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라이프 12] 마음에 새싹이 자라길
[MZ 라이프 12] 마음에 새싹이 자라길
  • 함은세(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2.04.01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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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반려자는 식물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정말 키우고 싶었다.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고, 맞벌이 가정에서 자라 외로움의 정도가 컸던 것도 같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학교 근처에 살며 집에서 토끼를 키우는 친구가 있어 하교 시간만 되면 그 집으로 달려가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집안 사정과 여러 이유가 겹쳐 나와 함께한 반려동물은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가 전부였다.(그러나 장수풍뎅이는 내가 잠든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결국 찾을 수 없었고, 그 이후로 나는 며칠 동안 장수풍뎅이의 습격을 당하는 악몽을 꿨다.)

내 기억이 맞다면, 딱 그즈음부터 ‘애완동물’이라는 명칭을 ‘반려동물’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현대인들이 이 지구를 살아가는 생명체가 인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디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멀긴 했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건 분명하다.

그렇게 ‘동물’이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가족’으로 자리잡고, 이제는 ‘반려동물’을 넘어 ‘반려식물’의 시대가 왔다. 젊은 세대에서도 식물 하나 키우지 않는 사람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당장 〈오늘의 집〉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곳에 올라오는 “소형 원룸도 무드 있게! 감각적인 1인 가구 인테리어” 등의 제목을 단 게시물만 봐도 작은 화초나 식물을 비치해 분위기를 살린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내 주변에도 성인이 되어 자취를 시작한 친구들을 비롯해 다양한 주거 환경에서 ‘반려식물’과 함께하는 이들이 많다.

도시인은 초록이 그립다

그렇다고 해서 반려식물이 젊은 층의 ‘산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니, 사실 그 반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우리 조부모님 댁. 오래된 빌라의 앞 베란다를 꽉 채운 온갖 식물들이 생각난다. 아마 우리 조부모님 댁만 그런 것도 아닐 테다. 아파트 거실 창가 앞에 안마의자나 러닝머신이 있고 그 옆에 큰 난들이 몇 개 놓인 장면은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익숙하지 않은가. 부모님이 시간이 나실 때마다 그 난을 손수건이나 행주로 열심히 닦아주시고. 내 친구 중 한 명은 주말마다 난 관리에 여념이 없으신 본인의 아버지께 “아빠, 딸래미나 그렇게 좀 신경 써봐.” 했다가 등짝을 몇 대 얻어 맞았다나.

이렇듯 젊은 세대에게 화초 혹은 식물이란 ‘우리 부모님의 또 다른 자식’이나 ‘형체는 있는데 인식은 못 했던 무언가’다. 그런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어 청년들이 반려식물을 하나씩 마련한다. 아무리 ‘식테크’가 유행이라지만 적어도 내 지인들 중에서는 몇 년 전 ‘난테크’ 바람이 불었던 시절의 어른들이 그랬듯이 “뭐라도 벌어보려고” 식물을 집에 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식물을 향한 젊은 세대의 열광은 코로나 팬데믹이 한국을 뒤덮은 이후의 일이다. 외부 활동이 제한되며 자연스럽게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그에 따라 ‘집’은 가장 개인적이지만 가장 공개적인, 자아 표출이 물질성을 가진 형태로 이루어지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반려식물’은 단순히 취향과 선호를 보여주는 인테리어나 공간 디자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청년들이 식물의 가치에 집중하고 그들을 일종의 ‘동거자’로 받아들인 것은 삭막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느끼는 암흑 같은 외로움의 방증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공동체라는 단어보다는 그조차도 개인이 모여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더 집중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진 것이 지금의 젊은 세대다.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세뇌당하며 자란 전쟁 전후 태생의 노년층이나 민주화와 학생운동을 통해 연대와 동지애에 포커싱을 두던 중장년층과 그들은 전혀 다르다. 청년들은 (설령 맹목적일지라도) 추구하고 싶은 인류애적 가치도, 개천에서 용 난다는 문장으로 대변할 수 있는 ‘최선’에 관한 희망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눈길이 닿는 건 오로지 ‘실체가 있는 것들’ 뿐이다. 돈, 명예, 부, 성공. 정확히 말하자면 한강 뷰 아파트, BMW 풀옵션, 명품 가방, 내가 산 주식의 대박 등등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단순히 한국 청년들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그들은 사실상 인류애가 ‘박탈당한’ 채 세상 물정을 알게 됐다. 열심히 일해도 올라갈 자리가 없고, 아무리 돈을 모아도 살 집이 없고, 입시 체계에서 살아남을 만큼의 금액이 없고, 무엇보다 꿈과 이상이 없다. 부모와, 가족과, 사회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따라 길을 간다. 선함의 중요성과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을 전부 제거당한 채 그저 ‘정답’만을 좇아서. 그 과정에서 남을 짓밟는 건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며 누군가의 가난과 고통은 그들의 부족함 때문이니 하등 중요치 않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 없이 사는 것이 익숙해진 그들이 가진 생명이란 존재에 관한 본능적인 갈망을 충족시켜 주는 게 ‘식물’이다. ‘식물’은 말을 하는 법도 모르고, 자기표현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거대하게 늘어선 빌딩숲을 살아가는 ‘녹색 결핍증’의 신인류를 안정시킨다. (일반적으로) 나 자신이 투자하는 시간과 마음만큼 생명의 발화로 결과를 보여주는 게 바로 식물 아니던가. 그렇기에 식물은 삭막한 사회로부터 상처받은 청년들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근원적 초록’이고, 그들에게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 존재들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심심한 위로와 같다.

새싹을 기도하며

지난 3월 9일, 새로운 대통령이 결정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선거 과정을 거치며 필자는 한국 사회의 ‘생명 결여’를 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명 경시’다. 나의 삶이, 내가 믿는 것이, 내가 추종하는 세상이 남들의 그것보다 중요하고 대단하다는 집착에 가까운 확신. 누군가의 생명이 무너지든 말든 나와는 관련 없다는 이기적인 외면. 다른 생명의 흔들림이 그저 재미와 조롱거리로 소비되는 천박한 단정. 남을 향한 미움으로 굴러가는 이 사회의 단면을 정확히 보여준 선거였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도 생명은 움튼다. 혐오와 미움에 의해 하루에도 수십 번 집어 삼켜지는 세상이 되었지만 두터운 어둠의 바닥을 뚫고서도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는 새싹들은 분명 있다. 보이는 건 작고 하찮아도 뿌리는 그 무엇에도 비하기 어려울 만큼 깊숙이 자리 잡은 생명들이 이 사회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기에 두렵지 않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큰 나무는 태풍이 불어닥치면 크기가 무색할 정도로 쉽게 뽑혀 쓰러지고 날아간다. 그러나 잡초는 옆으로 휘어져 누울지언정 뽑히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면 우리는 그 사실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하는 과정을 맞은 것일지도 모른다. 함께하는 ‘초록’은 고작 온실 속의 화초 마냥 작고 연약한 반려식물 몇 개뿐인 세상을 사는 중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작은 ‘초록’의 소중함을 잘 아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모여 이룬 사회니까 말이다.

그러니 나는 무너진 마음을 소중히 껴안고 다시 미래로 향한다. 그곳이 설령 폐허일지라도, 우리는 꽃씨를 품은 자들이기에.

 

 


함은세
고등학교 자퇴한 걸 자랑하고 다니는 02년생. ‘인생 재미있게 살기 프로젝트’ 라는 명목 하에 삶을 모험하며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우는 중이다.

 

* 《쿨투라》 2022년 4월호(통권 9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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