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사일런스] 비서구와 서구, 성과 속을 가로지르는 반영웅의 초상
[2018 오늘의 영화 - 사일런스] 비서구와 서구, 성과 속을 가로지르는 반영웅의 초상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18.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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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 감독, '사일런스'

  세속주의의 승리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는 오늘날, 종교적 구원과 순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영화 <사일런스>는 이러한 의문을 피해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몇 세기 전 인류가 병에 담아 바다에 띄웠던 서신을 이즈음 받아 읽는 것처럼, 17세기 일본 땅에 선교하러 갔다가 박해받는 신부를 그린 이 영화는 시대의 조류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 같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두 가지를 제안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영화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다른 하나는 스콜세지의 필모그래프 안에서 영화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이다.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길로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사일런스>에는 스콜세지의 인장이 강하게 찍혀 있다.

  스콜세지의 첫 번째 장편 <내 문을 두드리는 자는 누구인가>(1969)의 마지막 씬은 성당에 있는 J.R.(하비 카이텔 분)에 이어, 거리에 선 그를 비춘다. 그에게 국제적 명성은 안겨준 <비열한 거리>(1973)는 “네가 회개하는 곳은 교회가 아니야. 거리에서 하는 거지.”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가 작가적 정체성을 구축해나갔던 초기 작품에는 성당과 거리의 병치를 통한 성속聖俗의 공존이 주요 모티브로 작동한다.

  세속 어딘가에 구원이 존재한다

  스콜세지는 리틀 이태리에 살았던 예닐곱 살 무렵 신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동네 마피아들이 신부에게 꼼짝 못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 계기였다고 하는데 농담 같은 이 말은 초기작을 특징짓는 요소가 된다. 부연하면, 그의 종교 지향은 세속적 힘에의 동경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세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성이지 교회에 유폐된 그것이 아니다. 나아가 그의 캐릭터들은 세속적 행위 안에서 구원의 길을 모색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일런스>는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원텍스트로 했다. 에도시대에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가톨릭이 널리 퍼지자 막부는 개방정책을 철회한다. 이어서 강력한 종교 탄압이 시작되는데, 포르투갈 예수회가 파견하여 33년간 선교활동을 했던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 분)가 탄압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제자였던 신부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 분)와 가루페(아담 드라이버 분)가 일본에 잠입한다.

  이들은 산속 오두막에 은신하며 선교활동을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노우에(이세이 오가타분)의 관졸에게 체포된다. 로드리게스는 순교를 원하지만 상황은 그의 뜻과 무관하게 전개된다. 20여 년간 탄압한 결과, 신부의 순교가 ‘기리스탄christian’의 신앙심을 강화하는 역효과를 경험한 이노우에는 신부의 배교를 유도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꾼 것이다. 로드리게스는 배교를 강요당한다. 그가 배교하지 않으면 신도들이 대신 죽임을 당한다. 배교가 구원이 되고 순교가 치욕이 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17세기가 배경이 된 탈식민적 사유

  일본 ‘기리스탄’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가톨릭 사제들이 일본에 왔지만 그들 때문에 일본인이 피를 흘리는 상황. 이 기묘한 역설이 <사일런스>를 관통한다. 카메라는 로드리게스 내면에 담긴 예수의 초상을 비춘다. 그것은 엘 그레코가 그린, 가녀리고 우아한 슬픔을 지닌 얼굴이다. 로드리게스는 예수를 따라 그처럼 성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서구는 순교자를 영웅시하는 세계이다. 그는 종교적 영웅으로 부활하고 싶다. 하지만 가톨릭의 힘이 미치지 않는 극동의 변방 일본에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는 고귀한 것을 위한 죽음은 가능하지만 더럽고 비천한 것을 위한 죽음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일본인을 위한 죽음도 그랬는지 모른다. 그가 일본에 온 이유는 페레이라의 배교 소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즉 ‘우리’ 가톨릭 세계가 패배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스콜세지는 엔도 슈사쿠의 비서구 정체성에서 나온 탈식민적 사유를 영화에 최대한 반영한다. 이노우에와 로드리게스의 대화는 17세기 상황이 빚어내는 탈서구적 가치관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이노우에는 일본을 남성으로, 서구 세력을 일본에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추녀들의 탐욕으로 비유한다. 서구 세력을 여성으로 타자화함으로써 아직은 훼손되지 않은 동양의 자존감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나아가, 이노우에는 일본을 서양 종교가 자랄 수 없는 늪지로 특수화한다. 로드리게스는 가톨릭과 진리의 보편성을 내세우면서 이를 부인한다. 보편성은 20세기 내내 제3세계에 대한 서구의 우위를 절대화하는 가치였다. 늪지로 일본을 표상화하는 이노우에의 특수성은 대지라는 보편성의 일부로 존재한다. 일본 위정자의 탄압을 독毒으로 규정하는 로드리게스와는 다른 것이다. 이노우에의 보편성은 특수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러한 탈(脫) 서구/현대/식민적 사유는 <사일런스>가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 서사라는 인상을 넘어서게 한다.

  가톨릭 사제 중에는 일본 문화를 경멸하는 신부도 있었다. 그에게서 서구어를 배운 일본인 통역관은 일본에 대한 서구인의 멸시를 ‘미러링’ 하듯 로드리게스를 조롱한다. 그는 페레이라가 ‘사와노 추안’이라고 개명했으며 일본인 처자식과 살고 있고, 높은 지위에도 올랐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그가 이를 위해 일본에 온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배교가 마치 세속적 힘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처럼. 로드리게스는 더 큰 혼란에 사로잡힌다.

  그는 포승줄에 묶여 호송되는데 나가사키 거리와 일본인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말에 올라탄 로드리게스의 시점 쇼트를 따라가다 보면 이들은 하이앵글로 포착된다. 이러한 각도는 서구인의 우월감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카메라에 비친 일본은 19세기 서양 우편엽서에 담긴 동양처럼 타자화 되어 있다. 이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단죄하듯 일본인들은 그에게 돌을 던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일런스>는 현대성과 탈현대성이 부딪히는 담론으로 영화적 사유를 중층화한다. 

  신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가루페가 일본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로드리게스는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다. 왜 신은 인간의 비참함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것일까? 신이 내리는 시련이 선한 것이라면, 일본인이 겪는 고통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원망 섞인 회의에 빠진다. 이때 이노우에는 페레이라와 로드리게스를 대면시킨다.

  일본 사찰에서 평화를 찾은 듯한 페레이라는 신의 침묵을 부재로 해석한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르면, 일본에는 가톨릭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인은 자연적 존재이다. 이들은 서양 종교를 이해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능력이 없다. 그는 여전히 로드리게스의 스승을 자처하면서, 일본 땅에 도움이 되는 존재로 각자의 본성을 탐구해보자고 권한다. 그것이 신을 찾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로드리게스는 그를 비난하면서 고집을 꺾지 않는다. 

  로드리게스는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을 탓한다(“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그에게 남은 것은 신심을 다한 기도지만, 그것은 페레이라 말대로 소용이 없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이미 배교를 한 신도까지 고문당하는 현실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결국 배교를 결심하게 된다. 그의 발 앞에 예수 얼굴이 새겨진 널판이 놓인다. 그것을 밟으면 배교가 증명된다. 그가 머뭇거리며 망설일 때,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하여라. 괜찮다. 밟아도 좋다. 네 고통을 아노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신의 침묵이 드디어 깨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성화를 밟는 순간 심중에 빛나던 예수의 얼굴도 암흑에 묻힌다.

  스콜세지의 또 다른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서 구원인 것 같았던 신의 음성이 악마의 유혹이었다는 전개를 떠올린다면 로드리게스의 배교가 지닌 의미 또한 재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일런스>의 서사는 그의 삶 마지막까지 신이 함께했다는 암시를 던지며 마무리된다. 로드리게스는 일본인 순교자 모키치(츠카모토 신야 분)가 준 십자가를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은 엔도 슈사쿠가 교단을 매개로 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티즘에 가깝게 로드리게스의 신앙을 묘사한 것과 대조된다. 묵주처럼 시각화 가능한 성물은 가톨릭의 상징이다. 이로써 스콜 세지는 자신의 종교적 체험을 양보하지 않고 영화에 새겨 넣었다.

  종교적 반영웅으로서 현대인의 초상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외쳤던 예수의 한 순간을 기억한다. 그래서 로드리게스에게 그것이 구약의 한 구절을 음송한 기도가 아니라 신의 침묵에 대한 공포로 다가왔을 때의 전율에 공감한다. <사일런스>에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또 하나 있다. 그는 배교의 아이콘 유다로 표상되는 기치지로(쿠보즈카 요스케 분)이다. 그는 로드리게스와 가루페를 일본으로 인도했고 은신 중인 신도와 만나게 했다. 또 로드리게스가 체포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구원 의지를 갖고 있지만 유혹에 무력한 인물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끊임없이 신을 부정하고, 그러고 나서 용서를 거듭 간청한다. 그는 세속적 힘에 구속되어 있지만 해방을 원하는 우리와 닮았다.

  스콜세지는 로드리게스의 배교 이후의 삶에 기치지로를 동행시킴으로써 세속 안에서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주제를 관철한다. 로드리게스의 구원은 기치지로를 이해하고 그와 동화됨으로써, 나아가 그의 변함없는 믿음에 의해 승인되는 것 같다. 이들은 종교 탄압 이벤트인 성화 밟기 행사에 나란히 참여해 예수의 얼굴을 밟는다. 신성과 가장 거리가 있어 보이는 기치지로는 가슴에 성화를 품고 있다가 발각되어 어디론가 끌려간다(로드리게스는 일본인 아내의 도움으로 십자가를 쥐고 죽을 수 있었다. 역시 비서구인은, 서구인의 도우미로 신앙의 주체가 되는 것일까). 로드리게스는 가장 낮은 곳에서 기치지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페레이라-로드리게스와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기치지로는 로드리게스를 여전히 신의 대리자로 여긴다. 그를 고해 신부로 대접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스콜세지는 어쩔 수 없는 서구인이다). 반면, 페레이라와 로드리게스는 연민과 경멸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일본에 도착했을 때 기치지로가 자신을 관졸에게 밀고하려는 게 아닐까 의심에 빠진 로드리게스는 예수가 유다에게 한 말,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를 중얼거렸다. 결국 기치지로는 그 말을 실천했다. 로드리게스도 그랬다. 스콜세지도 서구인의 정체성으로, 또 영화로써 하고자 하는 바를 실천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이것이 <사일런스>가 지닌 중층적 의미, 그 복합적 층위가 비서구의 역사 속에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충격하는 바일 것이다. 


진수미 _ shistory@hanmail.net
글쟁이. 더불어 잘살기 연구소 소장. 시집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밤의 분명한 사실들』, 미술평론서 『연대의 시학, 열정과 연 사이』 등을 출간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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