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태평양 건너 작은 섬에 전하는 인사: 독도화가 권용섭을 한국으로 보내며
[INTERVIEW] 태평양 건너 작은 섬에 전하는 인사: 독도화가 권용섭을 한국으로 보내며
  • 김준철(미주문인협회 회장, 본지 미주특파원)
  • 승인 2022.04.01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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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것들은 쉽게 잊힌다.

  2000년 전후, 전 국민의 관심거리가 되었던 뜨거운 감자. 우리나라 지도를 마주하면 오른쪽 끝자락에 흘깃 보이는 섬. 바로 독도이다.

  세인들에게 뜨거움은 어느새 익숙함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2000년도부터 끊임없이 독도를 화폭에 담고 알리는 화가가 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 LA에서 말이다.

  독도 화가 권용섭!

  이제 그는 LA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랑하는 섬에 더 가까이 가게 된 그를 만났다. 

김준철(이하 준) 안녕하세요. LA에서 여러 화가나 작가를 만나면서 종종 권 선생님 말씀을 들었는데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권용섭(이하 권) 그러게요. 그래도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오늘 저와 인터뷰하시고 3일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실 텐데 귀국준비는 다 하셨나요?

2004년, 미국에 들어와서 여기를 기반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이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마음은 가볍습니다. 물론 그동안 그린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또 무겁게 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바쁘신 중에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돌아가시는 지금, 처음의 시간에 대해 먼저 여쭤보겠습니다. 독도에 관심을 가지고 처음 그리기 시작하신 건 언제쯤인가요?

2000년도에 KBS 방송에서 일본 모리 총리가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발표하는 것을 들었을 때부터였죠. 물론 당시 주변에서는 여러 과격한 집회나 데모에 동참하기를 권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것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문화적 운동을 해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 그럼 그때 처음으로 독도와 인연을 맺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사실 젊은 시절에 군대 가기 전, 친구들과 독도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나 하고 싶어서 독도를 그리기로 한 것이었죠. 그게 1977년이었습니다. 6명의 친구가 독도로 향했는데, 가는 중에 사고로 4명이 죽고 저와 한 친구만 겨우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독도에 안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그리고 그렇게 잊었던 독도가 2000년 방송을 보면서 다시 떠올랐고, 그것을 소명calling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어쨌든 그럼 독도를 그리기 전에도 계속 그림을 그리셨군요.

네. 사실 제 소망은 한국 산수화의 맥을 잇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실경산수 화가로 현장에서 빠르게 그림을 그리는 쪽입니다. 한국 화가들이 중국 산수를 보며 그림을 그려내는 그것이 아주 안타까웠죠. 그래서 저는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일찍 금강산이 개방되었을 때 두 번째 금강산에 들어가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독도 화가라는 이름 전에는 금강산 화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럼 독도를 지금도 그리시는 이유가 뭘까요?

사실 지금은 그냥 제 일부처럼, 일상처럼 생각되어서 딱히 어떤 대단한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독도를 많은 국민에게 또 나아가 세계인들에게 우리 것이라 알리고 싶은 열정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독도가 가진 모습 그 자체의 가치인 것 같습니다. 300m 안팎의 이 작은 섬은 그야말로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묵화 실경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양하고 다채로운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보물인 거죠.

사실 저는 선생님과의 인터뷰 전에 쉽게 생각하기를, 유행처럼 독도를 그리는 분이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니 그 무엇보다 화가로서 완성도 있는 수묵화를 향한 열망이 더 뜨거운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럼 독도 화가라는 닉네임으로 어려움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우선 독도라는 프레임에 본의 아니게 갇히게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소재가 국한되어지는 부분 역시 무시할 수 없고요.

그러네요. 하지만 결국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그 그림을 보는 대상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해 충분히 감내해야 할 부분이기도 할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독도를 그리게 된 것도 또 지금까지 그리고 있는 것도 그냥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흐름이 애국 화가 같은 프레임과 연결되면서 크고 작은 행사에 무조건 참석해야 하고 또 많은 곳에서 작품 기증 압박을 받게 되더라고요. 뭐 그 역시 장단이 있으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독도 화가라 불리게 된 시점은 언제쯤인가요?

2000년 그렇게 독도를 그리기 시작했고 곧 전시회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독도 그림 전시를 원치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일 공동어업 협정이라고 쌍방에서 독도 공해상에서는 어업을 하지 말자는 말도 안 되는 협정도 맺었고, 가능한 외교 문제로 번지지 않도록 독도 언급이나 독도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을 조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서울 경찰청에서 전시회 관련 요청이 들어왔고 언론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호돌이 미술관’ 개관기념전에 독도 그림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히 언론에 노출이 되었고 그 후로 금강산 화가에서 독도 화가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국가의 처사였네요. 이해할 수도 없는…. 독도 화가로 불리는 소감은 어떠신지요?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정말 제가 원하는 이름은 ‘수묵속사가’ 입니다. 그것은 한국화에 대한 자부심이자 세계를 돌아다니며 받은 수묵화의 월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화의 기초가 되는 스케치나 회화 등은 사실 르네상스를 지나며 국가의 전폭적 지지로 이루어낸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한국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도공이라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그 위치 자체가 말할 수 없이 낮았죠. 하지만 수묵화는 한 번의 터치로 그 명암이 10도를 넘나들 정도로 깊으며 그 안에 담기는 추상과 철학은 말 그대로 심상 예술의 최고봉이라 생각합니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한국에서는 어느새 학교에서도 한국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일본은 그 오래전, 우리나라에서 도자기를 가지고 가면서 철강을 시작했고 그 기초로 무기까지 만들어 냈는데…. 한국은 전 세계인이 탐내는 한국화 자체를 없애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입에도 잠깐 언급했었는데 한국으로 나가신다고요?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게 되셨나요?

네. 방금 언급했던 한국화의 퇴보를 막아보려는 마음이 일조했습니다. 제가 고국을 떠나 수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역시 한국이라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돌아다니며 그린 여러 나라의 풍경도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고요.

특별히 계획하신 일들이 있으신가요?

포천에 사택이 있습니다. 거기에 제 갤러리가 있습니다만 제 목표는 올해 안에 서울 인근에 ‘독도미술관’을 개관하는 것입니다. 아직 부지선정을 못 했지만, 곧 진행될 것 같습니다. 처음 독도 그림을 그릴 때는 많은 이들로부터 외면당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서 관심을 가져주시고 후원도 해주시고 자꾸 불러주시네요. 또한 ‘독도미술관’ 옆으로 저와 비슷하게 역이민하시는 분들을 위한 ‘역이민촌’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3월 중순이면 한국에 계실 텐데요. 저희 《쿨투라》 독자분들이 선생님 작품을 보려면 언제쯤 가능할까요?

현재 공식 일정으로 잡혀있는 것은 오는 4월 28일 장좌도에서 통일기원 수묵 퍼포먼스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90m의 긴 화폭에 목포에서 서울, 서울에서 신의주를 연결하여 그리는 것입니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포천 저희 집 역시 ‘독도 화가의 집’이라는 작은 갤러리로 운영되고 있으니 포천에 오시면 한번 찾아와 주십시오.

정말 큰 의미의 큰 퍼포먼스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왠지 권 선생님이 꿈꾸시는 다른 소망이 있을 것 같은데요.

하하하…. 사실 그 무엇보다 그동안 참 많은 스케치를 해왔습니다. 그 분량이 어느새 300권이 됩니다. 이젠 그만 돌아다니고 화실에 앉아서 한 장의 화폭에 전신의 힘을 쏟아서 담아내는 수묵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인터뷰 내내 이 답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쿨투라》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주시죠.

요즘 곳곳에서 사람들은 만나보면 다들 어렵고 각박해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20여 년의 해외 생활 속에서도 한국이 지닌 예술적 가치, 그 아름다움과 문화적 깊이는 자부심을 느끼시기에, 충분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하셨고 우리에게는 창작이라는 능력을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포천에 있는 ‘독도 화가의 집’에서 뵙겠습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식사한 후 악수를 청했다. 오래 계셨는데 이제야 만난 것이 아쉽기만 했다. 큰 형님의 조곤조곤한 말투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국 예술을 향한 열정과 자긍심은 인근에서 자주 만나며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게 했다. 하지만 이제 사나흘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간다니 서운한 맘 그지없었다. 하지만 긴 여행을 마치고 고국에서 다르면서도 같은 꿈을 꾸고 끊임없이 만들어갈 그의 창작품들을 기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작고 소소한 것들이 더욱 분명하게 보이고 또 그 본연의 색으로 존재하며 함께 어울리는 곳이 되기를! 그리고 부디 어쩌면 낯선 고국의 품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가 만나는 풍경만은 그를 더욱 크고 넉넉하게 안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준철
《시대문학》 시부문 신인상과 《쿨투라》 미술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꽃의 깃털은 눈이 부시다』 『바람은 새의 기억을 읽는다』가 있음. 현 미주문인협회 회장 겸 출판편집국장. 《쿨투라》 미주지사장 겸 특파원. junckim@gmail.com

 

* 《쿨투라》 2022년 4월호(통권 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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