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구원과 위안이 필요한 시대의 문학
[문학 월평] 구원과 위안이 필요한 시대의 문학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9.02.0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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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와 일반 독자의 취향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지난 몇 년 사이에 가장 많이 팔린 한국소설 중 하나였던 『82년생 김지영』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평단의 반응은 꽤나 심드렁했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작품의 ‘미학적 성취’가 아쉽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었다.

양쪽의 평가 모두 이해할 만한 구석은 있다. 기존에 통용되던 ‘미학성’의 잣대를 들이대면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여성혐오의 양태를 고발하는 일에만 집중한 이 책을 상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이 상업적 성공은 바로 그런 직접성 덕택에 가능했다. 평론가들이 상찬하는 작품 중에서는 일반 독자에게 지루하고 난해한 요설로만 느껴지는 것들도 많다. 그에 반해 이 책은 누구에게나 쉽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평단과 독자의 취향이 항상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평단의 지지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도 확보한 작가들이 등장할 때도 있다. 이번 월평에서는 그런 작가들이 출간한 책을 읽어보려 한다. 첫 번째 책은 정세랑의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이다. 정세랑은 2010년 장르문학 잡지 《판타스틱》에 소설을 출품하면서 등단했다. SF, 판타지, 팩션, 호러 등등의 장르를 오가며 다양한 색조의 작품을 발표하던 그녀는 2014년에 창비장편소설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장르문학과 문단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쳐왔다.

이런 이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정세랑의 소설은 장르문학의 재미와 문단문학의 진중한 문제의식을 겸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장르문학적’이지만은 않고 또한 ‘문단문학적’이지만도 않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를 예로 들어보자.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회사생활에 지쳐서 결혼을 하려는 여성이 있었다. 주변의 언니들은 그녀에게 정혼자를 소환시키는 오컬트 의식을 알려주었다. 속는 셈치고 그렇게 해보니 나온 것은 인간이 아닌 어떤 괴기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그 존재는 인간의 절망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고, 그(것)를 남편으로 맞이한 후 주인공 여성은 편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물론 ‘문단문학적’이지 않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이 작품은 또한 ‘장르문학적’인 기율과도 거리가 멀다. 여타의 SF, 판타지, 추리문학 등등을 보면 비현실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일관성과 정합성을 지켜내고자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독자가 소설 속의 자율적 세계에 관심을 갖고 이후에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를 궁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세랑의 소설에서는 애초부터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전개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는 것 같다. 또한 그녀의 소설에서 비현실적인 설정들은 서스펜스나 스릴러적 긴장 혹은 지적 쾌감 등을 선사하기 위한 도구로 소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옥상에서 만나요」에서 환상적인 서사를 전개한 것일까. 이 황당무계한 작품에서 주인공 여성만큼은 매우 실감나게 ‘현실적’으로 모사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녀는 회사 일에 치이고 결혼이라도 해서 안정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팍팍한 회사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결혼할 애인을 구할 여유조차 앗아갔다. 그녀를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은 가끔 옥상에서 수다를 떠는 언니들뿐이었다. 아마 현실에서도 그녀와 같이 살아가는 여성-노동자들은 꽤 많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소외당한 상태로 있던 사람들의 처지가 하루아침에 개선되긴 힘들다.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deus ex machina)가 강림해서 구원이라도 해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라면 그런 사건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정세랑은 소설 속에 ‘남편’을 출연시킴으로써 주인공 여성이 위로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것은 동화적 상상력이다. 동화 속에서는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착하게만 살던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왕자를 만나거나 초자연적인 행운의 힘을 빌려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안도감을 느낀다. 「옥상에서 만나요」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절망을 빨아먹는 외계인 ‘남편’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힘겹게 살아가던 주인공 여성이 허구적 세계에서나마 구원을 받는 모습을 보면 우선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세랑의 소설은 지친 현대인들의 처지를 생생하게 묘사한 후, ‘환상적’이고 ‘장르문학적’인 요소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위로해주려 한다. 그렇게 선한 작가의 태도가 전해지기에 독자들은 따뜻한 감동을 받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야기할 책은 박준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이하 『장마』로 약칭)이다. 그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이례적인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고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온 시인이 이 정도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한 경우는 많지 않다. 현재까지도 그는 가장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는 시인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박준이 낸 두 권의 시집은 제목부터가 돋보였다. 첫 시집의 제목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절절한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독자의 호기심까지 자극할 만한 문장이었다. 또한 이 제목은, 박준이 ‘나’의 이야기에 갇혀 있지 않고 ‘당신’의 흔적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선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방증하기도 했다. 한편 이번 시집 『장마』의 제목은 겸허한 문어체이다. 누군가를 향해 발화를 하겠다는 시인의 다짐과 바람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준의 시는 구체적인 청자를 설정하고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의 시가 얼마나 정직하게 자전적 경험을 담아내고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속에서 시인이 ‘미인’이나 ‘당신’이라고 호명하는 인물들은 실재하는지 등등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실 이런 정보들은 시를 읽을 때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박준의 시는 타자를 이야기하지만, 그 타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따위의 구체적 사항들을 열거하려는 목적에서 쓰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누군가를 간절하게 회상하고 기다리는 마음 자체이다. 그 속에서는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구, 가족, 연인 등등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에 대한 화자의 아련한 기억이 자주 삽입된다. 박준은 그런 기억을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한편, 혹시나 미래에 올 수 있는 재회의 순간을 위한 기다림의 자세를 가다듬는 사람의 마음을 형상화해낸다. 그 겸허한 태도는 독자의 공감을 얻어낼 만하다. 누구나 살다 보면 타인과의 관계가 허허롭게 끝나버린 후, 우두커니 혼자 남아 소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곱씹는 날들이 온다. 그런 경험은 썩 유쾌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지루하게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는 그리워할 기억이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를 위로해줄 때도 있다.

정리하자. 정세랑의 소설과 박준의 시는 ‘문학적’이다. 전자는 소외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후자는 손에 잡히지 않는 아련한 대상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간추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데 유독 이들의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까닭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갑갑한 사회 속에서 구원과 위안을 간절히 찾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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