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부부전시장’에서 들리는 소리
[Book review] ‘부부전시장’에서 들리는 소리
  • 강형철(시인, 숭의여대 교수)
  • 승인 2019.03.20 11: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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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선숙 소설집, 『몸이 먼저 먼 곳으로 갔다』를 읽으며

 만해 한용운의 「꽃이 먼저 알아」라는 시가 있다. 시의 화자는 사는 것이 허랑하고 온갖 세사의 근심과 걱정에 휘둘리고 살다가 어느 날 길가에 핀 꽃을 보고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여’ 쳐다본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꽃잎에 물방울이 떨어져 있다. 시의 화자는 ‘아침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인가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는 것이다.

 

 일흔두 살의 이른바 늦깎이 작가가 있다. 예순일곱의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해 지난해 12월 『몸이 먼저 먼 곳으로 갔다』란 제목의 소설집을 상재했다. 일곱 편의 소설을 묶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 소설은 상상력이 빚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가문 짱짱한 집안 종손 며느리의 생애 구술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거기서 확인하는 것은 가족이란 이름의 폭력성이다. 그런 것들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떨군 눈물, 회한과 분노 그리고 다짐을 세상이 먼저 알게 만드는 소설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표제작 「몸이 먼저 먼 곳으로 갔다」는 아들은 유학 보내고 남편과 단출하게 사는 50대 아내의 슬픔이 그려진다. 중령으로 전역한 남편은 진급을 못한 한을 아내에게 잠자리로 풀며 산다. 그러나 아내는 대상포진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그런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불통의 남편에 대한 원망과 평생 집안일을 하며 삭혀온 분노를 조절할 수 없어 하룻 동안 가출했다가 '자신과 가장 가깝지만 먼 곳인 남편'에게 돌아오는 이야기다.

 

 「하얀 고무신」의 화자인 순녀는 92세다. 남편은 94세이고 아들은 정우는 72세다. 손자인 근수 내외가 40대이고 증손인 세살짜리 아이가 있다. 4대가 함께 사는데 90대인 남편 노식은 9988234가 모토인 사람이다.(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죽는다는 말) 영양제 관절약 눈약 혈액순환약 치아건강약 배뇨약 비타민 등등을 골고루 필요에 따라 복용하면서 종묘쪽으로 나들이 가는 것이 소일거리다. 순녀는 아들 둘을 얻었으나 큰아들 정식은 4·19대 잃었고 둘째 72세의 정우가 실제로 어머니를 봉양한다. 은행 차장으로 정년퇴직하고 며느리는 가끔 순녀의 목욕을 돕고 손자 근수는 증손 하나를 낳지만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더 낳지 못하고 있다. 순녀는 부정맥에 무릎관절염 허리디스크를 앓았고 녹내장 백내장 모두 앓았으며 지금은 방안에서도 휠체어에 의지하고 산다.

 

순녀는 아들 정우가 집안일을 하는 것을 안타까이 바라보면서 틈만 나면 요양원에 보내줄 것을 부탁하나 아들은 모실 수 있을 때까지 모시겠다며 마음을 다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 결혼식이 있어 아들 내외가 외출하는 틈을 타 자발적으로 생을 그만두는 이야기가 기본 줄기이다. 순녀가 장남이 어린시절 선물한 고무신을 안고 세상을 떠나는 날 남편 노식은 종묘쪽에 나가 노인들과 어울리다가 동료들 중 하나가 알록달록한 여인네를 만나러 가는 것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내 순녀를 위해 금반지를 사기 위해 금은방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소설은 종결된다.

 

 이외의 소설 「흑백사진의 집」이나 「즐거운 우리집」 「저녁의 시」같은 작품을 읽다보면 30대부터 40대, 50대, 70대, 90대의 부부들의 모습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모습은 우리사회가 통과한 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갑남을녀의 진솔한 자화상을 보는 듯하고 특히 그 속에서 아내의 역할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것인지 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소설의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은 3대는 기본이고 4대, 5대까지 어울려 살고 있다. 시조모, 시부모, 본인과 남편 그리고 아들 손자가 사는 모습인데 사회 전체의 측면에서 보면 오늘 우리나라의 가족 특히 핵가족을 제외한 우리 사회의 ‘부부유형의 복합전시장’이 전개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과 순종적이고 착하기만 한 아내가 마침내 분노하며 거부하는 모습은 물론 사회적 재난에 의한 가족의 붕괴 거기에 더하여 단자화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재산 갈등, 가족의 파괴 이혼 등 복합적인 갈등과 불화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어 그 실체적 진실에 육박하고 있다.

 

 이런 집안의 모습은 핵가족이 기본단위로 편성되어가는 우리 사회에서는 희귀한 사례지만 작가 마선숙이 실제로 살아낸 세월이어서 조금도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게 그려지고 있다. 손톱의 지문이 가사 일을 하면서 지워질 정도로 일하면서 얻은 진솔한 깨달음이 이 소설들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소설집의 의미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우선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절반인 여성이 해방되지 않는 한 인간해방은 미완이다’는 말에서처럼 여성해방 문제의 본원적 필연성의 하나를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미투운동’의 근원적인 발생지점인 가족이란 단위에서 억압받고 붕괴된 여성들의 실제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이고 구호적인 여성운동이 그 실질적인 문제를 마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불과 몇십 년 전에만 해도 어른들과 함께 살면서 얻을 수 있었던 삶의 지혜와 행복이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실질적 구조가 무너트린 ‘사람들이 사는 인간사회’의 붕괴 실체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어른은 사라지고 노인만 남은 자본주의 사회! 그래서 부담과 짐이 돼버린 초라한 노인들의 비애와 몰락이 삶의 세계 전체를 덮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묻는 소설!

 

 물론 이 소설들이 하많은 비애를 딛고 비애 뒤에 있는 생의 근원적 화평에 닿기까지는 좀 더 많은 노력이 시작되어야할 것을 소설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맥없이 생에 무릎 꿇고 비루해질 때마다 매일 밤 두시까지 스스로의 속물근성과 위선들’과 백병전을 치루어 내며 ‘자신의 비굴을 용서하고, 세상 다리를 표표히 건너 생의 사리 같은 소설’을 꿈꾸며 노력한 일흔 두 살의 작가 마선숙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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