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원더우먼] 전쟁 세력에 맞서는 여성영웅을 그리다
[2018 오늘의 영화 - 원더우먼] 전쟁 세력에 맞서는 여성영웅을 그리다
  • 황진미
  • 승인 2018.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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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 젠킨스 감독 '원더우먼'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원더우먼’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영웅 캐릭터이다. 하지만 어디서 온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오죽하면 “하늘에서 나타났나 원더우먼, 땅에서 솟아났나 원더우먼~” 이라는 노래가 있을까? 1970년대 TV 시리즈에서 린다 카터 주연의 〈원더우먼〉을 먼저 접한 관객이라면, 섹시하고 요란한 의상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가 신화적 기원을 지닌 캐릭터임을 알지 못한 채. 본래 원더우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코믹 북의 주인공으로 탄생한 캐릭터이지만, 태생부터 20세기 페미니즘 운동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캐릭터가 등장한 지 70여 년이 지나 출시된 영화 〈원더우먼〉은 원작의 배경이 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을 20세기 페미니즘의 태동기와 겹치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원작의 캐릭터가 품고 있던 신화적 기원을 웅장하게 되살림으로써 원작의 의미를 심도 있게 드러낸다.

1. 아마존의 여전사

영화는 신화적 공간인 데미스키라 섬의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공동체를 비추며 시작된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쟁의 신 아레스에 맞서기 위해 제우스가 숨겨놓은 종족이라 믿으며, 군사훈련에 몰입한다.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건국신화를 지닌 폐쇄적인 부족공동체에서 어린 다이애나가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자라난다. 공주이자 전사인 다이애나는 특별한 힘을 지니는데, 그가 자신의 힘을 알게 되었을 때, 세계의 결계가 열리듯 인간세계와의 접촉이 일어난다.

갑자기 하늘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자, 다이애나는 마치 인어공주처럼 바다에 떨어진 조종사를 구한다. 최초로 만난 인간 남자를 감상할 짬도 없이, 그를 쫓아 온 인간들에 의해 부족은 전투에 휩싸인다. 살육의 참혹함을 본 다이애나는 전쟁의 신에 맞서는 소명을 위해, 최초로 접한 남자 트레버를 따라 전쟁이 한창인 유럽으로 온다.

‘데미스키라 섬의 여전사’ 이미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기원을 둔다. 19세기에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의 시가 많이 읽히면서, 아마존의 여전사 전설이 널리 알려졌다. 19세기 후반에는 고대 모계사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아마존의 여전사 종족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는 이들이 생겨났다. 정치적으로는 여성참정권 운동이 점화되어 20세기 초를 뜨겁게 달구었는데, 당시 급진적인 서프러제트들 중에는 여가장제와 모계사회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10년대에는 대학에 진학하는 신여성들이 늘어났는데, 이들을 ‘아마존’이라 불렀다. 이는 ‘아마존의 여전사’라는 이미지가 20세기 초 새롭게 부상한 페미니즘 운동의 아이콘으로 쓰였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신화적인 연원을 지닌 존재인 ‘아마존의 여전사’가 난데없이 인간 세계로 건너와 독일군과 맞서 싸운다는 설정이 1941년 DC 코믹스를 통해 발표된 원작의 독창성이다. 원더우먼 캐릭터를 만든 만화의 원작자, 윌리엄 몰튼 마스턴은 1911년 서프러제트 운동을 지지하는 하버드 남성 연맹에 가입한 남성 페미니스트였다. 그는 남성들이 망친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남성보다 발달된 감정과 뛰어난 사랑의 능력을 지닌 여성들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거짓말 탐지기의 발명가이기도 한 마스턴은 일부일처제를 거부하고 두 명의 전위 페미니스트 여성과 가정을 꾸렸다. 원더우먼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마스턴과 두 명의 여성 배우자로 구성된 페미니스트 공동체가 만든 발명품이었다. 마스턴은 강인하고 자유롭고 용감한 여성 슈퍼 히어로가 세계 평화를 위해 나치와 싸운다는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소녀들이 자신감이 고취되길 원했다. 슈퍼맨, 배트맨에 이어 세 번째로 탄생한 슈퍼 히어로인 원더우먼은 출시와 동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원더우먼이 착용한 성조기 무늬의 노출 패션은 애국주의와 볼거리를 제공하려는 대중적 타협이었다. 원더우먼은 팔찌로 총알을 막으며 싸운다. 이는 잔인한 공격보다 방어를 위주로 하는 평화주의의 사상에 걸맞다. 또한 진실의 밧줄을 통해 자백을 얻어내는 것은 마스턴이 발명한 거짓말 탐지기를 연상시킨다. 원더우먼이 악당에게 잡혀 밧줄에 결박된 뒤 스스로 탈출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서프러제트들이 쇠사슬로 자기 몸을 묶고 시위를 벌였던 것의 재현이다. 즉 억압당하는 여성이 스스로 족쇄를 풀고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하지만 원더우먼의 패션이나 잦은 결박 장면은 SM 본디지 성애자이자 복장도착 페티시즘을 갖고 있던 ‘배운 변태’ 마스턴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로 읽히기도 한다.

1975년에 만들어진 린다 카터 주연의 TV시리즈는 큰 인기를 끌었다. 1977년부터는 한국에서도 방영되어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국내 관객들의 뇌리에 남은 원더우먼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에 빚지고 있다. 평소에는 군병원의 간호사인 다이애나가 몇 바퀴를 회전하면 원더우먼으로 변신한다. 강한 힘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는 원더우먼은 정의를 수호하는 슈퍼 히어로의 이미지를 갖지만, 민망한 노출패션과 채찍, 올가미 등의 소품이 암시하는 성적인 이미지가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 결과 ‘힘센 미녀 원더우먼’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중적 의미를 지닌 캐릭터로 받아들여졌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2.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배경

원작이 탄생한 지 76년만에 극장판 실사영화 〈원더우먼〉이 제작되었다. 연출을 맡은 패티 젠킨스는 여성 감독답게 마스턴이 애초에 품었던 여성주의적 의도를 충실히 반영해냈다. 영화의 배경을 원작과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옮긴 것도 서프러제트 운동에서 출발한 20세기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원형적으로 복원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또한 데미스키라의 용맹한 여전사들의 모습이나 신화적 세계관도 현실세계에서 감히 꿈꾸지 못한 시원의 발상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데미스키라에서 전사로 길러진 다이애나가 20세기초 유럽에 와서 느끼는 문화적 충격을 보라.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며, 공적인 자리에 나가 발언할 권리도 얻지 못했던 20세기초 유럽 여성들의 삶과 데미스키라에서 활달하게 말을 달리던 여성들의 삶은 강한 소격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한편으로 20세기초는 인류문명사에서 최초로 남성중심의 도그마에 균열이 생긴 시기이기도 했다. 다이애나가 백화점에서 200벌의 옷을 입어본 끝에 찾아낸 밀리터리 의상과 비서직을 맡은 여성이 언급하는 서프러제트 운동이 이러한 균열의 징표이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은 평화를 위해 전쟁의 신과 싸운다는 원더우먼의 문제의식을 숙성시키기에 최적의 배경이기도 하다. 만약 원작대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았더라면, 흔하고 식상한 전쟁영화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파시즘에 맞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가 지금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 지 모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로 재현된 적이 없었던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전쟁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텍스트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알다시피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과 동맹에 의해, 명분도 없는 전쟁에 전 유럽이 빨려 들어간 사건이었다. 또한 총력전 체제와 전후방이 따로 없는 모호한 전선, 그리고 현대적 무기의 사용으로 전투인력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살상된 최초의 현대전이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죽이고 세계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순수한 신념을 지닌 다이애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환멸을 느낀다. 무고한 어린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전장을 뛰어다니던 다이애나는 생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독일 장군과 맞선다. 다이애나는 그를 죽이면 전쟁이 끝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를 죽여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아레스는 오히려 영국의 원로 정치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인류의 호전성으로 인해 전쟁은 끝날 수 없다고 설파한다. 이 대목이 무척 중요하다.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적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인간사회에 내재된 모순에 있다는 인식이다. 즉 독일군과 싸우는 미군, 파시즘과 싸우는 미군, 소련과 싸우는 미군, 외계인과 싸우는 미군, 이슬람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미군으로 옮겨가며 자신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상대는 전쟁을 일으키는 악마라고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를 불문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세력이 무엇이고 전쟁을 막으려는 세력은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성찰해보는 것이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3. 인간에 대한 믿음

다이애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은 보호할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또한 자신이 데미스키라의 여전사가 아니라, 사실은 신의 자식임을 알게 된다. 자아 찾기에 성공한 그가 이제 인간을 위해 싸워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는 인류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의 길을 가겠노라 결심한다. 이는 전쟁을 막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인간을 통해, 인간이 선한 존재일 수 있음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에게 이런 믿음을 심어준 트레버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트레버 일행은 트레버가 균열된 존재임을 보여준다. 살인자이자 사기꾼이자 밀수꾼인 이들의 정체성은 트레버의 것이기도 하다. 트레버는 스파이라는 이중의 정체성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낸 백인이라는 원죄를 지닌다. 그는 자신도 전쟁을 일으킨 세력의 일원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흠 없는 존재의 희생이 아니라, 연루된 존재의 책임완수이기에 인간적인 숭고함을 지닌다. 신의 관점에서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던 다이애나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심오한 각성을 품은 슈퍼 히어로 역할을 맡은 배우가 하필 갤 가돗이란 사실은 굉장한 아이러니를 지닌다. 이스라엘 배우인 갤 가돗은 2014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폭격했을 때,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밝혔다. 당시 이스라엘 군의 백린탄 사용으로, 사망자가 무려 2000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 538명이 어린이였다. 참혹한 만행이었지만, 이스라엘 시민들은 마치 불꽃놀이를 즐기듯 폭격을 관람하였다. 당시 맥주를 마시며 폭격을 관람하는 이스라엘 시민들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인류적인 공분이 끓어올랐다. 〈원더우먼〉의 장면들 중에는 마을 건물에 독가스 포탄을 쏘아서 민간인들을 몰살하는 모습과 이를 관람하기 위한 의자가 설치된 모습이 등장한다. 끔찍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원더우먼을 연기하면서 갤 가돗은 무엇을 느꼈을까. 맨(인간/남성)이 일으킨 전쟁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양측 참호 사이의 공간인 ‘노 맨스 랜드’를 홀로 당당하게 걸어가던 원더우먼의 숭고한 발걸음을 왜 하필 극렬 시오니스트이자 아레스의 추종자인 배우의 몸을 통해 보아야 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황진미 이화여대 의대 졸업. 연세대 보건학 박사 수료. 진단검사의학 전문의. 2002년부터 《씨네21》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영화평론가로 활동. chingmee@hanmail.net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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