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윤희에게] 사랑이, 당신을 구원할 거라는 거짓말
[2020 오늘의 영화 - 윤희에게] 사랑이, 당신을 구원할 거라는 거짓말
  • 이태훈(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 승인 2020.03.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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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빅픽쳐스

쌓여 있거나, 내리고 있다.

세월이 오래 지나 이 영화 〈윤희에게〉를 떠올릴 땐, 아마 ‘눈雪의 영화’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눈이 아니라, 홋카이도 오타루에 내리는 눈. 많은 영화 관객들에게 오타루는 무엇보다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로 기억된다. 첫사랑의 기억을 따라가는 여정, 속 깊은 가족과 이웃, 마츠다 세이코의 노래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 순정만화와 동화를 버무린 것 같았던 ‘이와이 월드’. 무엇보다 화면 위에 늘 쌓여 있거나 내리고 있었던 눈. 어떤 면에서 〈윤희에게〉는 20여 년 전 한국에서 개봉했던 〈러브레터〉에 보내는 러브레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 〈윤희에게〉의 두 여자, 한국의 윤희(김희애)와 일본의 쥰(나카무라 유코)이 눈의 도시 오타루에서 재회할 때까지 서로를 그리워했던 영화 속 시간 역시 똑같이 20여 년이다. 

어쩌면, 러브레터에 보내는 러브레터

〈윤희에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더 자연스럽게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된다. 오타루의 마사코 고모가, 함께 사는 조카 쥰이 써서 간직하고만 있던 편지를 한국의 윤희에게 부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러브레터〉의 이야기 역시 히로코가 죽은 애인 이츠키의 오타루 옛 주소로 편지를 부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또, 쥰의 편지는 “잘 지내니お元ですか?”라고 묻는 인사말로 시작한다. 잊을 수 없는 대사, 눈밭의 히로코(나카야마 미호)가 애인이 죽어간 설산을 향해 외쳤던 바로 그 “오겡키데스카”다. 〈러브레터〉에선 히로코가 폴라로이드 즉석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윤희에게〉에선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이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선 장례식(추도식) 풍경은 판박이같고, 편지 글을 내레이션처럼 깔며 이야기를 펼치거나 같은 장소에 투사된 다른 시간대의 기억이나 대화를 겹치며 내러티브의 실을 엮어 나가는 수법도 닮았다. 게다가 두 영화 모두 사랑, 그리움, 기억, 그리고 종국에는 잊거나 잊혀지는 두려움에 관해 말한다.

하지만 두 영화는 비슷한 착안점에서 출발하면서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통해 차이를 드러낸다. 그 차이 역시 흥미롭다.

〈러브레터〉의 내러티브는 서로 교차하는 두 개의 선으로 이뤄져 있다. 현재의 히로코 이야기는 애인 이츠키의 죽음으로 떨어져 내린 슬픔의 바닥으로부터 과거의 이츠키의 추억을 통과하며 ‘오겡키데스카’의 카타르시스로 향하는 곡선을 그린다. 히로코의 주변은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사람들의 선의가 시간과 기억의 극복을 향해 그녀를 끌어올린다. 반면 현재의 여자 이츠키는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으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오해와 슬픔이라는 숨겨진 갈등 속으로 급격히 하강한다. 고열로 쓰러진 이츠키가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이 갈등이 아름다운 화해에 이를 때, 영화는 또 한 번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빚어낸다. 

어둠으로부터 밝음으로 향하는 히로코의 곡선과, 밝음으로부터 어둠을 거쳐 다시 밝음으로 향하는 이츠키의 곡선. 두 개의 내러티브 곡선이 겹치며 솜씨좋은 화공의 우키요에浮世繪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러브레터〉의 이야기가 갖는 매력의 중심이 여기에 있다.

ⓒ리틀빅픽쳐스

그대로 두었을 때에야 더 오래 남는 마음

〈윤희에게〉에서 윤희와 쥰의 이야기는 〈러브레터〉처럼 상승이나 하강 같은 굴곡을 타고 넘기보다, 눈처럼 흩날리며 내려 쌓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 〈Moonlit Winter〉처럼, 영화가 관객에게 다가오는 방식은 구름에 가려져서도 옅은 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오타루의 만월을 닮았다. 사물의 경계를 분명히 구분하는 우키요에보다는, 사물의 사이를 옅은 먹의 농담으로 드러내는 수묵화같다.

오타루의 시계탑 광장에서 20여년 만에 윤희와 쥰이 만났을 때, 영화는 쥰이 윤희의 이름을 부르는 단 한 번을 제외하면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두 사람이 오랜 그리움과, 회한과, 다시 만난 기쁨과, 무엇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서글픔이 뒤섞인 시선으로 오래 서로를 바라본 뒤, 영화는 암전한 화면 위에 두 사람이 눈 쌓인 길 위를 걷는 소리만 ‘사박, 사박…’ 한참 들려준다. 관객의 머리 속에는 오타루의 달빛으로 물든 밤하늘처럼 넓고 긴 여백이 펼쳐진다. 

말하자면 〈윤희에게〉는 캐릭터와 소재들 간의 비어 있는 ‘사이’들을 굳이 잇지 않아도, 그냥 두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영화다. 형체를 잃고 흩어지는 무수한 말들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랑의 문장은 아무리 손가락을 길게 뻗어 써도 충분하지 않고, 어떤 그리움의 모습은 아무리 화면에 오래 담아도 충분할 수 없는 것이다. 부드럽게 흩날리듯 내리는 오타루의 눈처럼,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모닥불의 불씨의 기억처럼, 그대로 두었을 때에야 비로소 더 오래 남는 마음도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무엇보다 〈러브레터〉의 히로코는 기억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윤희에게〉의 윤희는 기억을 기억 그대로 쌓아놓은 지점에서 새로 시작한다. 또한 그 차이는 〈러브레터〉의 히로코와 이츠키 사이에 놓인 것이 ‘죽음’이라는 건널 수 없는 거리인 것에 비해, 〈윤희에게〉의 윤희와 쥰 사이에 가로 놓인 것은 오히려 그 죽음보다 더 깊은 ‘현실’이라는 거리였다는 점으로부터도 비롯된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공간의 거리, 서로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쳐온 뒤 그리워만 하며 지내온 20여년 시간의 거리는 그 ‘현실’의 물리적 실체다. 

ⓒ리틀빅픽쳐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는 거짓말

영화 속 남자들은 전부 감정을 읽거나 표현하는 데 젬병인 것도 흥미롭다. 윤희의 전 남편은 술에 취하면 집 앞 현관에 웅크리고 있다가 윤희를 놀라게하고, 쥰의 사촌동생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온 쥰에게 한국 남자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진지하게 제안한다. 남자란 정말 이렇게 구제불능의 동물인 걸까. 반성하게 된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흔히 건네는 위로의 말 중에 ‘시간이 다 해결해줄 거야’가 있다.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이런 값싼 위로가 얼마나 무신경하고 불필요한 것인지도 보여준다. 20여 년 그리움을 가슴에 박힌 대못처럼 껴안고 살아온 윤희는 딸 새봄의 ‘눈 많이 오는 곳으로 여행가자’는 말에 처음 용기를 낸다. 알량한 생계를 기댔던 식당 문을 열어젖히고 나왔을 때, 윤희와 딸 새봄은 짐을 싸고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오타루의 료칸에 바로 도착해 있다. 

결국 사랑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며, 시간은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고통이 됐건, 슬픔이 됐건. 혹은 윤희와 쥰의 사이에처럼,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행복할 수 없다는 절망과 그럼에도 사무치는 그리움이 됐건.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와 그 실체와 맞닥뜨리기 전에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윤희의 딸 새봄이 필름카메라로 담배 피우는 엄마를 찍으며 “이쁘다”며 히죽히죽 웃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은유적이다. 새봄은 사진관 일을 하는 삼촌이 “인물 사진은 안 찍니?”라고 물었을 때, “사람은 안 찍어요. 저는 아름다운 것만 찍거든요”라고 답했었다. 오타루에 와서야, 엄마 윤희는 딸 새봄에게 처음 ‘사람이지만 아름다운 피사체’가 될 수 있었다. 그리움의 실체를 마주할 용기를 냈을 때에야, 비로소 윤희는 “다른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딸 새봄이 이혼한 이유를 물었을 때 아빠의 대답)의 껍질을 깨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오타루에서 그림같은 카페를 운영하는 쥰의 고모 마사코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이 영화는 마음 속에 각자의 이유로 끝없이 내리는 눈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눈도 내리지 않은 겨울을 보내며, 그 대사를 따라해 본다. 

“이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뭐, 그치지 않으면 어떤가. 쌓이면 쌓이는 대로, 그 또한 괜찮은 것이다. 

 


이태훈 _ libra@chosun.com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문화부에서 종교, 미술, 영화, 공연 등을 담당.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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