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강변호텔] 변명과 자기 연민으로 엮은 심미적 관음의 무대
[2020 오늘의 영화 - 강변호텔] 변명과 자기 연민으로 엮은 심미적 관음의 무대
  • 안숭범(영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 승인 2020.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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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판다

어떤 영화는 준비된 설계도에 따라 완성되지 않는다. 그 중 소수의 영화는 우연과 직관의 힘에 적극적으로 의존한 결과물이다. 예외적인 경우이겠지만, 순간의 영감에 충실한 장면들로 자기 영화세계를 웅변하는 감독도 있다. 홍상수는 정확히 그에 해당한다. 홍상수를 ‘작가’로 호명할 수 있다면, 불확정성의 스토리텔링에 생기를 불어넣는 즉흥적 대사, 충동적 행동, 우연적 상황의 절묘한 운용 덕분일 것이다. 특히 한 영화 내에서, 때론 영화와 영화를 건너뛰며 유사하게 반복되는 대사, 행동, 상황이 주는 뉘앙스는 홍상수 영화의 미묘한 매력이다. 홍상수 영화의 미학을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2’로 파악할 수 있다면, 이는 홍상수 영화의 얼개에 대한 진단이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홍상수는 자기반영성Selfreflexivity의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들은 재현 매체로서 영화와 현실 사이, 더 쉽게 말하면 예술과 일상 사이의 반투명한 경계면처럼 기능해 왔다. 대중의 시선에 의해 각색된 홍상수의 이미지와 영화 속 등장인물의 연관성, 등장인물의 불완전한 기억이나 꿈과 서사무대 속 사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탐색도 홍상수 영화를 감상하는 흥미로운 첩경이다.

홍상수의 연출 방식에 대해 말하자면, 특유의 미니멀리즘 미학을 조명해야한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서툰 욕망과 투박한 행동들이 교차하는 점이지대를 건조하고 간결하게 묘사한다. 영화적 기교나 인위적인 각색은 거의 없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홍상수 영화의 견결한 정서는 그러한 심미적 원칙이 일관되게 반복된 결과다.

〈강변호텔〉도 지금까지 언급한 홍상수 영화의 개성을 그대로 안고 있다. 오히려 그 특색이 강화되면서 정서적 울림이 고조된다. 〈강변호텔〉을 본 관객 역시 홍상수를 둘러싼 현실의 정보와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 행동, 상황을 두고 대차대조의 해석 게임에 임했을 것이다. 현실의 홍상수와 그의 아내를 각각 영환(기주봉 분)과 상희(김민희 분)로 치환한 후, 서로의 입장을 탐색하는 관람을 즐기기도 했을 것이다. 홍상수 아내의 입장이 반사된 캐릭터를 김민희가 연기한다는 점에서 〈강변호텔〉은 짓궂은 데가 있다. 그럼에도 흑백으로 톤다운 된 이 미니멀리즘한 세계는 다른 결의 해석과 감정을 허락하는 중층결정의 장이다.

이 글은 논지의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변호텔〉을 ‘고안된 관음의 무대’로 수용할 것이다. 〈강변호텔〉의 어떤 순간은 홍상수의 변명과 항변을 깔고 있다. 자기 연민과 위로에의 요청이 순환하는 씬들로 가득하다. 지금부터 흑백의 미니멀리즘한 서사무대에 감춰놓은 홍상수의 전언을 들춰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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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과 연민 사이

강변에 위치한 작은 호텔에 시인 영환이 머물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는 무서운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당장 죽을 것만 같은 느낌에 휩싸이면서 그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두 아들 경수(권해효 분)와 병수(유준상 분)를 호텔로 부른다. 영환과 같은 층 투숙객 중에는 상희도 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배신감에 힘들어하는 중이다. 그녀에겐 선배 언니 연주(송선미분)가 찾아온다.

홍상수 영화의 미니멀리즘은 극적 구성의 배제에서 출발한다. 〈강변호텔〉 역시 ‘영환-두 아들’, ‘상희-연주’ 사이에 특별한 갈등이나 인상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 사이의 대화에서 미묘한 감정적 기류가 들어차고 빠져나간다. 예컨대 영환의 불안과 고독, 그를 향한 두 아들의 연민과 염려가 교차하는 순간에 우리는 현실 속 홍상수의 자리를 가늠하게 된다. 상희의 경우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후, 애증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애도의 시간을 감당하는 중이다. 연주는 상희 곁에서 함께 자고 쉬면서 상희의 고통을 덜어주려 애쓴다. 이때 상희의 고통이란 홍상수 개인사의 한 국면을 환기시킨다. 

영화 초반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호텔에 당도한 경수와 병수는 1층 커피숍 창가에서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때 그들이 나눈 대화는 시답잖고 뜬금없다. 경수는 창밖 풍경을 가리키며 두만강 같다고 말하고 병수는 형이 두만강에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지적한다. 그때 병수는 다큐멘터리에서 여러 번 봤다고 말한다. 외부 세계를 함부로 규정하려는 시도와 그 과정의 불합리성에 대한 묘사가 여기 있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경수는 동생 병수의 이름에 착안해 그를 ‘병신’, ‘병신새끼’라고 욕하고, 병수는 경수의 작은 키를 놀린다. 

즉흥적으로 완성된 듯한 씬이지만, 경수와 병수 사이의 대화 장면들은 홍상수의 변명이거나 사소한 항변처럼 읽힌다. 김민희와의 열애를 다루는 세간의 지리멸렬한 시선에 대한 입장이 담겨 있는 셈이다. 홍상수는 자기, 혹은 자기 사랑을 향한 그 시선의 ‘부질없음’과 ‘폭력성’을 동시에 지적하는 듯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홍상수는 사회가 덧씌운 ‘부도덕’과 ‘비윤리’의 프레임을 ‘솔직함’이라는 덕목으로 방어해왔다. 영화 속에도 그의 수세적 변명, 선택적 항변으로 읽히는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김민희가 연기한 만희가 “내가 부정직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말할 때, 자기 뒷모습에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을 정색하며 제지할 때의 감정도 그러한 해석과 연관된다.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완수(정진영 분)의 제자로 잠깐 등장하는 한 영화감독이 칸의 해변에서 뱉은 말(“누군 성숙해서 영화 만드나요? 솔직해야죠. 살면서 솔직해야 영화도 솔직한데”) 역시 수세적 변명, 선택적 항변에 속한다.

그런 홍상수가 밉지 않은 이유, 〈강변호텔〉의 저의를 일단 수긍하게 되는 계기는 자기 상황에 대한 정직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홍상수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연주는 상희를 위로하면서 그녀를 버리고 간 남자에 대해 “사람이 아니야. 인간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래서 연주가 상희를 향해 “너도 참 기구하다”라고 말할 때, 우린 홍상수식 ‘솔직함’의 다른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이때의 ‘솔직함’은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를 전하는 경수의 언어를 통해 더 직설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 대사 속에서 영환은 “인간의 미덕을 찾아볼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영환의 다음과 같은 대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미안함 때문에 누구랑 계속 살 순 없는 거야”. 그래서 〈강변호텔〉을 둘러싼 대중적 비평장의 한 축은 ‘영환/홍상수’의 (불)가능한 변명을 향한 우리의 (불)가능한 연민을 두고 형성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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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지워진 어딘가

〈강변호텔〉보다 2년 전에 세상에 나온 〈그 후〉와 비교해보더라도, 이 영화의 흑백은 더 명분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흑백으로 단순화 된 배경 세계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 갑자기 내린 폭설로 온통 하얗게 얼어붙은 강을 따라 산책하는 상희, 연주를 보고 영환은 호텔을 나선다. 미리 밝히면, 홍상수는 이 장면을 전후해서 등장인물들이 잠깐 자거나 조는 듯한 쇼트를 삽입해 놓았다. 영환은 두 여자와 그녀를 둘러싼 풍경에 “진심입니다.”, “아름답습니다”를 반복한다. 이 장면은 온통 하얀 세상을 흑백으로 톤 다운해 묘사한 효과로 모종의 신비감을 풍긴다. 영환이 죽음을 예감하게 된 계기도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감에 대해서도 쉽사리 해명할 순 없다. 그럼에도 최선의 해석을 찾자면, 홍상수의 어떤 희망이 풍경으로 치환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를테면 그 장면은 폭설의 효과 때문에 육지와 강의 경계가 지워져 있다. 편집의 효과 때문에 꿈과 현실의 경계도 모호하다. 그 기묘한 풍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지(상희)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영환)이 표정을 교환한다. 상처 입은 사람(상희)과 상처를 준 사람(영환)이 감정을 뒤섞는다. 영화 속 대사에 따르면, 하늘을 걷는 마음과 길바닥을 걷는 마음이 접합될 수 있다는 희망이 거기에 있다. 이는 결국 흑백의 효과이고, (홍상수답지 않게) 풍광에 실릴 수 있는 정서를 일정한 형식미로 살려보려는 의지의 결과다. 

결국 〈강변호텔〉은 자기 위로의 성격을 가지는 2인칭의 죽음을 향해 가는 이야기이다. 이때의 ‘죽음’을 극한의 고통, 최종적인 절망의 표지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사실상 3인칭의 죽음이란 비일비재한 비극, 편재하는 불행에 불과하다. 감정과 생각이 실리지 않는 멀리 있는 사건이다. 한편 1인칭의 죽음이란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개인적 종말, 불가역적 공백을 의미한다. 그러나 1인칭의 죽음이란 사실상 내가 체험하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이 체험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건을 재구할 언어를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 나로서는 이제 ‘모든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이 된다. 결국 나는 나의 죽음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의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극한의 절망(죽음)에 대한 가장 유의미한 순간은 2인칭의 공감과 기억 속에 깃든다. 삶과 시간을 함께 나눠온 이의 죽음만이 가치 있는 의미의 골격(언어)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영환이 두 아들과 오랜만에 대면 했을 때 던진 대사를 다시 떠올려도 좋겠다. “내가 여기 있으면서 이상해. 그래서 부르게 된 것 같아. 많이 이상한데 밤에 자꾸 무서운 꿈을 꿔. 낮에는 내가 죽을 것만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 꼭 죽을 것만 같아. 당장.” 이는 영환이 두 아들을 부른 이유를 시사한다. 두 아들을 부른 행위는, 자기 절망을 1인칭의 죽음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한 ‘자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처럼 〈강변호텔〉에는 2인칭의 공감과 기억을 요청하는 특별한 주문이 담겨 있다. 

영화 후반 영환은 병수의 이름에 ‘나란히 병竝’을 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네가 네 형과 나란히 사이좋게 죽을 때까지 가라는 뜻”. 이 선명한 충고를 경유해 우리도 〈강변호텔〉 마지막 쇼트를 받아들일 준비하게 된다. 두 아들의 목소리로 확인되는 영환의 죽음에 가장 적절한 감정을 찾게 된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쇼트에서 우린 자기 연민의 제스처를 건조하게 감추면서 우리에게 연민의 손길을 요청하는 홍상수를 쓸쓸하게 마주하게 된다. 이때 고이는 감정을 언어로 일반화시킬 순 없다. 홍상수 영화의 마지막 잔상은 종종 그렇게 살아남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영환의 낮’을 홍상수의 현실로 환치해가며 작성되었다. 그렇다면 〈강변호텔〉은 죽음에 근접한 절망의 시간을 ‘삶’이라고 부르는 역설에 관한 이야기이다. 2인칭의 공감과 기억을 요청하는 이의 절박함이 스민 이야기이다. 영환의 두 아들은 ‘부도덕’, ‘비윤리’라는 단어로 자신을 규제하는 세상에 대한 홍상수의 간곡한 부탁이거나 심미적 투정이다.

〈강변호텔〉을 본 직후 영환의 유서가 된 시를 재차 음미할 수밖에 없었다. 영환은 진심으로 아름다운 두 여자, 특히 상희 앞에서 그 시를 읊는다. 영환의 시는 〈강변호텔〉보다 서사적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사를 못하게 강압하는 조직 때문에 두 엄마를 가진 아이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자라게 된다. 그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떠날 수 없게 되자 본모습을 잃어버린 채 슬프고 어둡게 큰다. 그는 지금 내리는 눈을 맞으며 외롭고 황량한 곳에서 혼자 기름 호스를 들고 있다. 굳이 평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이 시는 강압적 환경에 의해 이사의 가능성이 닫혀가는 아이의 처지에 대한 연민을 요청한다. 시의 첫 행과 마지막 행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머무는 곳과 가야하는 곳 사이의 경계에서 아이는 눈을 맞는다. 〈강변호텔〉에서 경계를 지우며 내린 눈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2졸문, 「차이의 효과, 혹은 홍상수의 여자」, 『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 커뮤니케이션북스, 2019, pp.471-496

안숭범 _ holy31ch@hanmail.net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국제영화비평가연맹 사무국장, 부산국제영화제 피프레시상 심사위원,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환멸의 밤과 인간의 새벽』을 비롯하여 『SF, 포스트휴먼, 오토피아』, 『북한을 읽는 해외 다큐멘터리의 시선들』 등이 있다.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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