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 미안해요, 리키] 현대적 리얼리즘의 방법과 스타일로 비정규직 노동, 디지털 경제의 가혹한 시스템을 고발하다
[2020 오늘의 영화 - 미안해요, 리키] 현대적 리얼리즘의 방법과 스타일로 비정규직 노동, 디지털 경제의 가혹한 시스템을 고발하다
  • 곽영진(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 승인 202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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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 원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2019)는 처절하게 돈벌이를 하며 말 안듣는 자녀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의 고충과 이를 둘러싼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그린 영화다. 특히 주인공인 남편 리키의 택배기사 업무, 요컨대 자영업이라는 허울 아래 숨이 턱턱 막히는 비정규직 택배노동의 가혹한 시스템을 고발한다. 초점이 이러하므로, 영화는 가족의 비중이 작지 않음에도 가족멜로드라마라기보다 한 편의 노동영화에 가깝다. 노동 문제를 그린 사회드라마, 일종의 사회고발 영화.

원제목이 ‘Sorry We Missed You’(배달을 갔지만 고객을 못 만났다며 영·미권에서 배달원이 부재중메시지로 남기는 카드문구)를 채택한 것을 볼 때, 영화의 무게중심이 어느 문제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노동현장의 분규가 길고 생생하게 그려지기보다 가족의 일상과 고군분투, 감정이 좀 더 비중 있게 잘 드러난 영화이어서 특히 10대 아이를 키우는 중년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등 ‘가족영화’로도 큰 부족함이 없다. 

ⓒ엔터테인먼트 원

택배업무가 초점인 노동영화이자 가족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영국 북동부 뉴캐슬을 배경으로 임시직에 종사하는 부부와 그 자녀의 버거운 삶을 묘사한다. 리키와 애비는 각각 택배기사와 요양 보호사(출장 간병인)로 근무한다. 둘의 근무 환경과 노동 압박은 한국의 실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택배 배송시간 엄수의 강박은 영국이 더 센 것 같다. 리키 부부의 내 집 마련 꿈은 한국 서민의 그것처럼 당연히(?) 좌절될 수밖에 없고, 둘은 빚에 허덕인다. 특히 리키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일에 더욱 매달리지만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집의 빚은 늘어간다.

주5일 근무제도 적용되지 못한 채 노동 시간이 늘어나니 부모가 자식들과 대화할 시간도 거의 없다. 10대 아들 세브는 무단결석하며 그래피티를 일삼는 와중에 절도, 폭력으로 학교에서 정학을 당한다. 열한 살의 착하고 조숙한 딸 라이자는 부모를 이해하지만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세브는 학업에 전념해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직업에 종사하기 어려운 현실을 개탄한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에 탈선하게 된 것.

애비와 라이자의 지적대로 리키는 택배 업무에 종사한 뒤 가족을 등한시하게 됐다. 징계를 받는 아들을 위해 학교에 갈 시간조차 없던 허울 좋은 자영업자 리키(크리스 히첸 扮)는 하루 휴가를 내려 한다. 리키를 포함해 택배 기사들을 심하게 압박해온 지점장은 가정파탄 일보 직전인 리키의 청을 단칼에 밴다. 요양보호사 애비는 모처럼의 가족 저녁식사 중에 갑작스런 호출을 받고 달려간다. 비정규직 가족의 비극이 보인다.

리키는 배송 도중 강도를 당해 얻어맞아 골절상을 입는다. 지점장은 강탈 당한 배송 물품 중 보험처리가 안 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방침을 강요한다. 게다가 폭행으로 한쪽 눈을 뜨지 못하는 리키에게 즉시 업무 복귀를 종용한다. 이에, 노인들을 천사처럼 돌보고 아들의 비행에도 인내해 마지 않던 애비는 절대 ‘퍽큐!’하지 않는다는 삶의 원칙을 깨고 욕설을 퍼붓는다.

하지만 다음 날. 리키는 새벽잠에서 깬 애비와 세브의 강력한 만류를 뿌리친 채 화물차인 밴을 출발시킨다. 병가 중의 무임금과 벌금으로 빚이 늘어나는 게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지만 눈물을 흘리며 운전을 하는 리키의 옆얼굴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처럼 〈미안해요, 리키〉가 가족영화로서 주는 감동은 통상적인 따듯한 감동이 아니라 서늘한 감동이다. 이 점은 이 영화가 지닌 현대적 특색의 하나이다.

ⓒ엔터테인먼트 원

켄 로치가 걸어온 길, 그의 리얼리즘

이처럼 영화는 대다수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의 애환,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바쁘고 힘든 일상을 그리면서 비정규직 노동의 가혹한 시스템, 공공의료 등 법과 복지의 허술한 안전망을 고발한다. 특히 택배기사와 방문간병인의 고충을 사실적이고도 하드보일드하게 그려냈다. 배경음악 삽입을 최소화한 가운데 담담하면서도 냉철하게 캐릭터를 실어 나른다.

일상의 이야기를 켜켜이 쌓아올리며 사실적으로 장면들을 구축해 가다 종반에 인물의 감정을 응축시키고 또한 이것이 분출되도록 각본을 쓴 폴 래버티 그리고 이 모든 시각적 장면화의 투박하고 아름다운 전개와 연기 연출을 이끈 83세의 거장 켄 로치 감독, 그들의 방법과 스타일은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 등이 그런 것처럼 아주 혁신적인 것은 아니다. 작품 아이디어와 스토리텔링, 연출 미학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바로 위에 언급한 바의 구축과 응축, 아울러 투박한 리얼리즘 수법 구사와 절제미로의 승화는 거장이 아니면 쉽게 이뤄낼 수 없는 경지이다. 이는 켄 로치가 칸에서 〈히든 어젠다〉(1990)로 심사위원상과, 〈하층민들〉(1991) 및 〈랜드 앤 프리덤〉(1995)으로 국제비평가상을 받고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두 번씩이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실 켄 로치 감독은 1990년대 이후 상업영화권 내의 예술영화를 만드는 작가감독이고, 그의 작품들이 실험성과 전위성을 띤다거나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아니다.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선보이며 “50년 전에 하던 얘기를 아직도 해야 하는 게 놀랍다”고도 했다. 전후 성립된 국가독점적 금융자본주의는 70년대를 넘어 80년대의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꽃피고 90년대의 지구화를 거쳐 신세기의 신자유주의 경제와 디지털 사회체제를 열었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과 노동 소외의 본질이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한편, 켄 로치가 오랜 기간 선택한 영화사조인 사회비판적 사실주의도 60년대 영국의 프리시네마 운동의 기수로서 그가 전개한 연출방식하고 그 본질이나 궤적을 달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리얼리즘이 전후 네오리얼리즘을 넘어서며 진즉에(지금으로부터 반세기도 더 전에, 이미) 현대성을 획득했다는 히스토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중년 실업자의 해프닝을 그린 〈레이닝 스톤〉과 사회사업가들에게 아이들을 빼앗긴 한 어머니의 이야기 〈레이드 버드, 레이드 버드〉 그리고 스페인 내전을 다룬 〈랜드 앤 프리덤〉 등 90년대에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도 사회에대한 일관된 관심과 좌파적인 역사관, 이념을 영화를 통해 실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엔터테인먼트 원

디지털이 인간의 족쇄

2010년대. 〈미안해요, 리키〉는 영국의 복지제도를 비판한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이어 디지털이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의 족쇄가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세계체제에 대한 깊은 이해도 이 영화가 지닌 (탈)현대적 특색의 하나이다.

어찌 보면 디지털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하지만 리키는 2분 간격으로 끊임없이 울려대는 스캐너를 통해 배송 상황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자에게 노출시켜야 한다. 지점장은 스캐너를 가리켜 “(일자리에서)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는지 결정하니까 이 기계를 기쁘게 해야 한다”며 신격화한다. 애비는 스마트폰으로 날아오는 추가근무 독촉 메시지에 고통스러워한다. 기계 이상으로 디지털이 주인이 되고, 인간이 디지털에 의해 통제당하고 예속되는 노예로 전락한 세상이다. 물론 디지털의 주인은 자본이다.

〈미안해요, 리키〉의 외형상 악역은 지점장. 하지만 감독이 고발하는 진정한 악역은 지점장을 피도 눈물도 없도록 만든 신자유주의이다. 관리자, 곧 지점장은 신자유주의의 대행자 중 한 명일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 사회문화의 총체로 이해한 프레드릭 제임슨이 시드니 루멧 감독의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1975) 분석비평에서 FBI 요원을 국가독점자본주의 또는 그 관리자의 상징으로 보았듯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많은 관객으로 하여금 울컥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만드는 설정과 그 연출을 두고 혹자는 감상(신파)적 요소라고 지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신파가 아닌 현실, 즉 현실이 대체로 그러한 풍이라고 말하겠다.

켄 로치 감독은 우파도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견결한 개념과 높은 도덕성으로 더욱 추앙 받는 인물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땅의 거물 우파 평론가들조차 그와 그의 영화를 폄하하는 걸 아직 보질 못 했다. 혹자는 그 이유가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곽영진 _ 7478383@hanmail.net
영화평론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전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상임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이사, 문화부·기재부 국제영화제 평가위원,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인정소위 위원, 부천국제영화제·대한민국영화대상·대종상·영평상·부일영화상 심사위원 등 역임.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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