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오늘의 영화 - 윈드 리버] 설원을 메운 침묵과 비애의 무게
[2018 오늘의 영화 - 윈드 리버] 설원을 메운 침묵과 비애의 무게
  • 이태훈
  • 승인 2018.09.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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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쉐리던 감독 '윈드 리버'

오래 기억되는 영화에는 약속이나 한 듯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이야기 스스로 뿜어내는 강력한 에너지. 또 이리저리 곱씹고 해석할수록 깊은 맛을 내는 겹겹의 의미 층위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극장 밖으로 나설 때에야 마음 깊은 곳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되는 듯 새롭게 다가오는 힘도 있다. 이 영화 〈윈드 리버〉 역시 그렇다. 

미국 와이오밍의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 겨울이면 영하 20도 강추위에 눈보라가 쉼없이 몰아친다. 코요테같은 포식 동물을 쏴 죽여 가축을 보호하는 게 직업인 ‘코리’(제러미 레너)가 젊은 원주민 여성의 유혈 낭자한 시체를 발견한다. 신참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을 도와 살인범을 쫓는 동안, 코리와 희생자 가족 사이 얽힌 아픔, 영역을 잃은 야생동물처럼 보호구역 안에 갇힌 아메리카 원주민의 절망, 사건 뒤에 숨겨진 인간 본성의 추악한 비밀이 조금씩 민낯을 드러낸다.

ⓒ유로픽쳐스

퍼렇게 날선 이야기의 힘

도입부에서 영화는 설산과 설원 위 검푸른 밤하늘에 퍼렇게 날을 벼린 칼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달의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한다. 맨발로 그 위를 뛰어가는 젊은 여자의 가쁜 숨소리 위로 고운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덧씌워진다. “나의 세상에는 아름다운 초원이 있다/ 나뭇가지가 춤추듯 바람에 나부끼고/ 햇살이 부서져 호수에 물결이 이는/ 나무는 다시 잎을 피울 테고/ 이 곳에 겨울은 결코 오지 않으리/ 당신을 아는 단순한 완벽함 속에 안식을 찾으리.” 여자는 눈밭 위에 피를 토하며 한 차례 쓰러졌다 일어나 달리지만, 다시 한 번 더 쓰러지고 일어나지 못한다. 이 잔혹한 풍경과 아름다운 시의 패러독스는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비애의 정조 속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감독 테일러 셰리던은 2017년 이 영화로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을 받았다. 〈시카리오〉(2015)와 〈로스트 인 더스트〉(2016)의 각본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던 배우 출신. 이어서 〈윈드 리버〉까지, 그가 쓴 시나리오는 미국-멕시코 국경지대, 텍사스 황무지, 와이오밍 설원으로 배경을 옮겨 다닐 뿐 실은 거울에 비친 한 사람 얼굴처럼 닮아 있다. 비애로 가득 찬 약육강식의 세계가 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실존의 한계가 있으며, 그 고통을 껴안고 살면서도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윈드 리버〉에도 작가 셰리던의 인장은 선명하다. 이 영화들은 ‘현대 웨스턴 3부작’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셰리던은 본인이 가장 아꼈던 마지막 시나리오 〈윈드 리버〉를 직접 감독했다. 

셰리던이 영화의 이야기를 쌓아올리는 솜씨에는 이제 막 감독을 시작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어려운, 연출자로서 갖는 경이로운 확신이 스며 있다. 가슴을 턱 막히게 하는 극단적 폭력의 순간들이 있고, 차가운 안개 속에 들어선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몸을 적시는 정서적 침묵의 순간들이 있다. 그 기막힌 균형으로부터 보는 이의 마음을 강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무거운 공기가 만들어진다. 양쪽 팔에 무거운 추를 단 천칭저울대가 더 이상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나가는 순간이 올 때, 폭넓은 사회적 부정의의 문제가 그 폭발의 균열로부터 가스처럼 뿜어져 나온다. 그 리듬감에 몸을 맡기는 것 만으로 관객은 360도 회전하는 롤러코스터를 10번은 탄 것처럼 멀미를 느끼게 된다.

특히 코리와 제인이 마약중독자 원주민 청년들의 아지트 문을 두드렸다.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그리고 살인범들과 벌이는 클라이맥스의 마지막 총격전은 그 균형, 균열, 폭발, 멀미를 앓는 듯한 통증의 가장 우아한 집합이다. 영화는 사건의 잔혹함이나 범죄 미학에는 관심이 없다. 카리스마 넘치는 살인범이나 정의의 사자 수사관, 번쩍이는 은제 나이프와 포크로 인육(人肉) 스테이크를 씹는 스타일리시한 연쇄살인마 없이도, 영화는 집단 강간 뒤 살해당한 여성의 사연과 그 주변 사람들의 비극을 교직하며 다른 어떤 범죄 스릴러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강도의 극적 긴장을 드라마 전체에 부여한다. 이야기가 스스로 뿜어내는 강력한 에너지다.

벗어날 수 없는 한계, 끝없는 좌절의 땅 전술했듯 윈드 리버는 와이오밍 주의 원주민 보호구역이다. 아마도 그 지역 원주민의 언어로 된 이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선 아무도 그 이름을 본래 그 땅을 가리키던 언어로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이 땅에 쌓여있는 것은 가장 진보된 사회라는 미국의 번영이 딛고 선 비극의 총합이다. 조상들이 가졌던 것을 빼앗긴 원주민들의 대물림되는 빈곤, 침묵과 눈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권태, 손에 잡힐 듯 하다가 싸락눈처럼 부서져 내리는, 거대한 적설의 시신 위로 섞여 들고 마는 희망, 끝없는 좌절 같은 것들이다. 

필연적으로 이 땅과 그 속의 사람들은 잔혹한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그 알레고리의 순환 안에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굴레,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와 실존의 한계들이 엮여드는 것이다. 죽은 나탈리의 동생, 대학도 나오고 군대도 다녀왔지만 결국 인디언 보호구역 안의 마약 중독자가 된 남자는 코리에게 말한다.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었겠어요. 너무 화가 나서, 온 세상과 싸우고 싶었다고요.” 코리는 답한다. “알아. 나도 그랬어. 그래서 난 결심했지.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는 없으니 나 자신과 싸우기로.” 딸 나탈리의 사망 소식을 전할 때 그 아버지의 대사는 이 영화 전체가 가진 절망의 정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난 너무 지쳤어 코리. 이 삶을 사는 데 너무 지쳤어.”

‘영하 20도 눈밭을 맨발로 얼마나 뛸 수 있느냐’는 FBI 요원 제인의 질문에 코리는 답한다. “살려는 의지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소? 그 애는 전사戰士요. 당신이 얼마를 생각하든, 그 애는 훨씬 더 많이 뛰었을 거요.” 늑대를 닮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제레미 레너와, 스칼렛 위치가 아닐 때 훨씬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엘리자베스 올슨의 이 대화를 통해, 영화는 단순한 살인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과 세계의 비극성에 관한 은유로 나아간다. 

테일러 셰리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마이클만을 꼽았다. 이 영화 〈윈드 리버〉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암울한 비장미와, 마이클만 영화가 가진 건조한 폭력의 아름다움이 모두 스며 있다.

ⓒ유로픽쳐스

부도덕한 수컷들의 시대는 가고

이 영화의 제작자는 하비 와인스타인이다. 그는 오랫동안 할리우드 먹이 사슬의 왕좌에 군림했던 최강의 포식 동물이었고, 테일러 셰리던은 그가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키우던 신무기였다. 용기있는 여성들의 외침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에 의해, 약자를 먹잇감 삼던 부도덕한 수컷들의 치세는 끝났다. 이 영화의 바닥에 깔린 것은 어쩌면, 눈보라와 무거운 정적에 미쳐버린 포식자 수컷들의 비참한 종말과 인과응보이다. 그런 영화가 하비의 마지막 프로듀싱작 중 한 편이라는 것도 아이러니다. 세상 일이란 참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것이다. 

영화 후반 병실에서, 제인은 코리에게 “솔직히 말하면 난 운이 좋았다.”라고 말한다. 과묵한 코리는 “아니, 운 같은 건 도시에나 있는 것”이라며, 아마도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길게 말을 한다. “여긴 그런 거 없어요. 지나가는 버스에 치일 뻔하다 피하거나, 돈 넣은 은행이 털릴 뻔 하거나, 전화를 받으며 건널목 건너다 차에 치일 뻔하거나, 그런 걸 피하는게 행운이죠. 여기선 살아남거나 항복하거나 둘 중 하나예요. 늑대들은 운 나쁜 사슴을 사냥하는 게 아니에요. 제일 약한 놈을 잡는 거지. 당신이 살아남았다면, 그건 당신이 강했기 때문이에요.” 제인은 “그 아이, 눈 위를 6마일이나 뛰었다.”라며 처음 울음을 터뜨린다. 그 울음이 관객의 가슴을 저며온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간다. 그 부조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결국 그런 것이다, 이 세상은.

이 영화가 오랜 시간 뒤에도 기억된다면, 그건 그 미래의 시간에도 똑같은 좌절이, 부서진 희망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인간의 부조리함과 먹고 먹히는 사회의 잔혹함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선가 또 다른 열여덟 살 나탈리가, 영하 20도의 눈밭 위를 맨발로 6마일 이상 뛰어 달아나다, 마침내 얼어붙은 자기 폐 안의 피가 터져 질식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윈드 리버〉는 그런 영화다.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종교, 미술, 영화 등을 담당했고, 현재는 공연 담당. libra@chosun.com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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