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실패와 희망에 대한 즐거운 대화: 허희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
[북리뷰] 실패와 희망에 대한 즐거운 대화: 허희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
  • 김민(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2.03.01 0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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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평론가 허희가 첫 산문집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을 펴냈다.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이래 비평과 칼럼 등으로 작가와 독자를 연결해온 그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글을 내놓는다.

비평은 외로운 작업이다. 창작자들은 많든 적든 자신을 응원하거나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독자들과 함께할 수 있지만, 비평가는 철저히 ‘읽는 사람’의 위치에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 역시 “비평가란 혼자서는 갇혀 있는 자기를 꺼낼 수 없기에, 작품을 빌려 어떻게든 갇혀 있는 자기를 조금이라도 꺼내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한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마음이 작품을 넘어서면 비평가의 관점은 무너진다. 그래서 비평가는 드러내면서 감추는 방식으로 자신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끔은 비평가도 무언가 힘주어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허희 평론가에게는 그것이 ‘실패’라는 단어 앞에 섰을 때이다. 그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앞으로 자신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계속 마주치게 된다. 현실의 비루함은 멀리서 빛나는 그의 이상을 ‘도래할 수 없는 것’처럼 만들곤 한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반쯤은 체념”하면서도 “나머지 반은 포기하지 못”했다. 희망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그의 현재는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산문집은 ‘희망’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 힘주어 얘기하고 싶기 때문에, 그만의 독자들에게 직접 고백하고 싶기 때문에, 저자는 잠시 평론의 바깥 오솔길을 거닐며 자신만의 문장으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복잡한 사랑의 문제를 완벽하게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사랑을 하는 우리가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상대방도 나도 서로를 덜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까. 애초부터 불완전한 인간끼리의 사랑에 완전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 보통의 말마따나 결혼은, 상대방이나 내가 누구인지 서로 모르는 노름판에서 둘 다 잭팟을 터뜨릴 수 있다고 믿는 헛된 믿음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것은 도박이라서 한없이 매혹적이다. 질 것을 예감하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발을 들인다.
  - 본문 46쪽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은 자신의 비평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왜 자주 읽고 쓰는지 스스로에게 오래도록 묻고, 한 권의 책으로 답을 내놓았다. 또한 읽고 쓰기라는 행위를 감싸고 있는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삶에 대한 고백도 이번 책에 담겨 있다. 그래서 맑은 감성을 가지면서도 서늘한 성찰도 함께 담은 글들은 그간 비평 너머에, 혹은 비평의 주변에 있던 그의 마음이 어떤 형태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짐작하게 해준다. 구체적으로는 고전 『구운몽』부터 영화 〈오버 더 펜스〉에 이르기까지 문학 텍스트와 영화, 그리고 노랫말을 빌려 그는 자기 비평의 한구석을 말없이 지켜온 작은 마음을들 소환한다.

빨강머리 앤은 자연과 대화할 줄 안다. 자연을 그냥 주어진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달리, 그녀는 자연과 감정적으로 교류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언어로 표현할 줄 안다. 또한 사물과 장소의 이름을 새로 짓고 자신만의 고유 명사로 모든 것을 다시 상상할 줄 안다. 과연 이 아이를 시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앤은 자연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어린 시인이다. 앤은 자연이 아름다울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해 아름다움의 이면에 대해 쓴다. 이때 아름다움은 티없이 맑고 깨끗한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앓고 있는, 앓은 다음에 생겨나는 불투명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앤이 가진 미학적 서정이다. 그리고 반짝이는 그녀의 심성이 주변의 모든 것을 반짝이게 한다.
  - 본문 146~147쪽

문장들 사이를 흐르는 섬세한 생각들은 그의 바탕인 문학평론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삶이라는 거칠고 두려운 곳에서 매순간 주저앉으면서도 온힘을 다해 ‘희망’이라는 단어를 끄집어내려는 그의 모습은 딱딱한 철학 용어에 갇힌 속물이 아니라 바로 매일매일 텍스트 바깥에서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우리와 포개진다. 그래서 그의 글은 그 자체로 어떤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가 그동안 품어 주었던 많은 작품들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에 실린 글을 통해, 대부분 내가 설레며 접한 인물에 건네는 말-가닿고자 했으나, 거의 닿지 못했던 실패의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의 무수한 실패를 참고 삼아 당신은 되도록 적게 실패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매일 타인과 연결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곤 한다. 그리고 그 실패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또다른 실패를 그 위에 덧씌운다. 허희 평론가의 산문집은 그런 실패의 지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타인과 간절하게 연결되려고 했음을 알려준다. 그가 정성껏 말을 걸었던 작품들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닮아 있다. 그래서 그는 실패하는 우리를 독려한다. “그것(작품과의 연결)을 포기하는 순간 사람을 향한 관심, 아니 사람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는 계속 평론을 써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관하는 지금, 이 책은 우리 안에도 ‘당신’이라는 단어가 작은 온기를 품고 머물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 《쿨투라》 2022년 3월호(통권 9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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