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Theme] 식물의 언어를 조형적으로 번역하다
[4월 Theme] 식물의 언어를 조형적으로 번역하다
  • 이재언(미술평론가)
  • 승인 2022.04.01 09: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Healing Landscape- love 116.8X72.7cm Oriental painting on canva s, ink, gel stone 2019

남의 일인 줄 알았던 코로나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이제 주변 지인들에게까지 다가와 있다. 내가 걸려도 이상할 것도 없으니, 감내해야 할 것 같다. 다행히도 주변에 걸렸다는 사람들 대부분 가벼운 증상으로 끝났다고들 한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될 일이다. 나 하나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이 감염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동안 우리에게는 치유의 원천인 자연과 예술작품이 있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특히 예술작품들 가운데 자연의 언어를 예민하게 포착하여 조형적으로 교감케 하고자 하는 한국화가 박진이(57)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사랑하다, 80x80cm 캔버스위에 먹과 혼합재료 2018
사랑하다, 캔버스위에 먹과 혼합재료 72.7X116.7CM 2017

나무에 기대서면 나는 숭고한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로 숨조차 버거울 때가 있다. 숲길을 걸을 때 만나는 작은 꽃, 풀 한 포기에도 애정 어린 시선이 머물고, 감탄과 경이로 다가온다.… 그 내밀한 사연들을 일일이 축적하며 삶의 이야기를 만든다.
- 작가노트 중

오늘의 동시대인들이 처한 정신적, 정서적 상황이 황폐화하고 보니, 박진이 작가의 작업이 의미가 새삼 돋보인다. 작가는 소박하고 진부해 보이는 평범한 일상, 혹은 일상에서 만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주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음미에 비중을 둔다. 그동안 작가가 추구해온 주제가 ‘마음의 소리’, ‘치유적 풍경’, ‘편집된 자연’, ‘삶을 바라보다’, ‘뒤란의 페이소스’ 등으로 다양하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접하는 식물의 풍경 혹은 정물들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 대상들이 생명체로서 마땅히 지니고 있을 언어를 직관적으로 음미하고 번역하여 관객들에게 조형적으로 편안하게 전달한다.

재현을 토대로 하는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화면이 주를 이루는데, 그렇다고 작가가 대상을 객관적으로 스캔하듯 재현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삽화적인 가벼움과는 거리가 멀다. 가벼움보다는 진지함이, 무엇보다 산뜻함과 싱그러움이 더 어울린다. 대상의 표피 뒤에 유동 상태로 있는 본질적인 울림, 즉 생명의 이야기들을 직관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미의식의 면모가 엿보인다. 작가는 여느 한국화가들과 달리 주로 캔버스에 많이 그린다. 캔버스에 석분으로 임파스토를 하여 마치 회벽 같은 마티에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흡사 회벽灰壁 같은 캔버스에 먹이나 수성 안료로 그리는 방식은 중세 유럽에서 많이 생산해낸 프레스코 벽화와 비슷할 수도 있으며, 삽화적인 가벼움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화가인 작가가 종이를 쓰지 않고, 회벽과 같은 화면 위에 그리는 이유는 작가의 화면 디테일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먹이나 수성안료가 흘림과 고임을 중시하는 작가의 의도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필요에 따라 건조한 갈필도 즐겨 구사한다. 작가의 그림마다 여백이 많다. 전통적 미학이나 화론에 충실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작가의 여백은 설명하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없음’이 아님은 분명하다. 특히 유기적 생명체와 무기물과의 대비를 통해 어떤 감동적인 ‘페이소스’를 강하게 어필하고자 하는 의도가 읽힌다. 특히 관객이 감성적으로 참여토록 하는 일종의 장치일 수도 있다. 관객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미완의 공간에서 상상적인 세계를 완성해 나갈 여지이기도 하다.

작가가 식물의 언어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의 제목들이 〈바람이 분다〉, 〈사랑한다〉 등으로 대상(식물)들이 작품의 화자話者가 되고 있다. 그 식물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으로 해석하는 바를 형태와 색, 구성 등으로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화면엔 팬지, 쉬땅나무, 칸나, 몬스테라 등 다양한 식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쉬땅나무의 경우 잎들의 색이 변화무쌍하다. 사랑하고 구애하는 뜨거운 감정이 색 표현에서 읽히고 있는 것이다. 원 구조를 띤 팬지 꽃다발의 경우 봄바람을 느끼면서 설레는 꽃들의 표정이라는 해석이 참 흥미롭다. 이렇듯 식물의 다양한 표정과 감정선이 살아 있는 표현들이 우리 관람자들에게 실물과는 또 다른 감정적 반응을 인상적으로 야기할 것이다.

박진이 작가
박진이 작가

작가 작업의 관건은 역시 단조롭고도 평범함 속에 섬세하면서도 뉘앙스가 풍부한 화면으로 승화시켜내는 것이다. 정확한 통·번역을 위해서는 대상의 성질에 대한 밀도 높은 직관도 요구되지만, 매재媒材의 물성에 대해서도 예민할 필요가 있음이다. 화면들이 촉촉하게 물기를 많이 머금어 생기가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물기의 농담은 대상의 생기만이 아니라 그림이 그림답게 하는 생명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식물 소재의 그림을 삽화적인 가벼움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를 작가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우주이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의 술회처럼 지구라는 작은 무대, 그 속에서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을 통하여 또 다른 우주를 만난다. 마당에 물을 뿌리고 싸리 빗자루로 붓질을 하듯 캔버스 위에 돌가루를 바르고 붓을 든 아침마다 순백의 영혼이 다가와 지친 마음을 정화시켜 줌으로써 나만의 우주가 펼쳐진다.
- 작가노트 중

 

 


이재언
미술평론가. 2015 평창비엔날레 예술감독 역임. 〈도시미학〉 대표 역임. 인천아트플랫폼 관장 역임.

 

 

* 《쿨투라》 2022년 4월호(통권 94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