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Theme] 농구 대통령 허재, 그의 도전적인 삶
[3월 Theme] 농구 대통령 허재, 그의 도전적인 삶
  • 김경호(경향신문 선임기자)
  • 승인 2022.03.0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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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농구 대통령’ 허재(57)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끝까지 펼 수 없다. 경기중 부상으로 인대가 끊어졌지만, 다음 일정을 포기하지 않고 출전을 거듭하다가 수술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결정으로 스스로 장애를 안은 그는 수년 전 한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사는 데 지장이 없지만 딱 한 가지, 세수할 때 코에 손가락이 걸리는 게 불편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요즘 TV 예능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허재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웃음과 푸근한 입담으로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천재적인 재능과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 절대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강한 승부욕과 넘치는 카리스마로 팬들을 열광시켰던 선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다.

허재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스포츠 스타 가운데 유일하게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각 종목에서 뛰어난 누구도 축구 대통령, 배구 대통령, 야구 대통령 등으로 통하진 않는다.

‘농구 천재’, ‘농구 9단’, ‘한국의 마이클 조던’, ‘득점기계’ 등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별명이 있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농구 대통령’으로 통했다. 그도 이 별명을 가장 좋아한다. “대통령은 한 명뿐인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다는 뜻이니 들을 때마다 기분좋고 뿌듯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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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의 농구는 그가 처음 코트에 선 서울 동북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돋보였다. 용산중·고와 중앙대, 기아산업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최고선수가 됐고, 프로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경쾌한 풋워크와 화려한 드리블, 상대를 속이는 페이크 모션과 질풍같은 돌파, 정확한 슈팅 등으로 대한민국에는 상대할 선수가 없었지만 사실 그는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끈기, 강인한 승부욕, 끊임없는 연습과 반복훈련이 뒷받침됐다.

“내가 타고난 천재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노력의 산물이다. 재능은 어느 정도 타고날 수 있지만 노력이 없으면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농구를 처음 시작한 몇 년 동안 그는 아버지의 배려로 집에 농구대를 마련하고 매일 남모르게 슛 연습을 했다. 학교에선 동료들과 같이 훈련하고 돌아와 집안 마루에서 드리블 연습을 하고, 매일 형과 누나의 도움으로 수백 회씩 슛을 던졌다. “남들에겐 집에서 연습한다고 말하지 말아달라”는 데서 그의 승부근성을 엿볼 수 있다.

용산중, 고에서 그는 거의 전승을 기록했고, 예상을 깨고 진학한 중앙대에서는 고려대와 연세대의 쌍벽을 무너뜨렸다. 창단 실업팀 기아산업으로 진로를 정한 뒤 현대와 삼성의 양대 라이벌 구도를 깨는 ‘혁명’을 주도했다. 그가 몸담은 8년 동안 기아는 6번이나 우승하며 무적시대를 이어갔다.

대학 졸업반이던 1987년, 허재는 대학연맹전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전반 동안 팀의 45득점을 혼자 넣었고, 무려 75점을 기록하면서 승리(99-97)를 이끌었다. “기록을 한 번 세워보라는 의미에서 동료들이 기회를 준 경기”였지만, 득점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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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농구 대통령이라는 칭찬이 붙었고 실업 농구 기아 무적시대와 프로농구에서 강렬한 활약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됐다. 대학 1학년 때 국가대표가 된 그는 선수 대표선서를 한 1988 서울올림픽에서 강호 유고를 상대로 맹활약하고, 1990년 세계선수권에서는 이집트를 상대로 역대 최고기록인 62점을 뽑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면서 미국에서도 탐을 낼 만큼 이름을 날렸다 .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 우쭐한 기분에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 시절 음주, 몇 차례 이어진 음주운전 파문은 그 인생의 가장 큰 오점이다.

국가대표 영구제명(나중에 해제) 등 중징계를 받고 슬럼프에 빠진 때 출범한 프로농구 원년(97시즌)에 그는 강동희, 김영만 등에 밀려 교체멤버가 되는 수모를 당했다. 치욕을 씻고자 이를 악물고 주전으로 뛴 97-98 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현대에 패배하고도 시리즈 MVP에 뽑힌 일화는 유명하다. 손등 뼈가 부러지고, 눈자위가 찢어지고, 허벅지 부상을 당했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후 트레이드를 자청해 원주 나래(현 DB)에서 맞은 99-00 시즌엔 플레이오프 진출과 승리를 위해 손가락 인대 부상을 당하고도 수술을 미루는 승부욕을 보였다. 선수로는 전성기가 지난 만 32세에 출범한 한국프로농구에서 허재는 7년 동안 2차례 우승하고 코트를 떠났다.

그는 늘 혈기왕성한 다혈질로 비쳐졌지만, 고참이 되고 플레잉코치를 거쳐 감독에 오르면서 그 위치에 걸맞은 따뜻함으로 주변을 품었다. TV에 비치는 허재는 평소 모습 그대로다.

농구 대통령의 인생은 그를 이을 차세대 농구 대통령 감이라는 칭찬을 듣는 두 아들 웅(29), 훈(27)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졌다. 두 아들이 남보다 늦게 선수의 길을 선택했지만 ‘허재의 아들’이라는 부담을 극복하고 나란히 최고선수가 된 밑바탕은 역시 아버지를 빼닮은 근성과 노력이다.

현역 시절 그는 선수 한 명이 스포츠를 뛰어넘어 사회 전체에 얼마나 큰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 입증해 보였다. 허재의 움직임에 대한민국 농구의 흥행이 좌우됐고, 기존의 틀을 넘어 새로운 질서를 찾았다. KCC 감독으로 10년 동안 2차례 우승을 이루고, 국가대표 감독에서도 물러나 ‘자연인’이 된 그는 후배양성을 위한 농구교실을 열고, 자선단체 홍보대사로도 열심히 활동 중이다. TV에서는 가벼운 오락프로그램에 주로 등장해 허당미를 뿜고 있지만, 〈뭉쳐야 쏜다〉(JTBC), 〈모던 허재〉(KBS 유튜브)처럼 초점은 농구발전에 맞추고 있다. “팬들이 저를 보면서 웃고, 그러면서 농구를 한 번 더 생각하고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현역 시절 불같은 성미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지만 허재의 새로운 도전은 젊은 시절 기존 질서에 맞서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패기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다.

 

 


김경호
경향신문 선임기자. 전 한국체육기자연맹
회장. 저서로 『한국의 스포츠신문』이 있다.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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