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자수刺繡의 매혹적 아름다움: 이경숙 『검은 머리 풀어 수를 놓다』
[북리뷰] 자수刺繡의 매혹적 아름다움: 이경숙 『검은 머리 풀어 수를 놓다』
  • 김용락(시인,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KOFICE 원장)
  • 승인 2022.04.01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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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풀어 수를 놓다』(다할미디어, 2022)는 우리의 전통문화인 자수刺繡에 대한 학문적 신념과 ‘수繡박물관’ 경영이라는 실천을 통해 30여 년 이상 이 분야에 천착해온 수박물관 관장 이경숙 박사가 펴낸 학술에세이집이다. 이 책은 우선 깊은 산속 차가운 새벽 쪽샘에서 막 물들인 듯한 쪽빛의 서늘하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운 문체가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그리고 고증을 통한 엄격한 학문적 탐구가 학술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염두에 둔 듯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전통’에 관한 논의라면 고전으로 알려진 미국의 시인 T.S. 엘리엇Eliot(1888~1965)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1919)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엘리엇의 이 글은 전통과 역사의식을 주로 문학(시)에 결부시켜 논의한 글이다. 문학사적으로 보면 주관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나 19세기 영미문학을 풍미했던 영국의 비평가 매튜 아놀드M. Arnord(1822~1888)의 문학 인생론에 대한 반박으로 읽히는 글이지만 전통과 현재의 문학예술, 그리고 개인의 재능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풍부한 논의의 관점을 제공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엘리엇의 이 글에서 전통 부분만 떼어서 읽어보자. 

우리는 시인이 그의 선배 시인 특히 그와 바로 앞선 선배와 다른 점을 보고 만족하며 거기서 따로 떼어 내서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 없이 한 시인에 가까이 가보면 그 작품의 가장 우수한 부분뿐 아니라 가장 개성적인 부분도 과거의 시인, 그 조상들이 그들의 불멸성을 가장 힘차게 내세웠던 부분이라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고 나는 여기서 그 영향을 받기 쉬운 청년기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원숙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전통의 유일한 형식, 즉 전달의 유일한 형식이 바로 앞선 세대가 남긴 성과를 맹목적으로 혹은 소심하게 고수하고 전 세대의 성공을 추종하는 데만 있다면 〈전통〉은 적극적으로 저지되어야 할 것이다. 전통은 훨씬 더 넓은 의의를 가진 것이다. 전통은 계승될 수는 없다. 그것을 원한다면 비상한 노력으로써 획득하여야 한다. 전통은 첫째로 역사적 의식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누구나 25세가 지나서도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역사적 의식은 과거의 과거성 뿐만 아니라 과거의 현재성에 대한 의식도 내포하는 것이다. 이는 작가로 하여금 자기의 세대를 골수 깊이 의식함과 동시에 호메로스 이래의 유럽문학 전체와 그의 일부인 자국의 문학 전체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며 동시적인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쓰게 한다(김용권 역 『세계평론선』 삼성출판사, 1980).

ⓒ수박물관베개

문학에서 ‘몰 개성론’을 주장한 이 글에 의하면 전통이라는 것은 “소심하게 고수하고 전 세대의 성공을 추종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상한 노력으로써 획득하여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문학을 포함한 서구문학이 “유럽문학 전체와 그의 일부인 자국의 문학 전체가 동시적으로 존재하며 동시적인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저자 이경숙 관장의 『검은 머리 풀어 수를 놓다』도 이런 관점에 충실하게 반응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 책의 저자가 엘리엇의 전통론을 의식하면서 이 책을 썼다는 뜻이 아니라 전통의 현재적 드러냄에 올바른 방향을 모색했다는 의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여러 군데서 자수와 관련한 우리 전통의 맥을 짚고 있는데, 대표적인 몇 개만 보면 조선시대 임당 정유길(1515~1588)의 「수침화아작綉枕和兒作」, 중국 북송 때 사신인 서긍(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실학자 번암 채제공(1720~1799)의 「백저행白紵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의 『조선인을 생각한다』, 천경자(1924~2015)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비롯해 퇴계, 율곡, 신사임당, 조선왕조실록 등 수많은 전거典據 속에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논의와 문장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를 확인시켜 준다는 데서 단순히 감상을 나열하는 에세이와는 궤를 달리한다. 아마 이것은 저자가 대학 때 동양미술을 전공하고 박물관학과 조형학 박사를 거쳐 대학에서 교수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학문적 이력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태극 무궁화문 지도자수
ⓒ태극 무궁화문 지도자수

이 책은 크게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장마다 작은 6~7개의 에세이를 배치하고 있다. 1장 ‘간절히 기도 하는 마음’, 2장 ‘사랑으로 수를 놓다’, 3장 ‘수로써 나라를 지키다’, 4장 ‘마음에 수를 놓다’, 5장 ‘수에서 역사를 읽다’, 6장 ‘어머니의 바느질’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제목에서 엿볼 수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수刺繡이며, 이 자수가 엮어낸 기도와 사랑과 애국과 수행修行과 역사와 효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런 주제가 베갯모, 횃댓보, 병풍, 인형, 노리개, 팥 주머니, 텍스타일, 한복 등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삶과 다 연결돼 있다. 공간적으로는 더 나아가 만주, 서간도 중국, 일본, 블라디보스토크, 인도, 네팔 등 아시아를 넘어 미국 오하이오주 시카고까지 확장돼 있다.

매우 서정적이면서도 인문학적 창의성을 풍부하게 함의하고 있는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독자들에 따라 각기각색일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귀결된다. 궁궐담장이나 병풍뿐 아니라 안경집, 수젓집에 수를 놓는 십장생이나 인간의 오복五福(壽, 富, 康寧, 德, 命) 가운데 가장 으뜸이 수인데 이는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1629~1690)이 『성호사설』에서 밝힌 바처럼 “부귀는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성취할 수 있지만 장수長壽는 하늘이 정해주어야 가능하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옛사람들은 오래 살지 않고는 착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장수를 으뜸으로 삼는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선善을 행하기 위해 오래 살기를 원했던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16쪽). 이처럼 지은이는 착함, 선善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 전통문화의 소중함, 자수의 매혹적인 아름다움도 결국은 인간의 선함에 대한 열망으로 귀결될 때 더욱 의미 있는 그 무엇이 되는 게 아닐까? 이 책이 주는 메시지로 나는 읽었다.

 

 


이경숙 관장
박물관·수繡 관장.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수를 만났다. 그중에서도 화려하고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베갯모 자수에 끌려 베갯모를 포함한 전통문화를 깊이 공부하게 됐다.

2010년에는 그동안 모은 자수를 가지고 ‘박물관·수’를 설립, 소장품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유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자수와 전통문화 보급에 앞장서는 등 시대와 소통하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대구광역시박물관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고 (사)한국사립박물관협회 이사를 맡고 있다. 경북대 미술학과를 거쳐 동대학원 미술교육학 석사학위와 경주대 대학원 문화재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대구대 대학원 미술디자인학과 박사(조형 예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베갯모 꽃수』 『바늘그림』 『한국 근대 십자수』 등이 있다.

 

* 《쿨투라》 2022년 4월호(통권 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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