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Theme] AWARDS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수상자 유계영 시인
[2월 Theme] AWARDS -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수상자 유계영 시인
  • 전철희(문학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3.22 1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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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시의 쓸모

 

 유계영은 2018년에 두 번째 시집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를 출간했다. 해설이나 발문 대신 저자의 산문을 얹어놓은 책이었다. 그 산문의 제목은 「공장 지나도 공장」이었는데 시작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나는 공장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이다. 과장은 좀 보탰을지언정 비약이나 은유는 아니다. 나는 공장의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장도 생략도 포기한다는 뜻이다.” 이 대목 정도에서 독자들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에세이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공장에서 비롯되고 공장의 여자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니면 이 글은 그저 시인이 창작한 허구(fiction)일 뿐인가,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런 글을 시집의 말미에 삽입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시인은 글이 끝날 때까지 이런 질문에 명확히 답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썼는지를 앞의 인용문에서부터 명시해두었다. “과장도 생략도 포기”하고 “비약이나 은유는 아닌” 언어를 묵묵히 옮겨내겠다는 것.

  어쩌면 이 진술은 유계영의 시가 지닌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요약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다양한 비유들이다. 그 비유는 세련되고 화려한 언어적 수사가 아니며 관념이나 감정 따위를 모사하기 위한 도구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2019 오늘의 시》로 선정된 「미래는 공처럼」의 경우에도 그렇다. 이 작품이 무슨 ‘의미’를 가졌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경쾌하고 즐거운 자”는 누구인지를, 그가 왜 “가장 위험한 사람”인지를, 왜 중간에 갑자기 “그림자놀이”와 “메추라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따지는 것은 사실 별로 의미도 없다. 유계영의 시에서는 ‘의미’보다 ‘이미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시를 통해 ‘무의미’한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일에만 골몰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것은 항상 어떤 감각을 자아낸다. 가령 「미래는 공처럼」의 전반부에서는 황급히 떠나는 사람과 미래를 던져버리는 메추라기의 모습이 부각된다. 혹자는 이 부분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형상화해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작품의 후반부는 “경쾌하고 즐거운 자”가 “미래를 공처럼” 굴리는 광경을, 그리고 (‘공’으로 비유된) 미래가 “잘 마른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이 대목은 독자로 하여금 미래를 경쾌하게 받아들이는 낙천적 태도가 강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유계영은 시에서 ‘마술적’이거나 ‘환상적’이라 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정제해놓을 뿐인데, 그 이미지는 독자에게 실재하는 감각을 부여하고 현실의 어떤 측면에 대해 사유하게끔 유도한다. 그녀는 어떻게 이런 시를 쓰는 걸까. 시인을 직접 만나서 답을 구해보았다.

 

전철희(이하 전) : 유계영 시인님의 시 「미래는 공처럼」이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 최고작으로 뽑혔습니다.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유계영(이하 유) : 별안간 이런 일도 있네요. 재야의 고수로 남겠다는 꿈이 좌절된 것도 아니고, 제가 뭐라도 된 것은 아니지만, 기왕 칭찬받은 김에 힘닿는 대로 열심히 써서 더 많은 칭찬도 받아보고 싶습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아무런 말이나 하고 있습니다. 동료 작가들의 힘을 빌어 받게 된 상이라는 점이 매우 특별합니다. 제 시를 손꼽아준 분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도 시 쓰는게 정말 좋고 재미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을 계속 할 뿐인데 칭찬을 받으니 시가 더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전 : 어린 시절에는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합니다.

유 : 저는 비밀이 많은 어린이었습니다. 또 제 비밀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어린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비밀은 대개 창피하거나 나쁜 짓인 경우가 많아서 말하기 어려웠지만, 말하기 어려운 것을 애써 말하는 즐거움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비밀부터 털어놓으며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비밀이라는 밀실 안에서 돈독해지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친구가 제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문이 없는 줄 알았던 밀실에 몰랐던 문이 생기고, 그 문으로 다른 사람들이 초대되는 것이 좋았습니다. 엄청 외로웠던 모양이에요.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전 : 저는 시인님의 작품에서 독창적인 상상력을 보면서 놀란 적이 많은데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상상력이 유년기부터 골똘하게 내면을 응시하면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별히 좋아하거나 영향 받은 시인이 있는지요?

유 : 제 마음은 가볍고 얕아서, 좋아하는 시인이 무척 많았습니다. 학창시절에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 순으로 시집을 쭉 따라 읽었었는데요. 손에 잡았던 시집과는 다 한 번씩 사랑에 빠졌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대신 금방 벗어나는 편이기는 합니다. 너무 모범적인 답변이라 민망할 정도인데, 읽었던 모든 시집이 자양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도 특별히 오랫동안 사로잡혀있는 시인은 프랑스 시인 앙리 미쇼Henri Michaux와 외젠 기유빅Eugene Guillevic입니다. 다른 시인들의 시는 제 영혼을 통통하게 살찌웠다면, 이 두 시인의 시는 제게 도대체 영혼이라는 것이 있기나 했는지 되묻게 만들었습니다. 책 읽기를 통해 충격에 휩싸이는 것은 드문 행운이기 때문에 사랑이 오래 가는 모양입니다.

전 : 이전의 글들에서 앙리 미쇼와 외젠 기유빅을 인용하셨던 것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 둘 다 환각(환상)에 가까운 것을 담대하게 표현하는 시인들인데, 그런 측면에 끌리고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시인님의 시에서도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자주 나오니까요.

 《2019 오늘의 시》 수상작 「미래는 공처럼」의 경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미래(시간)를 공(사물)에 빗대 표현한 것이 이색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시인님은 이전에 발표하신 작품에서도 공과 시간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거나 죽음-시간에 대한 사유를 드러낸 적이 있지요. 그럼에도 「미래는 공처럼」은 손에 잡힐 것 같은 시각적 풍경을 제시한다는 점이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창작한 동기가 궁금합니다.

유 : 너무 객쩍은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제가 개와 함께 사는데 이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중에 빨간 고무공이 있습니다. 제가 멀리 던지면 개가 쫓아가서 물어다주고 그러면 저는 다시 던집니다. 또 쫓아가서 물어옵니다. 반복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동안 이 빨간 고무공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개가 가구와 가구 사이를 들여다보면서 낑낑 우는 겁니다. 개가 귀신을 본다더니 정말인가 싶었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고요. 그 틈에 빨간 고무공이 있었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고개를 휙 돌려보면 마른 나뭇가지에 꽃이 피어있어요. 우리가 시선을 주기 바로 직전 순간에 개화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갑자기. 사실은 조금씩 변하고 조금씩 움트고 있었던 것일 텐데 말입니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잊으면 시간도 고여 있는 것 같습니다. 쫓아가려고 하면 자꾸 달아나고요. 자꾸 멀리 던져지기만 하던 빨간 고무공이 가구 틈에 처박혀 완전 잊혀진 것처럼요.

전 : 개 장난감과 관련된 시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요.(웃음) 저는 이 작품이 ‘미래’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작품이라고 읽을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 덧붙여 물어보겠습니다. 시인님의 작품에서는 비유(이미지)와 메시지가 유기적으로 조합된 경우가 많은데요, 시를 쓸 때 메시지(내용)와 비유(언어) 중 어느 쪽을 중시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유 : 제가 시 쓰기를 오랫동안 재미있어 할 수 있었던 것은 내용에 대한 강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메시지의 세계가 힘듭니다. 독자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도 없고 그런 욕망도 좀처럼 생기지 않아요. 혼자서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엄청난 무력감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일상의 말하기는 대부분 메시지 위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시에서 만큼은 메시지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시의 쓸모라면, 시의 언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메시지 없는 것의 메시지가 제가 쓰고 싶은 시의 메시지랄까요. 따라서 시에서는 느낌·감각을 따르는 편입니다. 알레고리가 대신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 그 자체가 총체적인 느낌으로 출렁거리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시에서 어떤 메시지가 감지된다면 그것은 제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읽는 사람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 : 답을 듣고 보니 어리석은 질문이었던 것 같네요. 시에서는 언어가 전달하는 감각 자체가 메시지일 것인데, 저는 무리해서 그 둘을 분리시키고 어느쪽이 중요한지를 양자택일하라고 한 것이니까요.

 사실 「미래는 공처럼」도 ‘메시지’가 명확한 작품은 아닙니다. 이 작품의 앞부분에서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자 “경쾌하고 즐거운 사람”인 누군가가 불현듯 등장하고, “그림자놀이”와 “메추라기”의 이야기가 제시됩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는 ‘미래’라는 추상적 개념이 공과 새(메추라기)의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되지요. 그렇게 통통 튀듯이 전개되는 이 작품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각각의 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배열해냈기 때문입니다.

 한데 어떤 독자들은 ‘의미’가 해독되지 않은 시를 어렵게 느끼고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독자들이 시인님의 시를 읽을 때 어떤 점에 주목하 고 어떻게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유 : 해독되지 않는 시를 어려워하는 것은 아마도, 문학작품을 읽는 행위에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독서는 힘든 것이니까요. 힘들여 읽었으니 남는게 있어야 해요. 그런데 해독이 되지 않으면 남는 게 없다고 여겨지겠지요. 시간과 품이 아까우면 안되니까 어떻게 해서든 의미를 찾고 싶고,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제가 시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의미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는 좀 너무 진지한 것 같지만…… 우리가 발붙인 세계는 길고 따분하며, 혹은 비참하고 슬프기 때문에, 잠시 다른 세계로 한눈을 팔아보는 겁니다. 조금 다른 질서의 세계 말입니다. 언어적 관습만 벗어나도 사고나 감각에 긴장이 생깁니다. 저는 그것이 좋아요. 제가 하려는 감각의 탈주가 독자들에게도 일말의 해방감을 남긴다면 좋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시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불평만 남는다면…… 시 읽기를 통해 잠깐이나마 어리둥절해진 것으로 시의 목적을 다 이뤘다고 말하면 안될까요? (웃음)

전 : 시인님의 작품을 ‘무의미 시’라고 지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웃음) 「미래는 공처럼」의 경우만 봐도 실감나게 형상화된 이미지들이 독자들의 감각이나 사유를 자극할 만한 매개체가 될 만한 힘이 있거든요.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발설하지 않으면서 독자가 무엇인가를 느끼게끔 만드는 것이 시인님의 작품이 지닌 매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조금 더 가벼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때 시를 쓰시나요?

유 :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쓰는 건 마감이 있을때만.(웃음) 그래도 저는 늘 시 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겁니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시의 자장 안에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밥먹고 아 맛있다, 친구들이랑 농담하면서 아 웃기다, 귀가하면서 아 피곤하다, 그런 무감함의 상태로 있다가 이제부터 시를 써보자 하고 책상 앞에 앉잖아요. 그럼 당연히 뭘 써야 되는지 모르게 됩니다. 일상 속에 시라는 중심축을 세우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만진다는 기분으로 지내면 시는 곳곳에서 튀어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메모해두었다가 어느정도 감각과 사유의 맥락이 모아지면 한 편의 시로 만들어보는 것입니다. 시 쓰기의 규칙 같은 것은 제게는 이게 전부인 것 같습니다.

전 : 마지막으로 2019년의 계획이나 이후에 시인으로서의 포부 같은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유 : 2019년에 세 번째 시집이 나올 계획입니다. 새 시집이 나오면 또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그 애씀도 즐거울 것입니다. 저는 시가 개별적인 발버둥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보려는 발버둥. 오늘 태어난 존재처럼 세상을 희한스러워하려는 발버둥. 앞으로도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보기 위해서 바쁘게 발을 놀려야겠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발놀림만 바빴으면 좋겠습니다. 시민으로서의 포부를 여쭈셨으면 다른 대답을 했을테지만, 시인으로서의 포부를 여쭈셨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생활의 밀도는 일하는 날이 일주일에 사나흘을 초과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머지 날에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싶습니다. 일어나서는 슬렁슬렁 개를 산책시키고 싶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밥을 입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먹고 싶고, 그것도 천천히 꼭꼭 씹어 먹고 싶습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일이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공원 벤치에 오래 앉아 어린이들, 새들, 구름들, 나무들, 개들, 노인들, 꽃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소리 내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러다 별안간 뭐가 떠올라 메모하고 잠깐만 뿌듯하고 싶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서 뭐하고 지내는지 물어오는 말에 계면쩍지 않고 싶습니다. 이중에 몇 가지는 포기하게 될 때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고 싶습니다.

전 : 바라는 모든 것들이 이뤄지는 한 해가 되길 바라겠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셔 감사합니다.

유 : 감사합니다.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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