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Theme] 서태지, 문화 대통령의 의미
[3월 Theme] 서태지, 문화 대통령의 의미
  • 임진모(음악평론가)
  • 승인 2022.03.0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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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서태지컴퍼니

정확히 30년 전인 1992년 3월, 그때의 대중음악 판은 돌이켜 보면 일촉즉발이었을지 몰라도 당시를 살아가던 음악관계자들에게는 뭔가 터질 것 같은 위기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늘 그랬듯 스타들은 즐비했다. 이승철, 신해철, 이승환, 신승훈이 한참 젊은이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고 있었고, 가수 지망생들은 김현식 같은 포효하는 가창을 모델로 삼았으며, 작곡가들은 유재하가 되기를 열망했다. 대학생들은 ‘대항문화’의 캠퍼스 소속답게 김광석, 정태춘, 노찾사 등 민중적 메시지의 음악을 들었으며, 나이 40살을 넘긴 1991년에도 〈꿈〉을 히트시킨 조용필은 여전히 ‘가왕’이었고, 이선희는 국대 여가수였다. ‘트윈 폴리오’와 나훈아의 앨범은 스테디셀러로 늘 레코드 가게에 배치되어 성인 구매자를 기다렸다. 모든 게 무난히 흘러갔다.

차라리 대중적 화제성 측면에서 떠들썩했던 가수는 이 땅의 인물이 아니라 미국에서 온 아이돌 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었다. 1992년 2월에 있었던 이들의 내한공연에선 수십 명이 다치고 급기야 한 명의 학생이 깔려 죽는 비극이 빚어졌다. 외국 댄스그룹에 열광한 틴에이저들에 대한 언론의 시각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 신문은 사건 후 ‘뉴 키즈 참극 벌써 잊었나?’ 하는 개탄조의 기사를 게재했다. 하지만 ‘뉴 키즈 사태’에 몰매를 맞은 그 청소년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열혈熱血과 집단 히스테리를 폭발시켜 줄 새 아이콘을 맞았다. 

ⓒ(주)서태지컴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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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한 달 후인 3월,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이 출시되었다. 뉴 키즈 사태가 서태지라는 슈퍼히어로, 문화 대통령 시대의 출범을 알리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들은 정말 아무도 없었다. 딱 한사람, 서태지 자신만 알았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신문 1면 기사의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두 가지’의 가능성은 확신했다. 그 둘이 무난히 흘러가던 나른한 음악 세상에 타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나는 댄스였다. 그는 뉴 키즈 사태를 통해 댄스의 파괴력, 적어도 10대를 삼키는 댄스의 거대한 흡인력을 목격했다. 가요계는 그때 1980년대 말에 득세한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의 댄스로부터 변진섭, 이상우, 김민우, 이정석, 신승훈 등의 발라드로 흐름이 회귀한 시점이었다.

ⓒ(주)서태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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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질적으로 ‘레트로’ 흐름을 혐오한 서태지는 댄스에서 진보적 연결고리를 찾았다. 댄스가 아이들을 들뜨게 한다는 것을 신뢰했고, 그것을 가공할 ‘회오리춤’으로 빚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자신의 뜻대로 곧 전략적 비장의 무기, 필살기가 됐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 흥분된 것을 좋아한다. 강한 댄스와 묶이면 그들을 더 흥분시킨다!”는 영국 무용교육학자 로이스턴 맬둠의 말은 옳았다. 마치 목말라했다는 듯 학생들은 빠르게 그리고 집단적으로 새 영웅에 대한 숭배 마인드를 갖추었고, 마침내 폭발한 5월쯤에는 단호하게 하나의 고정된 소속감으로 전열을 짰다.

그들을 교주를 따르는 신도처럼 만든 동력은 댄스 포맷으로 표현된 ‘랩’ 음악이었다. 다른 하나가 이것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기 전, 물론 음악가들이 랩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신해철은 90년도에 터뜨린 히트곡 〈안녕〉에서 랩을 시도했다. 다만 그는 더 나가질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껄이듯 빠르게 쏟아 내는 래핑은 미국에서는 트렌드였을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거북하다’, ‘방정치 못하다’, ‘소란스럽다’는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누구도 담대하게 ‘우리말로 된 랩’에 덤벼들지 못했다. 서태지가 해냈다. 누구보다도 용의주도하고 도전적인 서태지가 랩의 국산화를 이룩했다. 〈난 알아요〉, 이 단 하나의 곡으로 대중음악계 아니 한국사회 전체가 갓 나온 신인에게 굴복했다. 평지풍파, 경천동지의 충격이 1996년 초까지 만 3년 간 지속되었다.

ⓒ(주)서태지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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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크와 센세이션은 변화에 대한 갈망과 맞물려 증폭되었다. 우리말로 랩을 한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사회 전반의 엄숙과 점잖음에 대한 거부와 항거의 표시였다. 적어도 틴에이저들에게 현상現狀은 지루하고 단조로웠다. 지금 40대가 되었을 당시 10대 청소년들은 우리말 랩, 곡 구성, 의상, 회오리춤 등 서태지가 모든 면에 치밀하게 구성한 ‘기획적 파격’에 속속 (자진해서) 포섭되었다. 젊은 세대를 등에 업은 서태지는 위풍당당했다. 그는 또 한국 대중가요에, 적어도 주류에 부재한 리얼리즘을 끌어냈다. 〈교실 이데아〉로 상징된 현실적, 도발적, 저항적 메시지의 노래는 이전 주류음악계에서는 잠자코 있던 것들이었다. 마침내 사회성과 저항을 만난 세대의식에 의해 광풍은 ‘사회적 쓰나미’로 더 격렬해졌다. 이전 주류의 스타 가운데 기성 질서와 가치에 대한 대공세의 깃발을 휘날린 뮤지션이 있었던가. 서태지의 존재감은 가수에서 ‘사회적 리더’로 폭등했다. 여기서 나온 극極적 ‘워딩’이 바로 ‘문화 대통령’이란 수식이었다, 그는 문화, 대중문화로 사회를 흔들어 X세대의 의식을 일깨웠지만 어디까지나 음악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가수였다. 정부수반, 군통솔자, 최고권력자의 의미로 그에게 대통령 어휘를 붙인 게 아니었다. 〈컴백 홈〉, 〈필승〉, 〈내 맘이야〉 같은 음악이 사회 역동성을 주도하는 장면을 봤기에 입에서 절로 문화 대통령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 X세대는 전문지식과 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성과 만나지 않으면 빈약하다는 생각을 뇌리에 박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감성세대, 문화세대였다. 그들은 문화적 감수성을 상위 개념으로 위치 짓고 또 그것을 실천했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파괴력을 외면하는 사람과는 아예 소통을 바라지 않고, 〈교실 이데아〉와 〈필승〉이 뭔 노래인지도 모르는 상급자와는 심리적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문화와 정치, 경제, 사회와의 편차상쇄의 순환을 주조할 줄 알기에, 직장을 예로 들면 보고서에 능한 ‘칼’ 간부와 전문경영자가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고 영화를 얘기하는 동료를 선호한다. 서태지 세대이자 문화세대라서 그렇다. 그들은 문화가 아니면 통할 수 없는 시대와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 모든 것을 압축하는 하나의 용어가 ‘문화 대통령’이다. 거기엔 문화부문에서 나온 문화 대통령이면 그만이겠지만 정치사회부문의 대통령도 문화, 문화적 대통령이기를 바라는 간구懇求가 함의되어있다.

 

 


임진모
음악 평론가이자 작가, 방송인이다. 1984년 경향신문에 입사하여 대중음악 기자로 활동했다. MBC FM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25년간 고정출연하고 있으며 MBC 라디오에서 ‘유행가, 시대를 노래하다’를 진행하고 있다. 역서로는 『존 레논』, 저서로는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젊음의 코드, 록』 『세계를 흔든 대중음악의 명반』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가수를 말하다』 『팝, 경제를 노래하다』 『한국인의 팝송 100』 등이 있다. 2020 MBC 방송연예대상 라디오부문 특별상(배철수의 음악캠프), 제5회 다산대상 문화예술 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 음악 웹진 《이즘》(WWW.IZM.CO.KR)을 운영하고 있다.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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