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AWARDS] 2019년 한국 시의 미학
[2019 AWARDS] 2019년 한국 시의 미학
  • 유성호, 홍용희, 나민애, 전철희
  • 승인 2019.03.22 17: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성호

: 안녕하십니까? 오늘 좌담은 지난 한 해동안 펼쳐졌던 우리 시의 동향을 개괄적으로 점검하고, 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시집들을 큰 틀에서 검토함으로써, 현재 우리 시의 지향이랄까 좌표랄까 하는 것을 성찰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우리 평단에서 가장 활발하고 역량 있는 현장 비평을 해오신 세 분의 선생님을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최근 한국 시단은 내외에서 활력과 모순이 함께 점증했고, 문학장 전체의 지각변동이 숱하게 일어난 것 같습니다. 지난해에는 중견에서 중진을 포괄한 층위에서 활달한 자기 성취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시’에 선정된 시와 시집의 목록을 살펴보면, 중진과 중견과 신진 시인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씩 이야기해보지요. 먼저 홍용희 선생님께서 오봉옥과 홍일표의 시집부터 이야기 해주시겠습니까?

 

중진 시인들의 시세계

홍용희

: 오봉옥 시집 『섯!』의 정조는 따스하고 유순합니다. 젊은 오봉옥이 『붉은 산 검은 피』에서 보여주었던 작열하던 한낮의 태양이 해거름의 노을처럼 온유한 빛을 띠고 있습니다. “더는 혈관 속 피처럼 뜨겁지 않고/더는 칼날처럼 날카롭지”(「나에게묻는다」) 않다는 것이지요. 어째서 그럴까요? 이에 대해 오봉옥은 세상은 거대 혁명보다 “사소하거나 거룩한”(「사소하거나 거룩한」) 일상사에 대한 인식의 눈뜸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시집 전반에 걸쳐 지극히 사소한 것이 지극히 거룩한 것이란 걸 평명한 필체로 꾹꾹 눌러쓰고 있습니다. 매연에 지는 꽃을 보며 가슴 아파하고 “늙은 엄마 이부자리 살피듯 땅을 다독거리”는 “정신지체아 최성일” 씨에게서 “성자”(「성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종이컵을 들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걷던 노인이/길거리에 게워놓은 토사물을 보더니 주저 없이 앉아 “쓸어 모”(「아름답다는 거」)으던 모습에서 미국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작고 사소한 일상사에서 발견하는 거룩하고 신성한 얼굴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함께 살자”는 화두로 수렴됩니다. “분노의 주먹이 날아가서 하는 말/통한의 눈물이 세상을 적시며 하는 말/(…)/간절한 촛불이 흔들리며 하는 말/함께 죽자고 외치기 전에/마지막으로 해보는 이 말”이 바로 “함께 살자!”라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사는 관계, 양식, 문화가 궁극적인 삶의 지향인 것이지요. 물론 그의 이러한 “함께 살자”의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나비”와 같은 미물을 포함한 자연물까지 포괄됩니다. 그래서 “자동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허공을 가른다/저 허공이 나비들에게 준 신의 선물인 줄도 모르고”(「인간들」)와 같은 천진스런 동화적 상상을 노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함께 살자”는 생활 철학의 내면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에 대해 오봉옥은 “어부”는 바다를 닮아가고 “산 사나이는” 산을 닮아가고 “농부는 땅을 닮아가다 땅이” 되어가는 삶을 충실히 살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봉옥의 시적 삶의 바탕에는 사람은 땅을 닮고 땅은 하늘을 닮고 하늘은 도를 닮고 도는 자연을 닮는다는 노자가 설파한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의 원리가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홍일표의 『나는 노래를 가지러 왔다』는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노래란 부르는 것’이라는 명제가 슬쩍 비껴가고 있습니다. 그의 이번 시집의 창작 방법론은 대체로 이러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경주」란 시편의 한 대목을 볼까요. “무덤이 보이는 방에서 여자는 자기 그림자를 바라봅니다/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몸속을 빠져나간 그림자는 알은체를 하지 않습니다//방안을 들여다보던 햇살들/자주 목이 말라 까맣게 타버린 쌀알같은/악몽이 되겠습니다 익숙하게” 주술 관계의 문법적 구조와 관습적 어법이 이완, 균열, 해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 “그림자”, “악몽”, “햇살” 등이 인과관계의 긴밀성과 무관하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통합된 주체가 분열된 주체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체란 의식/무의식, 현실/초현실, 이성/욕망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언어란 본래 대상을 반영하는 투명 매체가 아니라 자의적인 왜곡과 굴절의 속성을 지닌다고 불신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처음부터 단일하고도 고정된 의미를 향한 집중성은 부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작 방법론은 롤랑 바르트가 전언한 의미가 아니라 의미화 과정의 전달이 문학 텍스트라는 주장과 상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편은 명징성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러나 다양한 상대적 의미, 가치, 성격 등의 역동을 추적하고 전달하는 효과는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홍일표의 이번 시집의 특이성은 이러한 창작 방법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시편들은 독자들을 알 수 없는 미로로 끌고 들어가는 흡입력을 지닙니다. 그것은 “소유주도 등기부도 없는 오래된 공터”(「드라이아이스」)를 마련하여 독자들의 상상을 동참시켜나가는 열린 힘으로 해석됩니다.

 

유성호

: 다음으로 나희덕, 박라연 시집으로 가보겠습니다.

 

전철희

: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에는 ‘201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수상작이었던 「종이감옥」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작품에서 시인은 “종이감옥”에 유폐된 시의 언어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한데 종이 속에 갇힌 활자들의 처지에 관한 모사는, 또한 흡사 골방에 틀어박혀 고독하게 시를 써야만 하는 시인의 모습 자체를 비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나희덕 시인이 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독한 사유를 이어왔다는 사실을 능히 증명해낼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편 ‘감옥’이라는 단어도 눈여겨볼 만한데, 시가 세상에서 유폐되어 있는 것이란 인식은 새삼스러운 것이 못되지만, 시인이 이런 단어를 비유로 차용한 것은 갑갑한 세상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만했습니다. 실제로 이 시인은 지난 정권 시기에 사회 비판적인 작품을 자주 발표하고 종종은 직접적으로 현안에 대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기에 쓰인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는 이번 시집은, 따라서 한 명의 시인-시민이 언어를 통해 감옥과 같은 세상에 응전한 양태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물론 나희덕의 작품은 이전부터 외따로운 정서를 기조로 하면서도 어디론가 나아가려는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연민과 공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파일명 서정시』 또한 그런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번 시집만큼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첨예하게 가시화된 경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세월호에서 희생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몇몇 수록 작품들은, 미증유의 비극을 어떻게 언어로 현현할 수 있을지에 관한 시인의 고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시대의 증언이 될 만한 것이거니와, 자신만의 서정적 시세계를 펼쳐오고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을 가진 시인이 다다를 수 있는 미학의 극점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서도 주목할 만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민애

: 저는 박라연 시집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시집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는 2009년도에 출간된 시집 『빛의 사서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빛의 사서함』은 ‘화단’과 ‘호미’와 ‘식물’로 요약되는 시집이었죠. 그리고 이후에 나온 『공중 속의 내 정원』이라든가 『노랑나비로 번지는 오후』 역시 화단의 노정에 관계된다는 점에서 박라연 시인은 지속적으로 자기 세계를 진척시키는 과정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박라연 시집을 일종의 ‘손’으로 봅니다. 최소 10년 이상 박라연 시인은 호미를 잡았고, 식물을 심었고, 키웠고, 과정과 결과물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가이면서도 시인의 손은 곱지만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시인은 체험된 직접성과 언어, 상상력과 희망이 한데 섞여 있는 화단을 시집을 통해 구현하는 거죠. 그러니까 박라연 시집이란, 정원사의 손과 문학가의 손이 결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손위에 무엇을 담아 오느냐에 따라 시집의 색채가 달라집니다. 이전에 박라연 시인의 작품 세계를 ‘꽃의 시학’ 혹은 ‘식물의 시학’이라고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시학의 지향성은 스스로와 타자를 위로하고 살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시인이 키운 생명의 꽃들이란 강한 인간인 내가 약한 너를 살려주겠다는 시혜적 보살핌이 아니라, 약한 인간인 내가 더 약한 너를 통해 오히려 구원받는다는 위무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었죠. 식물 키우기의 과정에서 탄생한 시세계는 이제 그 결과물을 다루는 상태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이번 시집은 화단의 결과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인이 화단에서 받은 씨앗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이번 시집의 변화는 나무 이름, 꽃 이름, 식물의 생태가 식물계에서 멀어지고 대신 인간계에 가까워진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수선화가 진 옆자리에는/튤립 가족이/그날의 목단이 진 옆에는 양귀비 가족이//풀벌레와 새소리가 진 그 옆자리엔/이웃집의 아들딸이 피어나고 꽃다운 세상의/남매들이 피어나고 꽃다운 세상의/남매들이 꿈꾸는/세상의 밥상엔 공평 의리 사랑이란/의미들이//구체적으로 차려져서 즐겁게 설거지하는/진풍경이 피어나고/정현, 정민이네처럼 잘 풀리는 부러운 집이 또 있을까”(「옆구리」) 이런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식물의 이야기는 정작 식물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대신 사람의 삶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은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인의 세계에서 식물의 초록 내음은 옅어지고 그 자리를 인생의 파동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저는 박라연 시인이 나무 이름, 나비 날갯짓, 꽃이파리 등과 같이 아름답고 소리 없으며 정적인 대상을 통해 고통의 내면을 미학적으로 풀이하는 시들을 고평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가 더 추상화되어 내면으로 파고들거나, 아니면 더 구체화되어 외부로 나오든가 변화가 언젠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해오기도 했습니다. 이번 시집은 변화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중견 시인들의 시세계

유성호

: 이제는 한국 시의 중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로 가볼까요? 이분들의 성취는 한국 시의 자산을 예감케 한다는 점에서 퍽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먼저 홍용희 선생님께서 이영광과 이대흠의 시집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시지요.

 

홍용희

: 이영광의 『끝없는 사람』은 의표를 찌르는 역설의 어법으로 “사실”(「사실은」)과 “궁리”(「궁리」)의 한 경지를 깨워내고 있습니다. 그는 “가장 확실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사실은,/살아 있지 않다는 느낌이라는” 역설적 인식을 바탕으로 “희망은 좀체 입 밖에 내질 않는데도/아픈 시간들은 그걸 온통 썩게 하고/썩은 시간들은 다시 그걸 낱낱이 아프게”하는 과정들을 내밀하게 “궁리”해 내고 있습니다. 역설적 인식은 이처럼 반대일치의 긴장과 상호 모순의 통합을 기반으로 하지요. 그래서 “반은 잡상인이고/반은 유령이고/반은 외계인”인 나를 동시적으로 입체적으로 규명하여 조망할 수 있습니다. “절반인 죽음이 살아있기라도 한 듯/검은 동공을 열고/화면 속 죽음들을 본다/그곳으로 눈물이 난다”고 전언하는 대목은 이영광만의 깊고 탁월한 시적 직시이고 묘사라고 할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역설적 혜안은 시집 도처에 은은하게 눈부신 아포리즘을 펼쳐 놓습니다. “속된 게 싫은 속이요만”(「단 두 줄」), “쥐 살림에, 희망 밖에 무엇이 있었겠는가”(「덫」), “가서, 무인도의 밤 무인도의 감옥을,/그 망망대해를 수혈 받고 싶다”(「무인도」), “병원 밖으로 나가본다/병원이다”(「병원」), “마음의 몸을 찌르려고 몰려온/웃는 몸들을 보았다”(「마음 2」) 등등이지요. 특히 그의 이러한 아포리즘의 눈부심은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도금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그늘과 사귀”(『그늘과 사귀다』)면서 “아픈 천국”(『아픈 천국』)을 살아본 체험적 삶의 지층에서 나오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어두울수록 은하가 더욱 눈부신 이치라고나 할까요.

 이대흠의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은 남도의 삶의 풍속과 정서를 생생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만나기 어려운 고유한 지역적 장소성이 시적 중심음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그가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이마에서 북천의 맑은 물이 출렁거린다”(「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라고 노래하듯, 장소성은 대체로 그 지역 사람의 원형질을 이루지요. 이대흠의 이번 시집의 “이마”에는 그가 낙향하여 터를 잡고 사는 장흥을 중심으로 한 생활 풍속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천관산과 탐진강 줄기를 따라 군락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하염없이 질박한 풍경이 새삼 탈속적인 청정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장흥의 장소 미학은 우선 그 생활 언어에서부터 배어나옵니다. “장흥에서 자웅으로 가는 데는/십년이 족히 걸리고/자웅에서 또 자앙, 장으로 가는 데는/다시 몇십년이 걸”(「장흥」)린다고 합니다. 지역 방언의 미묘한 층위는 곧 지역의 재래적인 삶의 내력과 굴곡의 화석이라는 것이지요. 마치 우리 나라의 다기한 색상의 표현처럼 언어의 다채로운 무늬 결이 삶의 다양한 표정들이라는 것이지요. 특히 남도의 생활 언어는 기묘한 멋과 맛을 감칠맛 나게 담고 있습니다. “널평네 양반 돼지 한 마리 팔고 오는 길에” 외상값 등의 돈을 지불하는 말들에 잠시 귀 기울여볼까요. “줘불고/쥐아려불고/개러불고/갚어불고/지와불고/죽에불고/사불고/볼라불고/일끼레불고/짤라불고/지갑 열어불고/풀어불고/조마니 돈 털어불고/까묵어불고”. 어떤 시적 조어보다 더욱 기발하고 오묘합니다. 이대흠은 누구도 갖지 못한 풍요롭고 싱싱한 시적 언어의 잔칫상을 늘 마주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어휘들은 기본적으로 남도의 비바람에 “푹 삭어사써”(「칠량에서 만난 옹구쟁이」) 나온 빛깔이고 향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대흠은 남도 생활 언어의 인간문화재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지역의 장소 미학이 중앙의 비인격적 삶의 제도와 양식을 충격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론은 무엇일까? 이대흠의 다음 시집은 이러한 문제에도 좀 더 골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유성호

: 다음으로 나민애 선생님께서는 이수명과 문태준, 곽효환의 시세계를 개관해주시지요.

 

나민애

: 이수명 시집의 제목은 『물류창고』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 구절이나 제목을 시집 제목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는 「물류창고」라는 제목의 시가 10편씩이나 들어 있어요. 같은 제목일 경우 뒤에 번호를 붙여서 구분하는데 이수명의 시집에는 번호도 없이 그저 ‘물류창고’라는 같은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만큼 ‘물류창고’가 지닌 의미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물류창고’라는 단어 외에도 “서기 2020년”(「물류창고」)이라는 말이 이수명 시집을 요약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이라는 단어는 과거의 SF소설들이 배경으로 삼던 혹은 묘사하던 시기입니다. 즉 불가사의하거나, 지극히 발달했거나, 혹은 지독히 디스토피아적으로 여겨지던 미지의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SF에서나 묘사되던 2020년이 드디어 1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현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복잡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며 혼란스러운 시기에 우리는 어떤 존재인 것일까. 이런 문제의식이 이수명 시인의 ‘물류창고’라는 단어에 담겨 있고요, 이 시집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호흡을 다 써버렸지//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물류창고」) 지금 읽어본 이구절은 시집에 실린 첫 번째 「물류창고」의 첫 연입니다. 상징적이지 않습니까. 지금 물신주의 시대의 주인공은 물건과 판매가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든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상품이 주인이 되고 인간이 소비되는 세상을 한 마리도 표현하자면 ‘물류창고’ 아닐까요. 근대의 세계는 어쩌면 ‘물류창고’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비판적 의식을 시인은 우리들에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거기서 우리들은 이미 ‘호흡을 다 써버렸다’는 표현 역시 이 시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잔잔하지만 기실 상당히 날카로운 문명 비판, 존재 성찰의 기조는 다른 시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을 벌써 잃어서/아무 일도 없어요/계속 오늘을 잃는다.//공이 허공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밤//위험해요”(「밤이 날마다 찾아와」) 이 작품을 봐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상실감, 허무함, 불안감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렇듯 시인은 상실의 시대를 엄혹하게 파악함에 더해, 그 안에 들어 있는 우리들 존재를 애상적으로 파악합니다. 이를테면 「나의 중얼거리는 사람」에 “나비는 이런 날을 처음 보았어요/비를 뚫고 갈 수 없어요/비는 길고 계속 길어서 모든 비가/이어져 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주저앉는 나비가 나오죠. 개별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현실의 시련이 ‘비’로 그려져 있어요. 물류창고가 되어가는 근대를, 물류창고의 비품보다 못해지는 인간 존재를 우리가 역행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이 시인은 작품을 이어갑니다. 이번 시집은 분명 문명 비판을 겸한 존재 성찰의 세계입니다. 문명 비판이나 존재 성찰이라는 주제는 근대문학 초엽부터 있어왔던 경향이지만 문명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나아가 우리의 현재 위치라든가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의 상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항상 새로울 수 있습니다. 이 시집으로 2018년 김춘수시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새로움과 천착 때문일 것입니다. 이수명 시집이 나올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항상 예상과는 다른 성격의 작품집을 탄생시켜요. 예전에 시인의 작품을 읽다가 접어놓았던 시가 있었는데 그 시 제목이 「이유가 무엇입니까」(『현대시학』, 2011. 4)입니다. 이 작품이야말로 이수명 시인의 원동력 혹은 근원적인 방식을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수명 시인은 늘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민합니다. 익숙한 것이든, 낯선 것이든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바로 이러한 고민들이 매번 새로운 작품집을 낳는 것 같습니다.

문태준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는 전통서정시의 계승이며 발전을 보여줍니다. 전통서정시의 계열이 오래된 것은 맞지만 마치 무형문화재처럼 그 흐름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태준 시인의 역할이랄까 위치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번 시집에서 놀라운 점은 서정시의 세계를 이어가고 있으면서도 구태의연하지 않다는 점, 한결같이 문태준의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지루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의 표현을 빌자면 워낙 ‘믿고 보는 문태준’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그의 새 작품집이 대중에게서도 좋은 반향을 얻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 감사한 일입니다. 이 시집을 읽으려고 들고 다닐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뺏기곤 해서 몇 번을 새로 샀는지 모릅니다. 현대적이며 전통적인 서정시의 세계가 여전히 힘이 있다는 것을 문태준 시인은 여러 번 확인시켜줍니다. 이번 시집을 가장 압축하는 한 편을 고르라면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겠습니다. 이 시여야 하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발로되는 서정의 근원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내 어릴 적 어느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로 시작됩니다. 시는 외는 것, 즉 노래로서의 음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이 처음 깨달은 것이 아니고 이전부터 있던 사실입니다. 나아가 시인은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를 떠내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아버지나 삼촌이 아니고 외할머니를 선택했습니다. ‘외할머니’보다 더 전통서정시에 가까울 수 있는 화자가 어디 있을까요. 시인의 이 선택은 오래된, 비켜난, 인고의 여성 화자에게서 우러날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서정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저는 문태준의 가장 좋은 시들을 적어놨던 목록에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집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시인이 왜 시를 선택했으며 하필 정서를 풀어내는 오래된 세계에 침윤해야 했는 지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운명론’이라고나 할까요. 시인은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거리며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기억이 바로 서정의 시작이었겠지요. 문태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를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수명 시인이 1994년에 등단했고 문태준 시인도 1994년에 등단했습니다. 이수명 시인의 시집과 문태준 시인의 시집을 나란히 놓고 보자니, 같은 연도에 등단한 두 시인의 서로 다른 세계가 다른 듯 닮음을 알겠습니다. 이수명 시인은 세계의 불투명성에 주목하고, 문태준 시인은 세계의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투명성에 주목합니다. 그러면서도 ‘있다’로 끝나는 서술어를 애호하는 점이 비슷하죠. ‘있다’는 서술어는 그저 있을 수밖에 없는, 그저 있음을 바라보는 선선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게다가 두 시인은 간결한 문장, 간결한 표현, 그 끝에 쓸쓸함이 묻어 있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물론 ‘쓸쓸’의 종류는 서로 다르지만 말입니다.

곽효환 시인의 시쓰기는 고고학적 탐사와 방법론적으로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북방에 관심을 두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경향이 원인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너는』는 ‘북방’이라는 특수성에 정하지 않고 그의 고고학적 관심사를 전방위적으로 펼치는 시집입니다. 역대 시인 중에서 곽효환 시인의 선조를 찾으라면 김동환과 백석이 되지 않을까요.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곽효환 시인은 민족적 동체라는 주제를 시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민족 공동체가 해체되어 상당히 희미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의 시적 방법론을 채택하는 것이 현명해 보입니다. 이런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곽효환 시인 역시 그가 담당하고 있는 경향이 개성적이라는 면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시집 『너는』의 풍경이 이전보다 섬세하고 다정하며 밝아졌지만 시인의 주제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이 시집은 결코 애정시나 연애시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너는』은 민족적 공동체의 고고학적 탐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집에서 택한 ‘너는’이 대체 누구냐는 점입니다. 사실 ‘누구냐’는 인칭보다는 ‘무엇이냐’는 존재의 질문이 맞는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가 시집에서 찾은 바에 의하면, ‘너는’ ‘돌’과 ‘마당’에 해당합니다. “돌의 뼈를 본 적이 있다 (…) 돌의 뼈대에는 단단한 시간의 문양이 있다/수많은 바람이 실어 오고 실어 간/풍경과 삶이 물결치는 세월의 무늬가 있다”(「돌의 뼈」) 이 시는 시집 가장 앞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알아보게 하죠.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이 누적된 삶의 흔적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믿고 증명하거나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돌의 뼈’를 찾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읽어내려는 자세는 제가 앞서 말한 고고학적 특징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돌’이란 응당 사전적 의미의 돌이 아닐 텐데요, 시인에게서 돌이라는 것은 일종의 원형, 핵심, 응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형성된 돌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마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처음이자 전부이고 마지막이었다/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곧 나였다//먼 아버지 적부터 연년이 이어져 내려오다/이제 놀이도 잔치도 예식도 사람도 사라지고/존재마저 희미해진 내 이름은……” (「마당 약전」) 이 시에서는 마당이 화자입니다. 마당은 사람들이 모이고 죽고 살고 사라지고 태어나는 모든 민족 역사의 터전 그 자체입니다. 문제는 마당은 지금도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점점 잊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의 탐색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오랜 과거가 쌓인 응축은 어디에 있는가. 에너지, 열정, 민족, 혼, 정서, 문화… 무엇이 되었든 마당의 지층은 분명 있다는 확신에서 이 시인의 시 쓰기는 의미를 얻습니다. 그래서인지 곽효환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의문문으로 끝나거나 탐색의 어미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꿈은 다 어디로 숨었을까”(「그 많던 귀신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든가 “다 어디로 갔을까”(「첫」) 이처럼 대체 어디에 있을까를 묻고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인에게 누대의 공동체가 지닌 의미를 탐색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암시하는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성호

: 전철희 선생께서 김언 시집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전철희

: 김언은 요 몇 년 사이에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보이고 있는 시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2018년에만 두 권의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1월에 상재한 『한 문장』과 3월에 펴낸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 그것입니다. 두 달 터울의 책인 만큼 속에 담긴 문제의식이나 스타일에서 큰 차이가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김언은 다작을 할 때에도 꾸준히 양작을 써내는 시인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런 세간의 평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두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두 권의 책 중 『한 문장』은 시집의 제목부터가 언어에 대한 시인의 메타적 관심을 보여줍니다. 김언의 이전 작품들이 그랬듯, 이번 시집의 수록작들 또한 일상의 경험을 가볍게 털어놓는 것처럼 느껴지는 덤덤한 서술 속에 언어와 세상의 관계의 통찰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김언의 시는 종종 ‘난해’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각각의 시편에 수록된 언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난해함’은 어느 정도 의도된 것입니다. 이 시인은 현실의 어떤 물상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도 저도 아닌 상태의 무엇인가가 부유하는 상태 자체를 표상하려고 합니다. 그의 언어에서 고정된 의미를 추출하기가 쉽지 않아진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명징한 문제의식을 독자의 감각에 육하게 만들 만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속의 단단하게 얽혀 있는 문장들은 독자의 사유를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이끌 촉매 역할을 할 만합니다. 이번 시집은 김언이 담대한 사유를 건조하고도 견고하고도 언어로 형상하는 재능이 뛰어난 시인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노작입니다.

 

신진 시인들의 시세계

유성호

: 이번에는 가장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로 가보겠습니다.

 

나민애

: 박준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는 슬픔으로 절망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지극히 ‘사람’적인, ‘사람’을 위한, ‘사람’의 시집이기 때문이죠. ‘사람’이라는 말은 ‘삶’이라는 말과 발음이 닮아 있지만 대체 그 닮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사람’이 대다수죠. ‘사람’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이 사람으로 풀어지지 않습니다. 이 막막함에 박준 시인은 깊이 공감합니다. 아니 스스로가 그 일부임을 보여줍니다. 곤란한 삶의 지경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버텨내는 과정을 몹시 서정적인 언어와 참신한 표현을 통해 보여주면서 개개인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이 시인의 장점이랄까 특징은 디테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설명, 상황에 대한 묘사가 없습니다. 이 디테일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상황에 대한 디테일을 읽는 이로 하여금 선택하게끔 합니다. 각자의 독자가 시의 장면을 자신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줍니다. 이를테면 시인은 “머지않아 날은/어두워질 것입니다”를 말하면서 이 날이 어느 날인지, 어디에 있는지, 상황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이로써 ‘어두워질 날들’은 모든 이들의 ‘어두워질 날들’로 확산될 수 있습니다. ‘이곳’과 ‘여기’를 말하면서 이곳이 충남 예산인지, 경기도 안성인지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해인사인지 불국사인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정서, 상황, 분위기를 전달해주면서 감정의 공감대를 극대화합니다. 이 공감의 극대화에 대해 예시를 들자면 「목소리」는 어떠한가요. “너도 그만 일어나서 한술 떠/밥을 먹어야 약도 먹지/병도 오래면 정들어서 안 떠난다//일어나 일어나요” 아파본 사람이 할 수 있고, 아픈 사람이 듣고 싶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말이 여기 들어 있습니다. 박준 시인은 ‘위로’의 시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의 위로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많은 독자의 공감대를 얻고 있습니다. 보다 시사적으로 보았을 때 박준의 이번 시집은 특화된 ‘슬픔시’계열의 현대적 변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단에서 ‘슬픔’이라는 주제의식은 몹시 강하고 오래된 뿌리 중의 하나입니다. 나아가 ‘슬픔’ 중에서도 ‘병든 슬픔’이란 시적 계열이 있어 우리 문학의 가장 절망적인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병든 슬픔’을 누가 발명하고 이어갔는지 생각한다면 이 계열이 소수이면서도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근대시를 넘어 현대시에 와서 기형도, 이성복, 최승자 등의 이름은 아직도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박준 시인의 이번 시집은 ‘병든 슬픔’의 계열에 놓여있으면서도 그 어조가 극히 절제되고 서정적이라는 면에서 새로워 보입니다. 그에게는 탄식이라든가 토로가 없습니다. 슬픔은 이미 일상이 되어 버렸기때문에 평범 곳곳에 깃들어 있는 것이지 굳이 탄식이랄까 토로로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박준시집에서 ‘병든 슬픔’은 일상의 깊은 슬픔, 혹은 넓은 슬픔으로 확대되어갑니다. 이 슬픔의 주제 선택과 변용은 슬픔이 만연해진 우리의 현실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에 더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철희

: 강성은의 『Lo-fi』는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시집입니다. 로우파이Lo-fi는 저음질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나쁜 음향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는, 가령 LP의 음원 같은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분명 그런 것을 듣다 보면 요즘의 하이파이Hi-fi 음악과는 다른 감성을 느낄 수가 있지요. 어쩌면 시인은 이 제목을 통해, 오늘날의 주류적 감각과 차별화된 보여주겠단 포부를 표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몽환적이면서도 독특한 표현을 덤덤하게 풀어내는 시인의 재능이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한데 강성은의 시가 환상적이거나 몽환적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까닭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차라리 그것은 세상의 균열을 그 자체로 보여주기 위한 방책에 가깝습니다. 흡사 카프카의 소설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듯 말입니다. 이전까지 강성은의 시집에서 돋보인 것이 독창적인 상상력과 담대한 서술 등이었다면, 『Lo-fi』는 그런 미덕을 계승하고 있으면서 작가의 세계관까지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 시집이라고 평할 만합니다.

『타이피스트』는 김이강의 두 번째 시집입니다. 이 시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순간적으로 현현하는 빛의 이미지입니다. 그 빛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종종 마주하는 아련한 추억이나 특정한 순간에 갑자기 엄습하는 독특한 감각적 체험 같은 것을 표상하는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김이강의 시는 그런 이미지들을 통해 금방 휘발될 수 있는 경험과 감각을 포착하고 가시화시킵니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환상적이고 약간은 초현실적인 느낌을 풍기기도 합니다. 아마 ‘현실적’인 경험을 모사하는 것만으로는 그런 미증유의 감각을 재현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겠지요. 한데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이 시인의 어조 자체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한 느낌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첫 시집 제목은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였습니다. 친밀한 친구나 애인을 청자로 상정한 것 같은 구어체 문장이지요. 이 제목이 암시하듯 김이강의 시는 흡사 누군가에게 건네는 다정한 전언의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내밀한 감각이나 농도 깊은 사유를 표상할 때에도 독자에게 친절히 말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런 언술적 형식은 이번 시집에서도 계승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타이피스트』는 다정다감한 어투로 현실에 틈입한 감각을 가시화시키려는 시인의 노력이 이채로운 빛을 발하는 시집입니다.

기혁의 『소피아 로렌의 시간』은 이지적인 시집입니다. ‘소피아 로렌’이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지금의 젊은 독자들에게 다소 멀게 느껴지는 배우의 이름을 시집의 제목으로 상기시킨다는 사실부터가 이 점을 얼마간 방증합니다. 한데 표제작을 보면 시인은 결코 소피아 로렌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소피아 로렌이 태어난 해에 발견되었다는 미라입니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미라의 존재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지요. 기혁은 그런 것들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한편, 이국적/타자적인 존재에 대한 사유를 개진하는 시인입니다. 이 작품에서 미라를 무대 위로 올린 것 또한 눈여겨볼 만한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미라는 죽었지만 썩지 않고 남아있는 존재입니다. 무기물의 상태로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 작품이 암시하듯 기혁은, 세상을 정지해 있는 “무시간성의 사물”(함돈균)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새로울 것 없는 권태로운 세상에서 느끼는 상념들을 건조하지만 감각적인 언어로 응축시켜 놓습니다. 생기 없는 세상-사물에 대한 통찰을 이만큼 집요하게 이어온 시인은 많지 않습니다. 『소피아 로렌의 시간』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정형 미학의 세계

 

유성호

: 이번에는 제가 정형시 쪽의 성취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먼저 이우걸 시집 『모자』는 1973년 등단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계속해온 중진 시인의 빼어난 성취입니다. 이우걸 시인은 시조에 일관되게 현대성을 부여하면서 더욱 견고하게 짙어진 인간 이해의 서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참된 자아를 만나 새로운 생을 개진해가는 안간힘과 넉넉함이 공존하는 시집입니다. 시인은 ‘모자’를 통해 ‘내면’을 읽으려 하고, 그 ‘모자’가 “방패/장식/휘장/가면”일 수 있겠지만 수많은 필요에 의해 태어나는 자아처럼 우리 삶의 중층성을 나타내준다고 노래합니다. 시집 『모자』는 그런 점에서 시인 스스로의 실존적 고백이자 노경으로 접어드는 세월에 대한 미학적 화첩이기도 합니다. 김경복 교수는 이 시집에 대해 “죽음의 문제로 고뇌하는 노년의 자아에서 자기 구원을 얻기 위해 의지적 지향으로 추구했던 시적 건축물 끝”에 선 시인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시집은 이우걸 시인에게는 “한 시인의 울음이 사는 집”이며 “불면의 밤이 두고 간/아, 뜨거운 문장들”(「시집」)인 셈입니다. 두루 아시다시피, 이우걸 시인은 현대시조의 변화 요청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보여온 대표적 중진이지요. 그의 시편들은 대체로 사회성과 서정성의 복합적 균형 속에서 태어나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 집단적으로 잠복한 정신적 병리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시인 고유의 비극적 세계 인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 저류에는 비극과 절망을 넘어 균형과 희망 쪽으로 생의 형식을 재구再構하려는 욕망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를 비관주의자로 부를 수 없는 까닭도 이러한 생의 형식의 갱신에 대한 그의 역동적 힘 때문일 것입니다. 오직 시조 외길만을 걸어온 시인이 전통적 정서의 재확인보다는 모더니티와의 적극적 교섭을 통해 시조 미학을 확충하려는 노력과 성찰을 보여주는 것은, 현대시조의 양식적 견지와 확충을 동시에 이루려는 그의 일관된 시학적 관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김영재의 『녹피경전』은 1974년 등단한 중진 시인의 중중하고도 심미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생성과 소멸, 진화와 퇴화 같은 것들이 선명한 분절적 개념이 아니라 한 몸으로 묶여 모든 사물과 운동을 규율하는 양면적 속성으로 존재함을 노래합니다. 잘 씌어진 시조를 통한 이러한 상상적 경험은, 감각의 쇄신과 인지의 충격을 동시에 선사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끔 해줍니다. 이러한 그의 시편들은 감각의 쇄신과 인지의 충격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뜻깊은 실례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 안에서 우리는 삶이라는 것이 단선적 질서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대립적이기까지 한 많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통합된 채 흘러가는 것이고, 시가 자기 충실성을 벗어나 타자들의 오랜 시간에까지 관심을 확장해가는 것임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시집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변화는 상처를 포괄하면서 더욱 타자를 찾아가는 넉넉한 마음에서 찾아집니다. 특별히 사막을 여행하면서 느낀 실존적 장면을 담아낸 「녹피 경전」은 야생의 사슴 가죽을 벗겨 “인간을 인도하는 신의 말씀”을 기록한 ‘녹피경전’을 통해 “영생으로 뭇 생을” 구원하는 거룩한 타자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막 열흘」에서는 “버리고 온다는 게 더 가지고 돌아왔다”면서 ‘지움’과 ‘남김’이라는 시인으로서의 메타적 자의식을 선연하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김영재 시인이 견지하고 있는 사랑의 힘은 사막과도 같은 우주적 귀속처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그 그리움 안에는 오래 경험해온 시간이 온축되어 있고 ‘시’가 결국에는 그러한 그리움과 온축의 현장임을 알려줍니다. 시인은 의식 저편에 깃든 시간의 형상을 상상적으로 복원하여 현재형을 유추하는데, 그러한 유추는 과거 어느 시간을 향한 매혹으로 나타났다가 그 시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삶을 반추하게끔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정환 시집 『오백년 입맞춤』은 등단 40년을 넘긴 중진 시인이, 정형 양식이 견지하고 있는 일정한 율격적 구속에도 불구하고, 매우 활달하고 섬세한 서정을 담은 주목할 만한 성과입니다. 사물의 구체성에서 정서의 결을 유추하는 방법론과 그것을 사랑과 구원의 주제로 연결하는 심미적 시정신을 그는 일관되게 보여왔습니다. 이번 시집은 이러한 방법론과 정신이 더욱 주제의 다양성을 가지고 완성된 사례로서, 시인은 사물과 내면이 교감하고 상응하는 세계를 담으면서 그 과정을 삶의 그것으로 전이시키는 상상력을 아름답고 치열하게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그 성찰의 진정성이 시집의 품과 격을 한결 높이고 있습니다. 이번 시집은 이 모든 것을 커다란 스케일 안에서 이루기보다는 구체적 사물과 풍경 속에서 성취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또한 자연 사물이나 구체적 풍경에 즉卽하여 삶의 비의秘義에 다다름으로써 구체성과 보편성을 아울러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정환 시조 미학을 통해 자연 사물과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을 담은 세계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시집에서 그는 “천편천률을 위해 사생결단으로 썼다. 천치처럼 부지런히 썼다. 글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듯이, 쓰는 일이 마냥 생명의 연장이라는 듯이”(「시인의 말」)라면서, 우리 전통 정신의 위의威儀를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삶의 어두움을 넘어 영원성 구현에 힘쓴 작품들이 많고, 나아가 희망을 역설적으로 노래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또한 책 뒤에 실린 시인의 산문은 이정환시인의 메타적 시의식을 살피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오백년오/백년그늘/아래뜨거/운입맞춤/이시간을/멈추게했/네시간을/멈추게했네/오백년/입맞춤이”(「오백년 입맞춤」) 같은 형태적, 정서적 실험도 수행하면서 시인은 느티나무 오백년 그늘이 만들어낸 사랑의 역사를 노래합니다. 심미적이고 활달한 이정환 시인의 청년 정신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는 결실입니다.

박명숙 시인의 『그늘의 문장』은 그녀 특유의 간결하고도 선명한 시적 이미지들이 기억의 고요와 조우하면서 이루어내는 심미적 화폭입니다. 박명숙 특유의 예술적 성취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동안 박명숙 시조는 사물의 외관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내면과 기억을 결속시키는 방법에 의해 일관되게 씌어져 왔습니다. 또한 가장 근원적인 경험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법에 의해 구축되기도 했습니다. 이번 시집은 사물의 안팎에 흔적으로 새겨져 있는 그러한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간결하고도 속 깊은 서정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정형 양식이 가질 법한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장과 상충을 충분히 감안하면서도, 개성적인 양식적 완결성을 구축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표제작 「그늘의 문장」에서 시인은 느티나무의 그늘에서 “첫 소식”을 받습니다. “거미발처럼 몰려들어 일렁이는 푸른획들”은 “실팍한 그늘의 문장”이 되어계절의 변화와 함께 우리 모두 우주적 상호연관성으로 묶인 존재자들임을 알려줍니다. 「가을 공양」에서는 감나무 잎 물든 “햇살의 꽁무니”와 “그늘의 정수리”를 통해 절반은 세상에 내주고 절반은 스스로 충만한 우주적 균형을 노래합니다. 또한 「방문」에서는 “가난한 김 선생”과 “더 가난한” 자신을 통해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존의 지혜를 노래합니다. 박명숙 시인은 자아와 타자, 기억과 현실, 사물과 사람살이 등에 대한 기막힌 균형 감각으로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요인들이 저마다 다양한 서정의 질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존재론적 기원을 상상하면서도 일상 속에서 만나는 생성적 원형으로서의 이질적 이미지들을 포괄하는 탄력을 무궁하게 보여줍니다. 그 점에서 첨예한 현대시조지요. 계속되는 이미지의 연결을 열어놓고서도 각각의 이미지들이 분리되지 않도록 준비해둔 장치가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최영효의 『컵밥 3000 오디세이아』는 우리 시조시단에서 가장 활력 있는 작품들을 써온 시인의 미학적 극점이 구현된 결실입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속성을 탐색하는 방법론으로 내면, 풍경, 어에 모두 집중적인 탐구열을 불어넣어 자신의 시조로 하여금 동시대의 첨예한 산물이 되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작품 안에 구성해내는 풍경이나 사물은 감각적 충실성에 의해 사실적으로 재현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배후에 숨겨진 시간을 은유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의 시선에 포착되는 풍경이나 사물은 공간적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에 의해 온전하게 매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언어의 고고학을 통해 우리가 떠나온 시원의 형상을 복원하려 합니다. “경상도 갈강비/전라도 싸락비/강원도 가스랑비/제주도 줌뱅이비/충청도 이시랭이/함경도 싸그랑비”(「가랑비동동」)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은 훼손되기 이전의 순수 원형을 담으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이러한 형상들을 구체적 사물 속에서 발견하거나, 그것을 회복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상에 대해 비판의 촉수를 던져갑니다. 따라서 이는 여전히 자연 사물로부터 느끼는 불가항력의 흡인력인 동시에, 삶의 가장 중요한 기율에 대한 본능적 경사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삶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소소하지만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시조의 뼈대로 삼으면서, 그 안에 자신만의 따뜻한 연대 감각을 얹어 매우 이채로운 세계를 보여 줍니다. 우리 시대에 대응하여 새로운 대안적 실천을 상상적으로 마련하면서, 생명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발하는 최영효 시조는 그 점에서 음미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계영 시편의 세계

유성호

: 마지막으로 이번에 ‘201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에서 동료 문인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유계영 시편에 대한 이야기로 한번 옮겨볼까요?

나민애

: 유계영 시인의 「미래는 공처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젊은 시인의 발랄한 표현과 시적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는 작품입니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인 세대의 활약을 보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 그가 선택한 “경쾌하고 즐거운” 표현처럼 작품은 일면 쾌활해 보이지만 이 시는 상당히 비판적인 인식을 함축하고 있죠. 유계영 시인의 다른 작품들을 보아도 묘사라든가 색채 표현이 회화 공부를 한 시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독특한데 「미래는 공처럼」 역시 비가시적인 속성을 가시적으로 포착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됩니다.

홍용희

: 유계영의 「미래는 공처럼」은 제목이 매우 경쾌합니다. “공”의 탄성과 역동성을 미래의 시간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은 중력의 규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따라서 “미래는 공처럼”이란 현재로부터 자유롭게 탄성 진동하는 비현재적인 미래로 읽힙니다. 미래가 살아 있는 현재의 지평 너머에서 불확정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현재적 지평은 음악 감상에 빗대어 말하면 파지와 예지를 포함한 지각 작용의 영역을 말합니다. ‘이제 막 지나간 음을 아직도 현전적으로 가지고 있는’ 파지와 ‘다가올 어떤 음을 현전하는 것으로 의식하는’ 예지의 영역이 현재의 지평인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현전역의 넓이는 멜로디를 듣는 자의 주의의 강도와 감각적 촉수의 민감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미래는 망각한 현재라고도 합니다. 후설은 현재에 관여하는 생동성으로서의 자아상, 진지한 태도가 미래를 살아있는 현재의 지평권과 연동시킬 수 있는 계기성이라고 전언했던 까닭도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됩니다. “경쾌하고 즐거운 자, 그가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는 명제는 현재적 삶에 대한 태도의 가벼움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경쾌하고 즐거운 자”는 “울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두세 번 치고/황급히 떠나는” 자이고 “벗어둔 재킷”도 수시로 버려둔 채 떠나는 경박함을 노출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그는 미래를 공처럼 굴”리는 자입니다. 현재의 가벼움이 미래의 현재와의 비연속적 불확정성을 배가시키는 것이지요. “경쾌하고 즐거운 자”와 대비되는 대상으로 “메추라기”가 놓입니다. “메추라기”는 “미래를 쥐여 주면 반드시 미래로 던져버”립니다. “메추라기”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오직 ‘지금, 여기’의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미래란 살아있는 현재적 지평의 확장태라는 인식으로 해석됩니다. “얼음에서 태어나 불구덩이 속으로/주룩주룩 걸어가는” “죽음의 무더움을 함께 나누”는 진정성을 지닌 참된 절대자가 현재 속에서 미래를 온전히 선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태도와 내밀한 관계성의 문제를 철학적 시간성에 실어 흥미롭게 노래한 시편입니다.

전철희

: 유계영의 「미래는 공처럼」은 해독이 용이한 작품이 아닙니다. 구절들을 떼어놓고 보면 각각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확정적으로 말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전체 흐름을 보면 시인이 시간-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공의 비유를 끌어왔다는 점만큼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런 맥락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공처럼 운동하는 시간을 “경쾌하고 즐거운” 어조로 모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또한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 공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공을 이야기하기 위해 미래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너무도 생생하게 시각적 풍경을 창조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정도로 잘 형상화된 작품을 읽을 때면 공과 미래 중 어떤 것이 원관념이고 어떤 것이 보조관념인지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도 같습니다. 어느 쪽의 독법을 차용하든 「미래는 공처럼」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저는 몇 다발의 언어-이미지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과 감각을 개안시키는 것이 시의 본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미래는 공처럼」은 그런 시의 본령에 충실하면서도 세련된 감수성까지도 겸비했다는 점에서, ‘오늘의 시’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성호

: 감사합니다. 세 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