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아이리시맨] 미국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020 오늘의 영화 - 아이리시맨] 미국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라제기(한국일보 영화 전문기자)
  • 승인 2020.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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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을 보다가 작은 소품에 눈길이 갔다. 미국 운송노조의 전설적인 지도자 지미 호파(알 파치노)는 청량 음료수 캐나다 드라이를 즐겨마신다. 호파는 술을 마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주하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는 사람들을 카페에서 만날 때도 캐나다 드라이를 주문하고, 호숫가 별장에서 쉴 때도 캐나다 드라이를 마신다.

〈아이리시맨〉의 등장인물 중 캐나다 드라이와 직접 연계된 이는 호파를 빼면 딱 한 명이다.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다. 러셀의 사촌이자 변호사인 빌 버팔리노의 설명에 따르면 러셀은 한때 캐나다 드라이 운송 트럭을 운전해 트럭에 대해서 잘 안다. 영화는 자세히 묘사하지 않지만 캐나다 드라이를 매개로 호파와 러셀이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파는 러셀을 통해 이탈리아계 마피아들과 연계돼 운송노조 관련, 지저분한 일들을 해결했을 것이다. 

캐나다 드라이는 프랭크 시어런(로버트 드 니로)와 러셀을 이어준 끈이기도 하다. 러셀이 트럭 고장으로 곤경에 처한 프랭크를 도울 수 있었던 것도 캐나다 드라이 관련 이력 덕분이다. 프랭크는 러셀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고, 자의 반 타의 반 마피아의 청부폭력과 청부살인에 동원된다. 호파와 러셀과 프랭크는 캐나다 드라이라는 자본주의 시대 음료로 서로 연결된 셈이다. 

정글 같은 다인종 자본주의 국가

호파와 프랭크는 캐나다 드라이 말고도 서로를 묶어줄 무엇이 있다. 호파의 어머니는 아일랜드계다. 호파가 보디가드로 아이리시Irish, 프랭크를 추천 받았을 때 그를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프랭크는 러셀이 호감을 살만한 요소를 지니기도 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에서 오래 근무해 이탈리아어를 능숙하게 한다. 게다가 러셀 등 이탈리아계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다. 프랭크의 자녀가 세례를 받을 때 러셀 등이 함께 식에 참석해 축하해준다. 요컨대 프랭크는 호파와 러셀의 중간에 서 있는, 양쪽 모두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 그러면서도 러셀 쪽과 관계가 좀 더 돈독해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공교롭게도 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혈통이다).

〈아이리시맨〉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이민 국가 미국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반영한다.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은 혈통에 따라 종교에 따라 이합집산한다. 이들의 결합과 결별은 여러 변수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만 무엇보다 돈으로 상징되는 이해득실이 가장 큰 변수다. 

프랭크는 운송하던 쇠고기를 일부 빼돌려 가욋돈을 벌려다 꼬리가 밟히는데, 변호사 빌을 통해 곤경에서 벗어난다. 빌과 함께 간 술집에서 러셀을 다시 만난다. 러셀은 배짱 있는 프랭크를 마피아 거물 안젤로 브루노(하비 케이틀) 등에게 소개시켜 준다. 서로의 이익을 통해 인연은 강화된다. 프랭크는 돈을 받고 대형 세탁소를 폭파시키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브루노가 운영하는 사업장이다. 프랭크는 브루노에게 자신이 알지 못한 상황에서 저지를 뻔한 일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세탁소 폭파를 청부한 사람을 죽인다.

그렇게 프랭크는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암살자로 거듭난다. 프랭크는 해결사의 면모를 보인 덕분에 거물 노동운동가 호파에게 소개된다. 호파는 노조원들의 연금을 마피아 사업에 투자하고, 마피아는 호파를 보호해주는 식으로 공생한다. 마피아와 호파의 관계는 호파가 노조의 지도자 자격을 상실하면서 어그러진다. 호파 대신 마피아의 이익을 대변해줄 세력이 부상했고, 호파가 노조 안에서 펼치는 헤게모니 싸움이 마피아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커진다. 호파의 보디가드였고 친구나 다름 없는 프랭크에게 명령이 떨어진다. 페인트 칠을 하라고. 관계는 돈으로 맺어지고, 돈으로 붕괴된다.

ⓒ넷플릭스

피로 물든 이민자 나라의 역사

〈아이리시맨〉 속 일련의 인간 관계는 미국 사회 전체로 확장해 적용할 수 있다. 영화는 가끔씩 마피아가 당시 정치와 국제정세에 어떻게 관여돼 있는 지 슬쩍슬쩍 보여준다. 

1961년 미국 역사 최초로 가톨릭 신자(아일랜드 혈통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다. 영화는 명확히 보여주지 않지만 마피아가 주요 역할을 한 것처럼 암시한다. 케네디의 동생과 견원지간인 호파는 마피아에 도움을 청하고, 마피아는 케네디 아버지에게 압력을 가하려 한다. 영화는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려 한 미국의 피그만 공격에도 마피아가 관여했다고 시사한다. 프랭크는 러셀의 명령으로 트럭을 운전해 미 중앙정보부(CIA) 요원에게 무기를 넘겨주기도 한다. 마피아는 쿠바 내 자산을 되찾고 싶어 정부의 비밀작전을 몰래 도운 것처럼 영화는 넌지시 보여준다. 하지만 정치와 국제정세는 마피아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고, 케네디는 암살 당한다.

프랭크는 마피아의 눈밖에 난 호파에게 경고를 줄 때 “대통령도 없앤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맘에 들지 않으니 제거해 버렸다는 표현인데, 사실이든 아니든, 영화는 돈에 움직이는, 냉혈한 마피아 방식이 미국 사회를 움직인다고 역설한다. 

프랭크는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다. 그는 마피아의 주류인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호파처럼 노동 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거물도 아니다. 프랭크는 그저 정글 같은 다인종 자본주의 사회,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상대적 약자다.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의 생존, 가족의 안위가 기준이다. 그가 호파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영화는 말하려는 듯 하다. 노쇠한 프랭크는 장성한 자녀들이 발길을 끊자 외로움을 견디지 못 하고 장녀를 찾아가 호소한다. 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했던 일이라고. 장녀는 항변한다. 한참 ‘활동’하던 당시 아버지가 무서워 말도 붙이지 못 했다고. 

ⓒ넷플릭스

구원은 오지 않는다

〈아이리시맨〉의 시작과 끝은 서로 조응한다.

카메라가 병원 복도를 가로질러 휴게실 소파에 앉은 프랭크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을 알린다. 프랭크를 찾아가는 지인의 시선인지, 프랭크를 관객에게 소개하려는 감독의 시점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후 프랭크는 카메라를 보며 증언하듯 과거를 돌아본다. 프랭크는 지인(그는 막내딸 페기가 요양원에 면회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에게 말하는 듯 하기고 하고, 휴게실 안불특정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해 보이기도 하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데, 프랭크가 넋두리처럼 지난 세월을 털어놓고 영화는 그저 이를 중계 방송하듯 전하는 지도 모른다.

프랭크는 딱히 회개하지 않는다.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찾아와 유족들을 위해서라도 호파 살해를 인정하라고 채근하지만 자신의 변호사를 부르라고만 말한다. 요양원으로 찾아온 신부와 함께 기도를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죄를 털어놓지 않는다. 옛 사진을 보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간호사에게도 그는 고백하지 않는다. 자녀들, 특히 호파와 유대가 깊었던 페기를 위한 프랭크의 마지막 배려일지 모른다.

프랭크는 자신의 방에 왔다가 나가는 신부에게 작은 부탁을 한다. 문을 좀 열어놓으라고. 죄를 지은 프랭크는 홀로 남은 어두운 방이 무서운 것일까. 아니면 회개는 하지 않을지언정 자신의 구원을 바라는 것일까. 또는 혈육이 자신을 용서하고 찾아오리라는, 실낱 같은 기대를 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프랭크는 영화의 시작처럼 앞을 보며 이야기를 한다. 관객은 프랭크가 결국 누군가에게 고백을 했고, 자신들이 그 내용을 영상으로 봤다고 생각한다. 과거 저지른 일에 대한 진술을 완강히 거부했던 프랭크의 모습과 배치된다. 관객은 이쯤 되면 프랭크가 말하는 대상을 영화가 공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FBI요원일까, 페기일까. 영화는 끝내 대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프랭크는 자신의 죄를 털어놓고 구원 받고 싶을 지 모르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이는 화면 안에선 없는 듯하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어쩔 수 없이 범죄에 휘말리고, 범죄 행각 속에 우쭐거리기도 했지만, 자신이 의도한 것은 거의 없었던 한 남자의 삶은 그렇게 종착역에 이른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 마피아의 법칙이 통용되는 나라, 미국은 프랭크처럼 구원 받지 못할 것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마지막 영화가 될 가능성이 큰 〈아이리시맨〉으로 그렇게 단언하는 듯하다.

 


라제기 _ jegyra@gmail.com
1970년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방송학 석사 학위를, 영국 서섹스대학교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편집부와 문화부, 사회부, 국제부에서 근무했다. 영화 담당 기자로 10년 넘게 일해 왔고, 《한국일보》 엔터테인먼트 팀장과 문화부장을 거쳐 영화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2008년부터 영화 칼럼 ‘라제기의 시네마니아’를 연재하고 있다.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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