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블랙머니] 〈블랙머니〉, 70대 중반 영화청년의 사회(성) 희비극
[2020 오늘의 영화 - 블랙머니] 〈블랙머니〉, 70대 중반 영화청년의 사회(성) 희비극
  • 전찬일(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 승인 2020.03.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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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블랙머니〉는 어느덧 우리 나이 75세에 이른, 만년 영화청년 정지영 감독이 〈남영동 1985〉(2012)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역작이다. 지난 2012년 한국 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로서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리젠테이션에서 〈남영동〉을, 그 전년도에는 〈부러진 화살〉을 같은 섹션에서 소개했던 특별한 인연 때문에서라도, 영화를 향한 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국립목포대학교 오후 교양 수업을 마친 뒤 수강생 둘을 꼬드겨, 고백컨대 기대감 반 의무감 반에서, 〈겨울왕국 2〉가 스크린을 싹쓸이 하다시피 대대적으로 개봉된 바로 그날(11월 21일) 관람한 영화는, 내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크고 깊은 감흥을 안겼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일종의 감상평을 피력하며, 감사의 마음과 말을 전한 것은 그 감흥을 주체할 수 없어서였다. 전날에 비해 상영 스크린 수가 3분의 1로 급감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통화를 통해서였다. 예상은 했으나, 천박하다 못해 폭력적인 이 땅의 영화 토양에 절망하지 않기란 힘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가능하면 리뷰성 원고를 쓰지 않으려고 그렇게도 애써왔건만, 온라인 매체 아시아엔(http://kor.theasian.asia)에 영화를 향한 응원을 보낸 것도 그 감흥을 공유하고 싶어서였다. 아래 원고는 그때 그 감흥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거의 그대로 옮기면서, 필요 시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했음을 밝힌다. 작심하고 다시 쓴다 한들 뭐, 더 잘 쓸 자신도 없고……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검찰 내에서 거침없이 막 나가는 문제적 검사로 명성 자자한, 서울지검의 일명 ‘막프로’ 양민혁(조진웅 분)은 담당 피의자가 자살하는 통에, 성추행 검사로 몰리는 등 뜻하지 않은 곤궁에 처한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는, 그 피의자가 대한은행 헐값 매각 사건의 핵심 증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근거는 의문의 팩스 5장. 자산 가치 70조 은행이 1조 7천억원의 ‘푼돈’에 넘어간 희대의 사건 앞에서 그는 문제의 해외 펀드 사를 비롯해 글로벌 대형 로펌, 대한민국 금융감독원 등이 뒤얽힌 거대 금융 비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대강의 줄거리다. 감독의 변에 밝혔듯 “IMF 이후, 외국 자본이 한 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후 곧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떠난 사건을 토대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엮어 극화한” 팩션 영화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2003~2011년의 ‘론스타 사건’. 론스타(극 중 스타펀드)는 미국계 투자 자본이며, 은행은 (구)외환은행(현 KEB하나은행)이다.

우리 사회에서 실제 발생했던 경제·금융 사건에 허구를 가미해 영화화했다는 점 등에서, 1997년의 외환위기를 극화한 ‘〈국가부도의 날〉(2018, 최국희) 그 이후’라 할 법하다. 일련의 기시감이 들 성도 싶다. 그 기시감은 그러나, 영화의 약점이거나 흠은 아니다. 외려 그 반대다. 두 영화를 연관 지어 볼 때 한층 더, 영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뿐 아니라, 영화 보기의 맛 역시 더 짙어지기 때문이다. 경제 전문가들이나 감독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경제는 우리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 아닌가. 그로 인해 우리 네 삶의 희비가 드라마틱하게 엇갈리곤 하지 않은가.

감독은 〈블랙머니〉를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대중들이 잘 모르는 경제 순환 논리의 이면을 제시하고 싶었다. 주인공과 함께 사건을 따라가면서 관객들이 뜨거운 여운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사건의 진실을 마주하고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이 일찍이 천명했듯 “은행은 군대보다 더 무서운 무기”라는데,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의 금융자본주의가 경제를 잘 모르는 우리를 우롱할 때 우리는 누구에게 기대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블랙머니〉를 통해 제시된 내용이 전적으로 ‘진실’이거나 ‘사실’인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런 유의 팩션 영화라면 으레 그렇듯, 소위 음모론적 주장들이 꽤 가미돼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눈여겨 직시하고 경청해야 할 지점들이 수두룩하다. 영화의 내·외적 설득력도 충분하다. 영화 오락적 재미도 넉넉하며, 영화 예술·미학적 수준도 큰 주목감이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3백4십5만여 명으로 2012년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0위, 외국영화 포함 종합 순위 13위에 올랐던 〈부러진 화살〉을 비롯해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등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데 성공했던, 대표 전작들 못잖다. 〈부러진 화살〉에는 1백만 가량 적긴 해도, 흥행 성적 또한 2백50만에 근접해 주목할 만한 성취를 일궈냈다.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드라마를 펼쳐 보이는 솜씨나, 연기의 임팩트 등에서는 그 어느 전작들 이상이다. 과장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110여 분 내내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경제 실화를 극화한 제재의 육중함이 안겨줄 법한 부담감도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적절히 배치돼 있는 유머 코드가 그 무게를 상쇄시켜주기 모자람 없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그랬듯 말이다. 〈기생충〉이 가족 희비극이라면, 〈블래머니〉는 사회(성) 희비극이랄까. 빼어난 플롯의 완급 조절 등에서 둘은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연기나 성격화Characterization 등은 또 어떤가. 현실의 그 누구와 연결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양민혁 캐릭터는 당장 〈1987〉(2017, 장준환)의 최검사(하정우)를 연상시키나, 그 비중에서나 극적 동기 부여 등에서 그를 압도한다. 생애의 연기까진 아닐지언정 조진웅은 명불허전이다. 비극과 희극 사이를 오가는 균형감이 일품이다. 〈끝까지 간다〉(2013, 김성훈)의 박창민과 비교될 터인데, 양검사가 악당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어 그 맛깔이 유쾌할 대로 유쾌하다. 

잘 나가는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 김나리 캐릭터와, 이하늬의 인물 소화도 그 못잖다. 전작 〈극한직업〉(2019, 이병헌)의 장형사와는 판이하게 다른 깊이·크기를 만끽시켜준다. 우리 영화에 그와 같은 여성 캐릭터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캐릭터의 탄생’, ‘이하늬의 재발견’에 값한다. 〈암살〉(2015, 최동훈), 〈베테랑〉(2015, 류승완) 등 최근의 한국영화가 그렇듯 판타지적으로 나아가면서도 극히 현실적인 결말부 처리도, 예측 이상의 강렬한 인상을 선사한다. 반전의 묘미도 만만찮다. 

〈블랙머니〉가 내게 안겨준 가장 큰 감동은 그러나, 상기 영화적 덕목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감동은 수십 년째 지속돼온 감독의 사회·역사의식에서 발생한다. 정지영 그는, 1년 선배 이장호 감독처럼 지금도 여전히 영화청년적 태도를 뽐내고는 있으나, 70대 중반에 진입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그 나이에 〈블랙머니〉처럼 대중적 호응과 비평적 성과를 동시에 일궈낸 수작을 내놓은 감독이 이 나라에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당장 떠오르는 임권택 감독의 경우도,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서울 기준 1백만 고지를 돌파한 〈서편제〉(1993) 이후 흥행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행보를 걸어왔다. 직접적 비교 대상일 법한 이장호 감독도 6년 전쯤, 〈천재선언〉(1995) 이후 19년 만에 〈시선〉을 선보였으나, 1만2천여 명에 그쳤을 따름이다.

〈블랙머니〉의 사회 비판·고발성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추면, 정지영의 존재감은 가히 독보적이다. 5, 60대만 되도 영화 만들기가 만만치 않은 척박한 풍토에서, 70대에도 그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 수작을 만들어냈으니, 어찌 그렇다 평하지 않겠는가! 후배 감독들의 부러움을 넘어 역할모델로도 손색없다. 중견을 넘어 노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감독 정지영에, 그의 신작에 새삼 눈길을 던지면서 전폭적 응원을 보내는 이유다. 그의 다음 영화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면 과욕일까. 노장은 죽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면서 또 다른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다름 아닌 정지영 감독이 그 전형적 경우 아닐까.

 


전찬일 _ chanilj@hanafos.com
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기획위원. 저서로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 등이 있음.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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