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겨울왕국2] 진정한 여성서사가 주는 감동
[2020 오늘의 영화 - 겨울왕국2] 진정한 여성서사가 주는 감동
  • 이채원(영화평론가)
  • 승인 2020.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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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1. 예술이 된 기술

영화의 후속편을 만드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체로 전작이 크게 성공을 거둔 경우에 그리고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아있을 때 속편이 제작된다. 영화 〈겨울왕국2〉가 개봉 전부터 높은 예매율을 보였던 것은 전편인 〈겨울왕국〉이 주었던 강렬한 기억과 더불어 디즈니 애니메이션 팀워크의 역량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왕국 2〉가 단기간에 한국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작의 명성뿐만이 아니라 후속편인 〈겨울왕국 2〉 자체가 보여준 매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서 〈겨울왕국 2〉는 스토리와 서사, 작화와 화면구성, 노래와 사운드 등 모든 면에서 진보했다. 눈과 얼음을 표현하기 위해 무채색이 주조를 이루었던 전작과 달리 따뜻하면서도 몽환적인 컬러들을 사용한 작화와 거대하면서도 정교한 그래픽은 시선을 사로잡으며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가는 노래들이 심장을 파고들면서 화면과 사운드가 함께 더욱 깊이 있는 서사의 층들을 쌓아간다. 이 영화는 기술의 뒷받침이 없이는 예술의 완성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예술적인 성취가 기술의 존재 의의임을 증명한다. 기술인 아트Art이자 예술인 아트Art가 영화의 미학임이 1편에 이어서 또다시 여실하게 증명된 것이다. 1편보다 시공간은 광활해졌고 메시지는 증폭되었다. 메시지의 구심점에는 엘사와 안나를 중심으로 ‘여성성’이 자리한다.

2. 두려움을 넘어서 백마 타고 귀환한 여왕 엘사

〈겨울왕국 2〉에서는 눈을 뗄 수 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빼어난 작화가 이어지지만 특히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다. 진실을 알기 위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찾아 가는 길에 거대한 파도 앞에 멈춰 선 엘사의 결연한 표정과 눈빛은 압도적이다.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레깅스 차림으로 달려가며 바다를 얼리고 물속에서 말의 형상을 한 물의 정령 나크와 마주치고 끝내 나크의 등에 올라타기까지 일련의 시퀀스는 두려움과 망설임을 거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엘사의 결단을 역동적으로 시각화한다. 마법을 가진 엘사에게 두려움이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엘사는 늘 두려워했다. 1편에서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자신의 마력을 두려워했고 숨겨야했다. 이제 그 시간들을 지나 평화를 되찾은 후에는 애써 찾은 평화가 깨어질까봐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외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엘사는 ‘미지의 세계로Into The Unknown’ 향하는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했고 그 목소리를 향해 ‘너를 보여줘Show Yourself’라고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힘이 너무 커서 두려워했던 엘사는 이제 앞에 놓인 거대한 난제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자신의 힘이 충분하다고 믿어야 한다.

인류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여성들은 엘사처럼 자신의 능력을 숨겨야 했다. 자신이 창작한 예술작품을 여성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지 못했으며, 여성과학자는 자신의 업적을 남성과학자에게 빼앗기고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다. 여자에게 남자보다 우월한 능력은 재앙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성은 심지어 ‘마녀’로 호명되며 처단되어 온 것이 남성중심 인류역사이다. 많은 선구자들의 희생과 페미니즘의 성과로 이제 그런 암흑의 시대는 지나왔지만, 현재는 페미니즘에 대한 거센 백래시backlash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며 지금 여성들은 엘사처럼 자신의 힘이 충분하다고 믿어야 한다. 〈겨울왕국 2〉가 전작에서 더 나아간 서사에는 ‘노덜드라’와 노덜드라 출신 어머니의 스토리가 비중 있게 자리한다. 엘사의 할아버지가 문명의 상징으로 보이는 ‘댐’을 노덜드라에게 선물한 것이 사실은 그들의 땅을 황폐화하고 침략하기 위한 속임수였으며 이에 항의하는 노덜드라 청년을 살해한 과거가 현재 아렌델이 처한 위험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서사전개에 대해서 ‘미국역사의 이면에 대한 디즈니의 반성’이라고 해석하는 시각이 있고 이는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으로 보면 〈겨울왕국 2〉에서 전개되는 서사에는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폭력과 침략의 남성 중심역사와 남성중심문명에 대한 성찰과 은유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덜드라가 ‘여성성’이 지배하는 곳이었다면 엘사의 할아버지가 통치했던 아렌델은 ‘남성성’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엘사의 할아버지는 마법을 쓰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며 노덜드라에 대한 침략과 폭력을 합리화하려 했다. 

엘사는 과거의 모든 진실들을 마주한 후에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은 마법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1편과 달리 2편에서 엘사는 자신의 마법을 숨기지 않고 더 스케일이 커진 마법을 있는 힘을 다해 구사한다. 엘사가 마법을 행하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답고 역동적이다. 안나에게 여왕의 자리를 넘기고 정령이 된 엘사의 모습은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표현되었다. 크리스 리 감독은 〈겨울왕국〉의 테마는 선악의 대결이 아니라 두려움과 사랑과의 대결이라고 밝힌바 있다. 엘사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소중한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는 2편에서 특히 강조된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안나에게 향한다. 1편의 자매애는 2편에서 더욱 깊어지고 확장된 의미의 층들을 만든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3. The Next Right Thing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엘사와 달리 마법을 소유하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며 정이 많고 좌충우돌하는 성격의 안나는 〈겨울왕국 2〉에서 엘사와 더불어 내러티브의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안나는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려는 모험까지도 엘사와 함께 하려 했으나 자신과 달리 특별한 힘이 없는 안나의 안위를 걱정한 엘사에 의해 안나는 엘사와 떨어지게 된다. 올라프의 소멸을 보면서 엘사에게 위험이 닥친 것을 알게 된 안나는 혼자 어두운 동굴 속에서 ‘해야 할 일을 할 거야The Next Right Thing’라는 노래를 부른다. ‘미지의 세계로Into The Unknown’와 ‘너를 보여줘Show Yourself’를 부른 엘사(이디나 멘젤)의 목소리가 힘차게 뻗어나가는 경이로운 성량과 윤기 있는 질감으로 관객을 감탄하게 했다면, 안나(크리스틴 벨)의 속삭이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노랫소리는 특별한 힘이 없는 안나가 혼자 남겨진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희망 없는 희망을 너무도 생생하게 전달한다. 안나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힘이 없이 근원적인 외로움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은 안나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안나의 심정을 온 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안나를 응원하게 된다. 사실상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안나의 노래로 발화된다. 우리 모두가 안나처럼 홀로 세상 속에 던져진(피투된) 존재이지만 세상을 향해 다시 던지는(기투하는) 존재인 것이다.

결국 안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해야 할 일을 해냈다. 거인들을 댐으로 유인해 댐을 파괴한 것이다. 안나가 파괴한 댐은 침략과 거짓과 배신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문명에 대한 몰이해와 자연파괴에 대한 은유이다. 댐이 무너지자 아렌델 왕국을 향해 거대한 물줄기가 몰려오고 과거의 잘못에 대한 대가로 아렌델 왕국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될 즈음에 물의 정령 나크를 타고 엘사가 달려온다. 물보다 빠르게 달려온 백마 탄 여왕은 자신의 마법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물줄기를 얼려버린다. 관객 모두를 집중하게 할 만큼 압도적인 장면이다. 이렇듯, 백마 탄 왕자가 나라를 구하고 공주에게 키스하는 것이 아니라, 공주의 도움으로 백마 탄 여왕이 모두를 구하는 〈겨울왕국2〉에서는 ‘여성성’이 우세하며 여성들의 연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현재 사회상을 보여준다. 위험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 엘사를 구한 건 ‘자매애’로 표상된 여성연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를 만들지 않는다. 크리스토프와 마티아스 장군과 같은 남성들은 선한 조력자로서 그들이 ‘해야 할 일The Next Right Thing’을 한다. 크리스토프는 러닝 타임 내내 안나에게 청혼할 기회를 찾고 연습하며 결국 러닝 타임의 막바지에서 꿈을 이룬다. 크리스토프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은 애절하지만 거칠지 않다. 크리스토프는 여자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강제로 키스하거나 헤어질 거라면 같이 죽자는 마초가 아니다. 마티아스 장군 역시 긴 시간을 견딘 순정을 보여주었다. 〈겨울왕국 2〉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랑의 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기존영화들의 진부한 재현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여성이 여성을 지지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지하며 침략과 파괴와 폭력에 맞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진정 위험한 것은 두려움임을 설파하고 자신의 힘을 쓸 것을 격려하며 스스로를 드러내고 미지의 세계로 달려가는 엘사와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라도 한 걸음 한 걸음 해야 할 일을 하는 안나, 그리고 선한 남성 조력자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영화 〈겨울왕국 2〉가 모두가 행복한 페미니즘을 켜켜이 담고 있는 진정한 여성서사임을 깨닫게 한다. 이것이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주면서 관객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한국영화에서든 할리우드 영화에서든 여성 캐릭터가 성적性的으로 소비되거나 시체가 되어 전시되거나, 여자들끼리 남자 얘기만 하거나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거짓신화를 전파하거나,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나섰다가도 슬며시 사라지는 경우가 넘쳐난다. 그런 영화들이 주는 해악과 피로감에 지친 관객들에게 디즈니 캐릭터의 변화는 짜릿한 청량감을 준다. 엘사와 안나는 그 정점에 서 있다. 

 


이채원 _ dike97@hanmail.net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당선. 저서로 『소설과 영화, 매체의 수사학』, 『영화 속 젠더 지평』, 『영화로 쓰는 러브레터』, 『호모헌드레드와 문화산업(공저)』 등이 있음. 문학과 영화, 젠더와 문화에 대해 강의하고 글을 씀.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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