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Theme] AWARDS - 문제적 감독 이창동만의 영화적인, 기념비적 모험
[2월 Theme] AWARDS - 문제적 감독 이창동만의 영화적인, 기념비적 모험
  • 전찬일(영화·문화콘텐츠 비평가)
  • 승인 2019.03.20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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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쳇말로 ‘저주받은 걸작’이란 이 경우 아닐까. 이 땅의 적잖은 영화 평자들과, 명배우 케이트 블란쳇을 수장으로 한, 2018년 제 71회 칸영화제 9인 경쟁부문 심사위원단 등에 의해 이창동 감독이 <시> 이후 8년 만에 선보인 6번째 장편 연출 나들이 <버닝>과 관련해 던져보는 반문이다. 유통회사 비정규직 등으로 생활하는 소설가 지망생 종수(유아인)와, 종수가 배달 일을 나갔다 우연히 조우하게 되는, 어릴적 동네 여자 친구 해미(전종서),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나 이해하기 쉽지 않은 관계로 나아가는,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 세 중심인물을 축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 휴먼 드라마.

 주지하다시피 <버닝>은 칸에서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종합 포털 다음에 실린 14인의 국내 영화 전문가들로부터는 7.4점을 득하는 데 그쳤다. 이렇듯 극명히 호불호가 갈린 <버닝>이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에서 최고 한국 영화로 선택됐다. 그것도 2등 격인 영화와 2배에 달하는 압도적 표차로. ‘극적 반전’이라 일컫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영화는 지난해 12월 LA영화비평가협회 및 토론토영화비평가협회(TFCA)에서의 수상에 이어 올 1월 프랑스 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거머쥐었다. “영상미와 선명한 주제의식, 배우들의 호연이 조화를 이뤘다”는 호평을 끌어내면서. 대체 이 괴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괴리는 동아일보 2018 영화 결산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와 더불어 <버닝>이 아깝게 묻혔다고 생각하는 영화 한 편으로 꼽혔다. “의미 있는 소재와 그것을 다룬 영화적 깊이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영화”로. 그 설문에서 필자는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홀대와 오해를 받은 기념비적 문제작”이라고 진단했다. 동료 평론가 강유정은 그 이유를 간결하게 적시했다. “때로는 명성이 선입견이 되기도 하나 보다. 풍부한 서브텍스트가 난해함으로 외면받아 아쉽다”고. 단적으로 <버닝>은 다층적 서브텍스트들로 구성된 풍요의 텍스트인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피력(이하 http://kor.theasian.asia/archives/189523 참고·인용)했듯, <버닝>은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나 한국영화 계보에서나 이창동이 아니면 빚어낼 수 없을, 흉내 불가의 괴작”이라는 게 내 종합적 평가다.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 중 대표작 <하녀>(1960)나 이만희 감독의 유작 <삼포 가는 길>(1975) 등과 마찬가지로. “이창동만이 형상화 가능했을,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너무나도 특별한 세 청춘에 관한 독창적 초상화”로, “죽음과는 그 함의가 다를 ‘사라짐’의 의미를 곱씹게”한다.

 종수, 해미, 벤은 우리 시대에 존재할 세 청춘을 넘어, 우리네 삶의 세 형태요 존재 일반이라 할 수 있다. 종수는 단적으로 외연적, 달리 말해 기표적·표피적 존재다. 그는 삶의 이면 내지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질 않는다. 해미가 파주 종수의 집 앞마당에서 개와 늑대의 시간인 해질녘에 상의를 벗어던진 채 춤을 추자, ‘창녀’라고 힐난하기 급급하다. 해미를 사랑한다면서도, 그녀가 왜 그렇게 갑자기 일탈적 행위를 감행하는지 묻지조차 않는다. 해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1차원적 ‘리틀 헝거’를 넘어 2차원적 ‘그레이트 헝거’를 향한 갈망을 피력했고, 그로써 그녀의 ‘사라짐’을 예고했거늘. 상대편의 입장에 서지 않고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아집에 사로 잡혀 있는 것, 그것은 단언컨대 사랑이 아니다. 종수가 소설을 쓰질 못하는 것은 따라서 당연하다. 소설의 세계야말로 외연·기표를 앞세운 내포·기의 즉 메타포의 그것 아닌가. 하물며 그가 지향·목표하는 소설가가 여느 그렇고 그런 소설가 아닌 ‘넘사벽’ 윌리엄 포크너임에야 더 말해 뭣하겠는가.

 벤은 메타포적 존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토대가 된 단편집 『반딧불이』의 화자이자 주인공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나왔을 때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그것뿐이었다”고 말하듯 벤은 종수에게, 즉 우리네 관객들에게 세상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바라보지 말고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베이스’를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일정 시간이 흐르면, 종수와 해미의 외연적 세계가 따분해질 수밖에 없다. 그 따분함은 미소를 머금은 하품으로,반복적으로 표현된다. 그래 두 달 에 한 번꼴로 헛간을 태우듯 인간 관계도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해미는?

 이미 말했듯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지향·갈망하는 리틀 헝거다. 리틀 헝거에게 그레이트 헝거는 미션 임파서블의 욕망이다. 충족·실현 불가능은 욕망이 욕망일 수 있는 전제다. 해미는 언뜻 종수와 같은 세계에 거하는 듯 보이나 실은 아니다. 그녀는 피츠제럴드의 그 유명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뭔지, 메타포가 뭔지 조차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종수도 해미에게 메타포에 대해 설명하길 회피한다는 사실이다. 의도 여부를 떠나 해미라는 존재를 무시하는 것. 고로 해미는 종수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벤의 세계에 속하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녀의 사라짐은,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예정된 것이다. 그녀는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하는 셈이다.

‘사라짐’은 죽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벤의 입을 통해 ‘동시 존재’가 설명되듯, 동시적 함의를 띤다. 벤은 종수에 의해 살해당함으로써 외연적으로 사라진다. 해미의 사라짐은 그러나 죽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고양이 보일 시퀀스나 해미의 목시계 등 일련의 단서들이 있긴 해도, 심증은 될 있을지언정 해미가 죽었다는 물증일 수는 없다. 수는 자기만의 닫힌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은 칸 본상이 아닌 피프레시상(국제 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으며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힌 바 있다. “<버닝>은 현실과 비현실, 있는 것과 없는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탐색하는 미스터리였는데 여러분이 함께 그 미스터리를 가슴으로 안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위 진술은 <버닝>에 다가서는
데 가장 적확한 요약이다. 미스터리는 사라짐과 함께 <버닝> 해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키워드다. 여느 주류 대중영화에서 찾는 것처럼, “<버닝>에서 한 가지 정답을 찾으려 하거나, 자기가 찾은 답이 정답이라고 우기는 것은 헛수고이기 십상이다. 하나의 답이 도출된다면, <버닝>은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영화가 삶의 우연성이나 아이러니, 불가사의 등을 극화해온 이창동 감독에 의해 빚어졌다면 더 말할 나위없”지 않겠는가. 다시금 강조컨대 <버닝>에서 해미의 사라짐을 죽음으로 한정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많은 이들이 해석하듯 해미가 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지, 그레이트 헝거를 찾아 자발적으로 사라져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또 언제 어떻게 다시 나타날지—나는 이렇게 독해하는 부류다—는, 평론가인 필자는 물론 감독이자 공동작가인 이창동도 확언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버닝>의 중요 모티브 중 하나인 기억의 문제를 짚지 않을 수 없을 터. 오프닝 크레디트에도 명시되듯 영화는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반딧불이』에 실려 있는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느슨할 대로 느슨하게 토대 삼아 빚어졌다. 기억과 연관해 영화가 연결되는 텍스트는 하지만, 그 단편보다는 하루키의 25주년 기념작 『어둠의 저편』이다. <버닝>은 줄곧 우물이라는 물질을 통해 기억이라는 정신적 이슈를 다룬다. 우물은 무의식을 상징한다. 무의식은 결코 하나로 규정 불가능하다. 우물은 생명의 근원인바 물이 없으면 생명과 무관하게 될 수밖에 없다.소설에서 영화와 직결되는 대사가 나온다.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영상 아닌 말로만 등장하는, <버닝>에서 우물은 소설의 위 진술의 재연 아닐까. 인물들은 저마다 우물에 대한 기억이 다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에서 하나의 살인을 두고 인물들이 하는 기억·설명이 다 다르듯이. 우물이 과연 실재했는지조차 확실치 않다.

 또 다시 강변하련다. <버닝>의 영화적 가능성들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제한해, 자신의 편협한 해석들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문가건 비전문가건 공히, 상당 정도 영화를 몰이해 오독하고 있다고 여겨져서다. 또 플롯이나 캐릭터를 둘러싼 내러티브적 해석이나 그 의미·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느라, 영화의 다른 ‘매혹들(Attractions)’을 간과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간의 이창동 영화들과는 다른, 음악 등 사운드 연출의 섬세함을, 마냥 외연·표면·기표 안에서 머무는 현실적인 종수와, 메타포·비유·기의 안에서 살아온 초현실적·재즈적인 벤, 그 둘 사이를 자유분방하게 오가는 무질서적인 해미 등 세 캐릭터의 개별 성격화 및 상호 플레이, 그리고 각 캐릭터를 열연하는 출중한 세 배우들의 주목할 만한 연기, 청·시각 등 내러티브를 넘어 빛을 발하고 있는 영화의 다른 층위들의 참맛도 만끽해보라는 것이다. 영화의 괴작스러움이 서서히 드러날 테니 말이다.”

 음악의 경우,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과는 꽤 다른 연출을 드러낸다. 여느 BGM(BackGround Music)적 음악이 아니다. 모그가 작곡한 효과음적 저음 선율이 주를 이룬다. 마지막 순간 종수의 변화를 시사하며 그 톤이 한 차례 올라가긴 하나, 대개 베이스 톤으로 깔린다. 그 톤 앤 매너는 종수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벤의 모티브는 철저하게 재즈적이다. 강렬한 록 비트도 없진 않아도, 집에서건 차에서건 재즈를 통해 벤의 자유분방함을 드러낸다. 시스타의 ‘터치 마이 바디’ 등이 가리키듯, 반면 해미는 철저하게 통속적·세속적이다. 음악을 통한 성격화(Characterization)인 셈인바, 이창동에게는 전례 없었던 파격적 스타일이다. 음악이 전면에 배치되는 것은 두 번 정도다. 특히 해미가 춤 출 때 나오는 음악이 결정적·압도적 인상을 선사한다. 루이 말 감독, 잔느 모로와 모리스 로네 주연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7)에 쓰인 ‘제네리크(Générique)’다. 그 곡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즉흥적 연주처럼 영화에 즉흥적 기운을 불어넣으며, 사운드에서만이 아니라 영상, 플롯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변곡점적 기능을 한다. 그 곡에서 세 캐릭터가 통합될 뿐 아니라, 그 시퀀스 이후 해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연기는 어떤가. 유아인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연기를 구사한다. 스티븐 연은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인 연기를 동시에 뽐낸다. 해미의 연기는 규정 불가능하리만치 다채롭다. 나올 때마다 다른 표정, 다른 이미지, 다른 분위기, 다른 함의를 입체적으로 발산한다. 내 기억에 한 영화에서 이렇듯 다채로운 연기를 구현한 예가 거의 없기에, 경이롭기까지 하다. 외연적으로는 아닐지언정 내포적으로 <버닝>의 진짜 주인공이 해미라고 여기는 것도 그녀의 연기가 한몫한다면 어떨까. 이런데도 그런 매혹들을 외면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버닝>은 문제적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출발해 문제적 작가 윌리엄 포크너로 나아가는, 문제적 감독 이창동만의 영화적인 너무나도 영화적인, 기념비적 모험이다.” 한국, 아니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문제적 걸작….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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