로비를 죽게 한 전쟁터도 덩케르크 해변이었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에서 SF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영국인 영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이 〈인터스텔라〉 다음 영화로 선택한 소재가 SF와는 가장 먼 거리에 있다고 생각되는 실화이며 그중에서도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다.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서, 도버 해협과 독일군 사이에 고립되어 발이 묶인 33만여 명의 연합군이 영국으로 귀환한 역사적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 의미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스크린에 펼치는가?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2. 전쟁영화에 대한 관습적 기대에 반反하다.

전쟁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 중 가장 극한의 체험이다. 전장戰場에서 목숨 걸고 전투에 임해야 하는 군인들은 물론이고 후방에서 기다리고 견뎌야 하는 민간인들에게도 전쟁은 인간 존재의 심연까지 들여다보게하는 참혹한 상황이다. 그 속에서 군인들도 민간인들도 왜 싸우는지도 모른 채 살아남기 위해 편을 가르고 죽이고 죽는다. 한편 역설적으로 극한 상황에서 휴머니즘은 더욱 빛을 발한다. 때문에 인간과 세계의 단면을, 많은 정보를 농축한 채 축약해서 보여줘야하는 영화에서 전쟁은 중요한 소재가 되어왔다. 특히 인류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거대한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은 영화의 단골 소재이다. 전쟁 영화는 몇 가지 장르적인 관습을 가지고 있다. 승자의 기록일 경우가 많으며, 치열한 전투 장면의 스펙터클에 집중하거나, 암호 해독이나 최신 무기 같은 기술적 성취에 주목한다. 그리고 대체로 영웅 서사를 구축한다. 또한 휴머니즘의 드라마로 이어지며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관객 역시 전쟁 영화를 관람할 때 관습적인 기대 지평을 가지고 실제와 비슷하지만 실제는 아닌 전쟁 상황에 몰입한다. 

〈덩케르크〉는 이러한 전쟁 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위반하고, 다른 관점에서 전쟁에 접근한다. 결과적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전쟁 영화를 소비하게 한다. 우선 〈덩케르크〉에서는 용감하고 영웅적이기보다는 겁에 질리고 비겁한 인간 군상이 묘사된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됐고, 구조되어 조국으로 돌아가는 기적만을 바라고 있다.”는 자막이 제시된다. 여기서 “그들”은 용맹스럽고 희생적이며 애국심으로 무장된 군인이 아니라 “기적”적으로 “구조되어”야 하는 무기력한 존재들이다. 덩케르크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긴 줄에 서는 것뿐이다. 앳된 얼굴의 군인 토미는 배에 타기 위해 부상자를 이용한다. 부상자를 들것에 싣고 달려서 가까스로 배에 탔지만 해군 대령은 부상자만을 받아줄 뿐 들것을 운반한 토미와 깁슨에게는 내려서 줄을 서라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토미와 깁슨은 다른 배에 타게 되지만 정원 초과로 인해 프랑스인 깁슨이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어떻게든 자신이 먼저 살려고 분투하는 인간들의 민낯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겁에 질리고 나약하며 살기 위해 공격적이게 되고 편 가르기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비난을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해와 공감의 에토스를 전달한다. 전쟁의 장엄함과 영웅의 활약에 압도되기를 기대했을 관객 역시 전쟁의 지리멸렬함과 군인들의 평범한 비겁함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영국 군인의 시신을 묻어주고, 목이 말라하는 토미에게 생명수와 같은 수통을 건네주며 영국 배에 오르기 위해 영국 군복으로 갈아입은 깁슨이 배가 침몰했을 때 영국 군인들을 구하기 위해 배로 돌아가 잠긴 문을 열어주었던 것처럼, 잠시의 시간을 함께 했을 뿐이지만 깁슨의 편이 되어 영국 군인들에게 항변하는 토미처럼, 전쟁터의 군인들은 겁에 질려 비겁하지만 한편으로는 상식적인 연민을 가지고 있는 인간인 것이다. 

〈덩케르크〉는 지극히 평범해서 이해할 수 있는 생존 본능, 비겁함과 이기심, 연민 등을 리얼리즘을 내장한 카메라를 통해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민간인들의 참여 덕분이었다. 퇴각 군인들을 태울 수 있는 구축함은 한 척씩만 올 수 있고, 게다가 해변 가까이에는 큰 배를 정박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군인들의 긴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영국인들은 개인 소유의 요트와 어선 등을 이끌고 위험을 무릅쓴 채 덩케르크로 향했다. 900여 척이었다고 전해진다. 하나의 선의善意위에 또 하나의 선의가 더해져서 집단의 선의가 되었고 그것이 기적을 만든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그렇다고 귀향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도 못해서 지쳐가는 군인들을 보면서 함께 지친 관객들 앞에 민간인 소유의 배들이 바다를 뒤덮으며 등장하는 장면은 내내 건조했던 영화 〈덩케르크〉에서 처음으로 영화적인 감동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실화를 소재로 했기에 더 감동적이다. 

〈덩케르크〉에서 전투기의 연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가지 않고 퇴각을 지원 사격했던 전투기 조종사가 멋있는 영웅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영웅은 조종사 한 명이 아니다. 개인 소유의 배를 몰고 도버 해협을 건넌 사람들 하나하나가 영웅이다. 〈덩케르크〉는 기적을 만드는 힘이 한 사람의 영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선의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것이 아님을 부끄러워한다. 자신들은 단지 살아서 돌아왔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그들을 위로한 말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덩케르크 정신’이 가진 현대성이자 반 파시즘이라고 나는 본다. ‘임전무퇴’나 ‘배수의 진’은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승리지상주의에 기반을 둔다. 또한 병사들을 기능으로 환원하며 개인을 집단에 매몰시키는 봉건성과 전체주의를 내포한다. 하지만 군인 한 명 한 명은 자살테러의 수단이나 총알받이가 아닌 인간 개인이다. 후퇴와 철수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생존’ 자체가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할 수 있다. 이를 주목했기에 <덩케르크>는 다른 전쟁 영화들과 차별화된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3. 영화의 본질을 체현體現하는 영화

우리가 현실에서 인식하는 시간은 비가역적이다. 소설에서 구성되는 시간은, 회상과 예시豫示를 오가더라도, 선형적으로 서술된다. 오직 영화에서만이 시간은 가역적이며 상대적으로 구성된다.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동시에 재현하는 것도 영화매체에서만 가능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매체 자체가 타임머신과 같은 영화의 특성을 언제나 영리하게 활용하고 탁월하게 드러냈다. 대표작 〈인셉션〉에서 시간의 주관적 상대성을 환상적으로 펼친 영화적 상상력은 〈인터스텔라〉에서 시간의 물리적 상대성까지 영상화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덩케르크〉에서도 세 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 절묘하게 교차 편집되어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간다. 덩케르크 해변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일주일과, 구조를 위해 덩케르크로 향하는 개인 요트에서의 하루, 독일공군의 폭격을 막는 영국 전투기 조종사의 한 시간은 영화기술에 의해서 하나의 결말로 수렴된다. 해변과 요트와 전투기 안에서 다르게 설정된 시간의 길이는 각 상황의 심리적 시간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간 구성은 치열한 전투 장면이 없어도 관객들을 집중하게 한다. 서로 다른 공간과 서로 다른 시간의 길이를 연결된 시퀀스로 인식해야하는 관객은 어느 순간 혼란에 빠진다. 기승전결과 같은 시간의 논리적인 구성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특히 혼란에 빠지게 되지만, 물리적 심리적 길이가 다른 시간들이 한 시점에서 수렴되는 과정에 곧 몰입된다. 이것이 〈덩케르크〉가 가장 영화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이다.

〈덩케르크〉가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증명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들은 아이맥스 카메라와 대사의 절제에 있다. 실제 덩케르크 해변에서 실제 철수가 있었던 계절에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해변과 바다와 하늘과, 크지 않아도 또렷하게 들리는 사운드는 우리가 영화를 퍼스널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이 아닌 극장에서 관람해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심지어 전투기의 비행과 전투 장면까지도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아이맥스 카메라에 의해 촬영되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터뷰에서 “조종사 파리어가 모는 스핏파이어 전투기는 개인이 소장한 기체인데, 굉장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면서 촬영했다. 소형 아이맥스 카메라를 전투기에 설치하고서 배우와 실제조종사가 함께 비행하면서 공중전 장면을 찍었는데, 정말 꿈만 같았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 꿈같은 경험을 영화관의 관객 역시 체험한다. 이러한 체험은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볼거리를 즐길 때와는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덩케르크〉는 화려하고 웅장한 전쟁 영화가 아니다. 생생한 현장감 속에서 관객이 온 몸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실제 현장과 유사한 체험을 통해 즉물적으로 체화하는 심리적인 공감이다.

이러한 감각적 체험과 심리적 공감은, 대사를 최소화함으로써 언어로 한정할 수 없는 잉여의 의미가 전달되면서 더 확장된다. 그 당시 전쟁 속에서 필사적으로 생존하고자 했고 생존을 도우려 위험을 무릅썼던 각각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현재 나의 삶에 개별적인 의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활자로 기록된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감각으로 체험하고 각인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영화적인 체험이다. 영화 〈덩케르크〉의 생생하고 광대한 시계視界는 눈에 보이는 것을 손에 잡힐 듯이 느끼게 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관람을 넘어서 체험하게 할 때 시청각매체인 영화는 온 몸의 감각이 열리게 하여 촉각적 체험의 환상까지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감각적 체험은 인지적 수용으로 이어진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덩케르크〉를 통해 실화의 시간까지 재구성하는 편집의 미학을 과시하고, 아이맥스 영화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을 구축하면서 영화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보여준 것은 바로 영화의 본질이다.

 


이채원 영화평론가. 서강대학교 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문학박사.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 주요 저서로 『소설과 영화, 매체의 수사학』 『영화 속 젠더 지평』 등이 있음. 나사렛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dike97@hanmail.net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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