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왜 당신은 이토록 아름다운가! 사의 찬미
[드라마 월평] 왜 당신은 이토록 아름다운가! 사의 찬미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2.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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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의 찬미> SBS 홈페이지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꽤 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짬뽕 먹을까 자장면 먹을까, 라는 사소한 고민부터 죽느냐 사느냐, 라는 무거운 고뇌까지 다양한 주제로 우리는 선택을 요청받는다. 그나마 선택지가 두 개뿐일 때는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천 개의 고원이 각자 자신만의 얼굴로 우뚝 서 있는 걸 목격하면 그때부터는 정신이 아득해진다. 수백 개의 채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드라마를 송출해내는 작금의 상황이 시청자에게는 최고의 기회이자 최악의 위기다. 도대체 어떤 드라마를 봐야 한단 말인가.

아,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했던가. 아무리 열심히 드라마를 보고 또 봐도 우리에게는 ‘아직’ 보지 않은 드라마들이 너무나도 많다. 두 시간이면 한 편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영화라면 모를까 드라마는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최소 열여섯 시간이다. 시즌제로 넘어가면 그 시간은 곱절로 뛴다. 세상의 모든 드라마를 사랑해주고 싶지만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시청자들은 선택과 편애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최근 방영 중인 <황후의 품격>(SBS)과 <남자친구>(tvN)는 제작발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유명 작가가 집필하는 드라마와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많은 드라마가 소리 없이 시작해 소리 없이 끝나는 것에 비하면 이번 게임은 누가 승자가 되든지 홍보 효과만큼은 확실한 셈이다. 물론 나는 둘 다 보고 있다. 달콤한 허니 와플 같은 <남자친구>는 잠들기 전 본방송으로, 매운 불닭볶음면 같은 <황후의 품격>은나른한 오후에 다시 보기로. 최근 드라마 시청패턴이 ‘본방사수’에서 ‘몰아보기’로바뀌면서 편애의 강도는 전보다 더욱 강력해졌다. 하루는 24시간으로 유한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드라마는 셀수 없이 많다. 입소문이 맛집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갈림길에서 시청자들은 언론 보도기사와 온라인 댓글, 그리고 주변 지인 찬스까지 동원하여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낸다. 한 번의 실패는 실패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대한 기회비용까지 포함해 두 배의 절망과 낭패감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사의 찬미> 본방송을 보지 않았던 것, 그리고 나중에 열심히 ‘몰아보기’한 것. 이 둘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배제와 선택’이었다. 편애 때문에 배제되었지만 역시 그 편애 때문에 선택된 드라마가 바로 <사의 찬미>인 것이다.

드라마 단막극의 부활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단막극이 TV 드라마로서 가지는 의의와 역할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자고로 드라마란 열여섯 시간 이상 방영되어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짧고 강한 영화와는 다른, 편안하고 잔잔한 그래서 평범한 우리네 삶과 유사한 호흡을 가진 장르가 바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사건과 인물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의 밀도 높은 완성도는 예술적으로 감탄할만하지만 가끔은 숨이 벅찰 때가 있다.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단거리 선수가 된 느낌이랄까.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열심히 집중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앞만 보고 열심히 살필요가 있나.

내가 생각하는 드라마의 매력은 그러니까42.195km 마라톤처럼 여유롭게 뛰면서 내 몸의 움직임도 관찰하고 주변 풍경도 감상하고 같이 뛰는 사람과 눈인사도 나누는, 그런 ‘슬로우 템포’에서 비롯된다. 물론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들의 평균 속력이 일반 사람이 백 미터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 빠르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랄까. 느림의 미학을 지향하는 드라마일지라도 정교한 플롯과 매력적인 캐릭터는 필수조건이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 <사의 찬미> SBS 홈페이지

<사의 찬미>는 세 시간 분량의 단막극으로 조선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그의 애인이자 천재 극작가인 김우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배우 이종석이 작가와의 인연으로 노개런티로 출연한다는 것외에는 별다른 흥미 요소가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양적 평가로서의 시청률과 질적 평가로서의 화제성 지수에서 꽤 높은 기록을 달성하며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내 편애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드라마가호평을 받게 되면 가슴이 뜨끔하다. 원석을 알아보지 못한 ‘똥눈’의 비평가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 드라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사의 찬미>는 나의 주관적 취향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대중의 입맛에도 그리 썩 잘 맞는 작품은 아니다. 미니시리즈와 일일연속극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낯선 단막극 형식이었고 내용은 다양한 장르에서 여러 번 각색된 실화 소재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불륜 아닌가. 아내가 있는 유부남과 그의 연인이 동반 자살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들의 사랑이 첫사랑보다 순수하고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왜 그들은 아름다운지, 왜 이 드라마는 호평일색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 반복 시청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사의 찬미>에는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리움’이 자리해 있다. 두 사람의 비극적 사랑을 암시하는 ‘아리시마 다케오와 그의 연인의 동반자살’에 대해 윤심덕과 김우진은 “이별 후 평생을 견뎌야 할 그리움이 두려웠던” 것으로 결론 내리고 ‘그리움’을 관계의 구심점 삼아 서로의 주변을 계속 맴돈다. 드라마 첫 회에서 동경으로 유학 온 여자가 배우는 노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며 여자와 함께 조선 순회공연을 끝낸 남자가 우수에 젖은 눈으로 읊조린 말은 “그동안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그리울 거 같습니다”이다. 정략결혼을 앞두고 남자를 찾아온 여자는 “당신이 그랬잖아요. 내가 그립다고. 그래서 왔어요”라며 울먹이고,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그들은 사랑 고백 대신 그리움을 고백한다. “이게 무슨 소용일까요. 당신을 만나고 돌아서자마자 나는 당신이 그리운데.”

 

Ⓒ <사의 찬미> SBS 홈페이지

그렇다. 그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사랑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 가능하다. 사랑이 아름다운 구속이라면 그리움은 슬픈 자유다. 아리시마 다케오의 죽음이 “삶으로부터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신답게 살기 위한 선택”이듯 그들의 동반자살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며 유한한 육체의 삶에서 벗어나 영혼의 영원성을 향한 갈망인 것이다. 

“문학이니 조국독립이니 눈길도 주지 말고 아버지 뒤를 이을 생각만 하라”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요구에 괴로워하던 김우진은 1921년 11월 26일 일기에 “나는 열렬히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저주를 들었다. 이 악마의 포위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마음의 안일을 준 것은 그녀였다”고 기록한다. 김우진에게 윤심덕은 ‘문학’이고 ‘조국독립’이며 ‘자유’다. 가족의 안위를 위해 정략결혼과 조선총독부의 촉탁가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윤심덕에게 김우진은 말한다.

“당신도 쉬어요. 내 곁에서.” 자유를 향한 그들의 갈망은 “지금 이 땅에 자유란 없네”라는 신극 무대의 대사와 맞물려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우울과 절망을 환기하도록 재촉한다. 그들의 만남과 이별은 남자와 여자의 로맨스이기 이전에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국민이 겪어야 하는 희망과 좌절이다. 신극 대사 때문에 일본 경찰에 끌려갔다가 고문당하고 풀려난 남자를 만난 여자가 묻는다. “우진 씨, 꿈이 뭐예요?”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꿈’이 된다. 사랑을 그리워하고 꿈을 그리워하고 희망을 그리 워하고, ‘그리움의 시대’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사의 찬미>의 매력 포인트는 바로 그 ‘상실의 감각’일지 모른다. 비루한 삶이 고결한 예술로 승화하는 그 찰나의 순간. 김우진과 윤심덕의 죽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의 완성’인 것이다. 누구나 한 움큼의 그리움은 가슴에 품고 살 테니까.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에 가는 곳 그 어데이냐//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노래 <사의 찬미> 일부)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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