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식물의 목소리를 듣는다: 천선란 『나인』
[문학 월평] 식물의 목소리를 듣는다: 천선란 『나인』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2.02.0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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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어덜트young adult라는 소설 장르가 있다. 학문적으로 엄격하게 정의된 장르는 아니다. 영 어덜트 소설은 작품을 향유하는 독자층에 초점을 맞춘 명칭이다.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면서, 청소년을 넘어 성인을 아우르는 독자층을 형성하는 공감대 넓은 소설을 가리킨다. 서구에서는 『해리 포터』『트와일라잇』『헝거 게임』 시리즈 등이 대표적인 영 어덜트 소설로 분류된다. 한국에도 『완득이』『아몬드』 같은 작품이 영 어덜트 소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이들 소설은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 한데 청소년 문학을 청소년만 읽게 하지 않을 거라면, 굳이 청소년 문학이라는 한정된 범주에 작품을 국한시킬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청소년 문학을 영 어덜트 소설로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한국 출판계에 일고 있다. 그리하여 영 어덜트 소설이라는 표식을 달고 나온 작품이 천선란의 장편소설 『나인』이다. 그녀는 흔히 청소년 성장소설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영 어덜트 소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청소년들은 항상 그대로지만, 주변 어른들이 이들의 모습을 보고 사실상 성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의견이기는 하지만, 영 어덜트 소설이 어째서 성인 독자에게 호소력을 갖는지를 납득시키는 발언이다. 적어도 천선란 본인은 『나인』으로 그에 부합하는 작품을 써냈다.

천선란은 SF 작가군에 포함되는 소설가다. 첫 장편소설 『무너진 다리』부터가 지구 종말을 배경으로 인공지능‧안드로이드 등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한 『천 개의 파랑』 역시 휴머노이드 기수와 안락사 위기에 처한 경주마의 관계를 윤리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녀는 SF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공포 환상문학 계열에 속하는 뱀파이어 로맨스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한 작업에 대하여 작가 스스로는 “모호한 소설을 쓰고 있다.”라고 평했다.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천선란이 특정한 경계 안에서만 논할 수 있는 작품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그녀가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 어덜트 소설을 낸 것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블러썸크리에이티브
ⓒ블러썸크리에이티브

『나인』의 주인공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등학생 ‘나인’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이상한 일을 경험한다.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손톱 사이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그러던 와중에 나인에게 ‘승택’이란 소년이 찾아와 ‘너와 나는 같은 존재’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다.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그녀는 혼란스러워한다. 나인과 함께 사는 이모는 그제야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과 나인이 실은 외계에서 온 생명체이고, 식물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나인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알려준다. 나인은 그녀가 ‘아홉 번째 새싹’으로 피어나 붙여진 이름이었다. 

새로 알게 된 모든 진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나인은 자신을 아껴주는 이모를 비롯하여 친구인 ‘현재’와 ‘미래’ 등과 교류하면서 전과 같은 생활을 이어간다. 그즈음 나인은 식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통해 2년 전 사라진 학교 선배 ‘박원우 실종 사건’의 내막을 인지한다. 경찰은 박원우 실종 사건을 일찌감치 단순 가출로 처리했다. 그러나 박원우의 종적은 여전히 묘연한 상태다. 박원우의 아버지만 아들을 찾는 전단을 붙이고 다니며 홀로 자식 잃은 슬픔을 삼킨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나인은 한 나무에게서 박원우와 관련된 “도저히 모른 체할 수 없는” 진짜 이야기를 듣는다. 

나인에게 자기가 보고 들은 장면을 고백한 나무도 짠한 사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순사에게 쫓기다 객사한 소녀 금옥이가 나무에서 숨지면서 그녀의 영혼이 깃든 나무라서 그렇다. 금옥나무는 남자 고등학생 한 명이 인근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나인에게 일러준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2년 전 발생한 학교 선배 박원우의 실종을 떠올린다. 박원우 실종 사건은 단순 가출이 아니었다. 살인 사건이었다. 사건의 바탕에는 학교 폭력이 놓여 있다. 권력을 쥔 어른들은 가해 학생의 편에 서서 살인 사건을 단순 가출로 바꿔 버렸다. 이에 대하여 천선란은 이렇게 부연한다. 

학교 폭력은 가해 학생의 잘못이지만, 그 일이 벌어지기까지 무수히 많은 어른들의 방관이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학교폭력 사건을 접하면 화가 나면서 동시에 이런 일이 반복되는 사회를 곱씹게 된다고. 그러하기에 그녀는 소설을 쓸 때만큼은 가해 학생에게 잘못을 돌아볼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진정한 벌은 자신의 죄책감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천선란은 “뒤틀린 어른이 뒤틀린 아이를 만들고, 그 아이가 자라 뒤틀린 어른이 되어 다시 뒤틀린 아이를 만드는 세상 (……) 그렇게 온전한 어른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 전에, 상처와 슬픔이 무기가 되어 또 다른 출혈을 일으키는 세상으로 향하지 않도록” 하는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나인』을 썼다. 이와 같은 소설적 메시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있다는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같은 인간에게만 기대지 않는다. 식물과도 상호 의존한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식물의 도움을 훨씬 많이 받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 없이 식물은 살아갈 수 있으나, 식물 없이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어서다. 천선란은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나무와 소통할 수 있다면, 나무는 과연 무엇을 말할까 하는 물음에서 출발해 이번 작품을 쓰게 됐다고 한다. 나무는 인간보다 월등히 오랫동안 사는 만큼, 나이테마다 인간이 모르는 역사가 새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 상상은 개연성 있는 서사로 완성됐다. 정말로 사람들이 식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식물들이 어떤 말을 전할까 궁금해진다. 짐작컨대 별로 좋은 말은 아닐 듯하다. 어떻게 해야 식물로부터 좋은 말을 듣게 될까. 인류세를 사는 인류가 가질 희망은 거기 달려 있다.

 

 


허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2년 2월호(통권 9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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