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증인] 마음을 흔든 작품
[2020 오늘의 영화 - 증인] 마음을 흔든 작품
  • 안진용(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 승인 2020.03.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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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은 2019년을 대표하는 영화는 단연 〈기생충〉이다. 한국 영화 역대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차치하더라도, 〈기생충〉은 만듦새부터 개봉 후 걸어온 족적 하나하나까지 역사가 됐다. 한국 영화사에 의미있는 탑을 하나씩 쌓아오던 봉준호 감독은 마치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기생충〉 속 대사처럼 그 탑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을 제대로 찍었다.

하지만 예술 작품은 가치로 순위를 매기기 어렵다. 이를 접하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각자의 취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의 생각을 말하자면, ‘기자’라는 직업인으로서 2019년 최고의 작품은 〈기생충〉이지만, 순수하게 영화를 즐기는 ‘관객’의 입장에서의 답이 다르다. 〈기생충〉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작품이라면, 마음을 흔든 작품은 이한 감독의 〈증인〉이었다.

#선입견先入見

이 영화는 관람 전 유독 사전 정보가 없었다. 이한 감독이 찍었고, 배우 정우성과 김향기가 출연한다. 그리고 정우성이 데뷔 후 처음으로 변호사를 연기하고, 김향기가 장애인 역할을 맡았다더라. 이 정도가 전부였다.

좀 더 솔직해지자. 사전 정보가 적었던 이유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탓이다. 이한 감독은 그의 전작으로 예상해보건대 ‘착한 영화’라는 필모그래피를 한층 두텁게 했을 것이고, 정우성은 배우로서 역량을 강화하자는 차원에서 〈증인〉을 택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직 아역의 느낌을 완전히 벗지 못한 김향기는 교복 입은 여자아이의 연기를 또 한번 훌륭하게 소화했으리라.

줄거리는 꽤 흥미로웠다.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변호사 순호(정우성 분)가 선임됐다. 순호의 역할은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의뢰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격자가 등장했다. 게다가 목격자로 나선 어린 여학생 지우(김향기 분)는 아스퍼거 증후군(발달장애의 일종으로, 사회 관계나 화학 현상과 관련된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는 증상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던 말)을 앓고 있다. 지우의 증언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순호의 임무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과연 장애를 가진 사람의 증언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하지만 이 질문에는 이미 선입견이 포함됐다. 상대방이 가진 장애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판단하기 전, ‘장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상적인 증언이 어렵다’라고 지레 짐작하는 행위인 것이다.

〈증인〉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아이의 증언을 통해 극적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이 아이가 주변의 냉대와 편견을 이겨내고 스스로 증인으로서 제 몫을 해나가고, 그를 둘러싼 모두가 이 아이의 삶을 이해하고 남들과 똑같이 여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더 집중한다. 그래서 〈증인〉은 더 따뜻하고, 더 특별하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이한 감독

이한 감독은 아주 독특한 이력을 가진 연출가다. 그가 보여주는 기본적인 정서는 ‘사랑’이다. 하지만 대다수 작품이 남녀상열지사에 매몰될 때, 이한 감독은 소외된 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데 집중한다. <완득이>가 그랬고 <우아한 거짓말>이나 <오빠생각>도 같은 궤를 가졌다. 마땅히 사람이라면 그래야 하지만, 정작 누구도 쉽게 건네지 못하는 손을 내밀고 보다 보편적인 사랑을 설파한다.

이한 감독이 촬영한 영화의 관람 등급이 모두 ‘12세 관람가’라는 것도 참 이채롭다. 흥행을 노리는 상업 영화의 황금 비율이라 할 만한 관람 등급은 ‘15세 관람가’다. 중고생 관람객을 놓치게 되는 ‘청소년 관람불가’를 피하면서 가장 자극적이고 높은 수위의 표현을 담아야 감정의 역치가 높은 성인들까지 만족시키는 결과물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한 감독은 철저하게 12세 관람가를 고집한다. 그가 연출한 최고 흥행작인 〈완득이〉를 촬영 할 때는 12세로 관람 등급를 낮추기 위해 몇 장면을 의도적으로 걷어내기도 했다. “어린 친구들이 (내가 연출한 영화를 보고) 재밌게 봤다고 할 때가 제일 뿌듯하다”고 말하고 극 중 지우가 친구에게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너무 아파서 담까지 걸렸다”는 이한 감독은 〈증인〉이라는 영화에 가장 적확한 감독일 수밖에 없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정우성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지우는 순호에게 물었다. 과연 어떨까? 순호의 직업은 변호사다. 좋은 변호사의 필요충분조건은 의뢰인의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의뢰인이 선한 것은 아니다. 적잖은 의뢰인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비싼 수임료를 지불하고 ‘좋은 변호사’를 쓴다. 하지만 여기서 ‘좋은’의 의미는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유죄를 무죄로 바꿀 만큼 ‘능력이 있다’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순호는 좋은 변호사가 아니다. 변호사의 의무는 자신의 의뢰인의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동시에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순호는 이 사건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고 부조리함을 걷어내기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인이 가져야 할 의무를 등진다.

반면 순호는 이 과정에서 좋은 사람이 된다. 사건의 진위를 가리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상처입었던 지우의 마음에 연고를 발라줬다. 〈증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우는 순호를 향해 “아저씨는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인으로서는 실패였을지 몰라도, 순호는 성공한 삶을 산 인간이된 셈이다.

초점을 정우성에게 맞추자면, 〈증인〉은 “당신은 좋은 배우입니까?”라는 질문을 정우성에게 던지는 듯하다. 영화 〈비트〉와 〈태양은 없다〉 등에서 청춘의 불안을 대변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정우성은 ‘잘 생긴’ 배우다. 빼어난 외모를 가진 배우들이 득실대는 연예계 내에서도 군계일학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독이 되곤 한다. ‘스타’ 정우성에는 이견이 없지만, 연기 만으로 평가하는 ‘배우’ 정우성을 논할 때는 의견이 다양해진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같이 정우성이 아니라면 성립조차 어려운 작품이 있는 반면, 몇몇 작품 속에서는 이질감이 느껴지는 연기톤으로 질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증인〉 속에서는 그는 26년차 배우의 내공을 오롯이 보여준다. 굳이 그의 외모에 대한 평가를 더하지 않아도 〈증인〉 속 정우성의 연기는 차지고 탄탄하다. 지우를 바라보는 순호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 켠이 아주 뻑뻑해진다. 그가 ‘제40회 청룡영화상’에서 류승룡(극한직업), 설경구(생일), 송강호(기생충), 조정석(엑시트)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계획하고 꿈꾸지 않고 버티다 보니 이렇게 상을 받게 됐다”는 그의 수상 소감에서는 기쁨을 넘어 회한이 느껴졌다. <증인>의 타이틀롤은 증인 역을 맡은 배우 김향기다. 그는 조력자인 변호사를 연기했다. 하지만 “얼굴이 연기를 가린다”는 평가를 종종 받던 정우성은 <증인>에서 외모를 뚫고 나온 연기를 보여줬다. 이 영화를 본 숱한 관객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우성은 좋은 배우입니다.”

 


안진용 _ wlsdyd792naver.com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저서로 『방송연예산업경영론』 (공저)이 있음.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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