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오늘의 영화 - 미쓰백] 미쓰백을 변호하기 위한 스무 가지 단상과 주석
[2019 오늘의 영화 - 미쓰백] 미쓰백을 변호하기 위한 스무 가지 단상과 주석
  • 최창근(극작가 겸 연출가)
  • 승인 2019.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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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빅픽처스

  일체 중생에게 병이 있으니 제가 아픈 것입니다
  만일 중생들의 병이 없어진다면 제 병도 나을 것입니다
  - 유마거사가 병문안 온 문수보살에게 남긴 말

전사前史

하나.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앞치마가 주르르 흘러내리고 세 치 혀를 녹이던 머리칼이 마른 수수깡처럼 맥없이 뜯어져 내렸다 칼날같은 비가 하늘에서 마구 쏟아졌다. 나를 쳐다보던 그 먹먹한 눈빛 난 널 몰라 난 널 모른다 난 널 낳은 적이 없어 내 여자는 내 앞에서 고장 난 시계처럼 그렇게 망가졌다. 잘려진 머리칼을 받아서 여자의 질 속으로 집어넣고 함부로 헤집던 낯선 사내의 희디흰 손가락. 나는 조각 조각난 내 몸의 부스러기를 한 줌 눈물도 없이 마른 빵을 씹던 예전처럼 울컥불컥 잘도 씹어 삼켰다. 목이 말랐다 목이 갈라졌다 두 목이 쪼개졌다 그 목을 죽이고 싶었다

둘. 술에 취한 그가 어느 날 느닷없이 들이닥쳐 온 집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릴 때면 아이는 집에서 도망쳐 나와 옥상에 숨어서 소리 죽여 울거나 이웃집 대문 옆에 쭈그려 앉아 떨고 있어야 했다. 그때 올려다봤던 밤하늘은 아이에게서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던 걸까. 평소에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왜 술만 먹으면 폭군으로 돌변해 가족을 괴롭히는 걸까. 아이는 알 수 없었다.

셋. 어쩌면 할머니와 아이는 그 시절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이겨낸걸까.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단 하나였다. 할머니와 아이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가족이었다. 

배경

넷. 한국사회의 병리적 현상. 뒤늦게 발견되는 변사체. 주로 지하 단칸방의 모녀 혹은 독거노인들. 가난을 비관한 음독자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들. 지구로부터 추방당한 외계인들. 독점 자본이 뒤덮은 대한민국의 현주소.

다섯. 부모와 자식.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기원을 알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부터 밀려오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복수의 씨앗(들). 피는 더 이상 물보다 진하지 않다.

여섯.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화가 있다. 그냥 온몸으로 껴안아야 하는 영화가 있다. 〈똥파리〉(2009), 〈파수꾼〉(2011), 〈한공주〉(2013), 〈들꽃〉(2015), 〈꿈의 제인〉(2017) 같은 영화들. 독하고 아린, 보들레르의 〈〉악의 꽃〉 같은 영화들.

ⓒ리틀빅픽처스

인물

일곱. 미쓰백은 폭력을 행사하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전과자 경력도 있는 불행아. 미쓰백(Miss Back). 빗나간 인생,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백상아는 그렇게 자랐다. 날 건드리지 마. 세상이 날 버렸으니 이제 내가 세상을 버릴 차례다. 날 버린 세상을 용서하지 마라. 날 버린 세상과 쉽게 화해하지 마라. 치열한 싸움 없는 화해는 거짓 화해이니 절대 날 버린 부모를 용서하지마라. 그 누구와도 타협하지 마라. 자장면이 아니라 짜장면인 것처럼 미스백이 아니라 미쓰백이다, 난.

여덟.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아 주눅 든 아이. 누가 때릴까봐 겁부터 내는 아이. 주변사람들의 눈치만 보는 아이. 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버린 아이. 그렇지만 어른보다 당찬 아이. 어른 같은 아이. 내 이름은 지은 .

장면 1

아홉. 첫 만남 그리고 포장마차. 바닥에 떨어진 컵을 줍기 위해 상아가 몸을 숙이는 순간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지레 겁을 먹고 방어 자세를 취하는 지은. 아줌마, 잘못했어요. 잠시 사이. 영원보다 긴 찰나. 미쓰백. 아줌마 아니라고… 그렇게 불러.

맥락

열. 세상에는 왜 이렇게도 아픈 사람들이 많을까. 아프면서도 정작 아프다고 비명도 못 지르는 사람들. 이 수많은 아픔을 어떻게 껴안아야 할까. 옛 시절 불교의 어느 경전에서 한 거사는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했는데, 그 아픔이 사라지면 나의 병도 낫는다고 했는데.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의 고통. 고통의 한가운데로 끝없이 추락하는, 날개 잃은 천사.

열하나. 아픈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끼리 그렇게 만난다. 상아는 그렇게 지은을 만난다. 지은을 통해 어릴 때의 나를 본다. 자신의 과거를 만난다. 지은은 나중에 상아처럼 될 것이다. 나의 미래. 곧 너의 미래. 그리고 우리의 미래. 지우기 힘든 문신처럼 상아의 등에 아로새겨진 매 맞은 자국을 발견하는 순간 지은은 그 폭력의 흔적을 지우기라도 할 듯 안쓰럽게 어루만진다. 무식해서 가르쳐줄 것도 없고 뭐 가진 것도 없어서 줄 것도 없지만 대신 네 곁에 있을게. 지켜줄게. 나도 지켜줄게요. 

ⓒ리틀빅픽처스

이미지-몸

열둘. 앙상하고 헐벗은 발. 상아의 눈에 지은의 발이 먼저 들어온다. 맨발. 세상의 폭력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어린 석가(예수)의 발.

열셋. 손으로 이어지는 무언의 대화. 주저하고 망설이다 끝내는 놓칠 수없이 꽉 잡게 되는 손. 손의 연대. 뜨거운 손의 숨결 .

열넷. 길고 길게 이어지는 단 한 번의 포옹. 이제 우리는 동지가 됐어요. 

장면 2

열다섯. 놀이공원. 네 엄마는 어디 있니? 천국에요. 아빠와 나만 없으면 엄마는 그곳이 천국이랬어요. 침묵. 찰나보다 긴 영원. 미쓰백 엄마는요? 지옥에. 그 순간 지은은 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신이 그녀의 엄마라도되는 양.

역할

열여섯. 배우는 선한 역이든 악한 역이든 자신이 맡은 인생의 역을 몸에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 일생에 꼭 한번 하게 되는, 해야만 되는 작품을 만난다. 백상아를 겪어낸 한지민은 이제 그 이전의 한지민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후에 맡을 그 어떤 역도 백상아를 피해갈 수 없을 터. 배우에게 드리워진 삶의 그늘. 연기 안에서 살아낼 수밖에 없는 배우의 인생. 백상아의 인생.

열일곱. 어린 백상아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 지은 역의 김시은과 사랑에 순정을 바치는 장섭을 능청스럽게 살아낸 이희준 뿐만 아니라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김선영(장후남 역)과 특별출연한 백상아의 엄마 장영남(정명숙 역)의 연기는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단단히 한 몫 한다. 거침없는 서민의 말투. 몸에 밴 자연스러움. 악역으로 변신한 지은의 의붓엄마 권소현(주미경 역)과 지은의 친아빠 백수장(김일곤 역)의 연기도 눈부시다. 그러니까이 영화는 플롯의 영화라기보다 캐릭터의 영화.

구도構圖

열여덟. 어두운 톤. 흔들리는 카메라. 거칠고 어두워야 한다. 세상이 어두운데 영화가 밝을 수는 없지.

덧붙임

열아홉. 결핍과 콤플렉스로 점철된 인생. 무자비한 인간의 생. 짐승보다 불우하고 치욕적인. 욕지기가 솟아오르는 땡볕의 나날들. 

결結

스물. 그러므로 이 영화는 아동학대에 관한 영화보다 더 넓고 큰 영화. 어찌할 수 없는 자기연민과 비루한 슬픔에 맞서 싸우는 아픈 사람들의 연대기. 그렇게 나이를 먹고 그렇게 늙어간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그렇게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길들여진다는 것. 모두 가엾고 불쌍한 것(들). 온 누리 저주받은 몸을 받고 태어난 눈물겨운 목숨붙이들.

 


최창근 극작가 겸 연출가. 영화 애호가. 2001년 우리극연구소 새 작가, 새 무대에 희곡을 올리면서 데뷔. 2012년 계간 《시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詩作)을 겸하고 있음. 지은 책으로 희곡집 『봄날은 간다』, 산문집 『인생이여, 고마워요』 『종이로 만든 배』 등이 있음. anima69@empas.com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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