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속의 詩] 심재휘 시인의 「높은 봄 버스」
[새 시집 속의 詩] 심재휘 시인의 「높은 봄 버스」
  • 심재휘(시인)
  • 승인 2022.03.0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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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봄 버스

심재휘

계단을 들고 오는 삼월이 있어서 몇걸음 올랐을 뿐인데 버스는 높고 버스는 간다 차창 밖에서 가로수 잎이 돋는 높이 누군가의 마당을 내려다보는 높이 버스가 땀땀이 설 때마다 창밖으로는 봄의 느른한 봉제선이 만져진다 어느 마당에서는 곧 풀려나갈 것 같은 실밥처럼 목련이 진다 다시없는 치수의 옷 하나가 해지고 있다

신호등 앞에 버스가 선 시간은 짧고 꽃이 지는 마당은 넓고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휘날리지도 못하고 목련이 진다 빈 마당에 지는 목숨을 뭐라 부를 만한 말이 내게는 없으니 목련은 말없이 지고 나는 누군가에게 줄 수 없도록 높은 봄 버스 하나를 갖게 되었다

- 심재휘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창비) 중에서

 

 


심재휘
시인은 1997년 《작가세계》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그늘』 『중국인 맹인 안마사』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등을 출간한 시인은 사람과 풍경이 지워진 뒤에, 물이 물길을 따라가듯 흘러가는 말이 사라진 뒤에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잔상, 조용히 오래 스며드는 울림을 시로 전한다. 그는 “아직은 시가 되기 전의 그저 하현일뿐입니다”(「시인의 말」)라고 말한다. 현대시동인상, 발견문학상, 김종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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