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 수원 남문 언덕
[시와 노래] 수원 남문 언덕
  • 최동호(시인)
  • 승인 2022.04.0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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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원 남문 감돌던 습습한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오면
일손을 놓고 달려와 팔달산 언덕을 오른다.
낮은 담장과 굽은 성터에서 풍겨오는
흙냄새가 어머니 젖가슴처럼 마음을 열고 반긴다.
담장 아래 토닥거리는 키 낮은 햇빛과
느리고 뒤끝이 흐린 수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외할머니 집으로 가던 골목길은 끊어졌으나
풍상의 세월을 열고 닫는 수원 남문은
오늘도 세상사를 의연하게 굽어보며 서 있다.

2.
옛날 친가에서 도망 나와 숨어 살던 정희 고모가
은밀한 목소리로 나를 손짓하며 부르던
수원 지원 옆 돌담길은 사라져버렸지만
들꽃 같던 입술로 부르던 목소리는 아직도
중학생 시절의 막막한 외로움을 불러일으킨다.
방과 후 어느 날 무심코 낡은 목조대문을 밀치자
빙긋하게 열린 화령전 마당 작약꽃밭은
내 영혼에 아름다움을 점화시킨 최초의 불꽃들,
소리 내어 꽃을 부른 그 목소리를 찾기 위해
먼 바다의 파도를 헤치며 나가야 하지 않았던가

3.
범람한 수원 천변에서 피라미 잡던 여름날은
투명하게 빛나던 유년의 카니발, 나의 문학은
팔달산 솔나무에 떨어진 한 점 빗방울에서 태어나
먼 바다로 나가는 물길을 따라 성숙했으니
오랜 방랑의 돛폭을 거두고 다시 고향의 언덕으로 돌아가
잔잔하게 시가지를 굽어보며 떠오르는 태양과
산 너머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리라.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집과 거리 사라졌어도
오손도손 살던 사람들의 정겨운 이야기는
내 영혼의 푸른 책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게 하리라.

4.
지금 팔달산 언덕 남창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앳된 목소리는 수원성 울타리를 박차고
날아올라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리니.
언제나 수원 남문 언덕에서 불어오는
습습한 바람에는, 저물녘
서늘한 산기운이 불현듯 다가와
놀란 눈으로 검푸른 팔달산을 돌아보던 초저녁
신풍학교 운동장까지 마중 나와
작은 가슴 쓸어주며
다독거리던 어머니의 따스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최동호 시인
1948년 경기도 수원 출생. 고려대 국문과, 동대학원 문학박사. 경남대와 경희대, 고려대 교수 역임. 현 고려대 문과대 국문과 명예 교수 겸 경남대 석좌교수. 시집 『황사바람』(1976) 『아침책상』(1988) 『공놀이하는 달마』(2002) 『불꽃 비단벌레』(2009) 『얼음얼굴』(2011) 『수원 남문 언덕』(2014) 『제왕나비』(2019) 『황금 가랑잎』(2019) 등이 있음. 대산문학상, 만해대상, 몰도바 작가연맹문학상, 미국 제니마문학상 등 수상.

 

* 《쿨투라》 2022년 4월호(통권 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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