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Theme] K-무비의 한류를 이끌어온, 그리고 이끌어갈 국제영화제
[5월 Theme] K-무비의 한류를 이끌어온, 그리고 이끌어갈 국제영화제
  • 김형석(영화평론가)
  • 승인 2022.05.04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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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가 가요(1990년대)와 드라마(2000년대)를 중심으로 일본과 아시아에서 전개된 문화적 흐름이라면, 이른바 ‘K-무비’는 21세기 유럽의 국제영화제를 통해 시작되어 북미 시장과 아카데미 시상식을 통해 완성된 한국영화의 에너제틱한 움직임이다. 물론 20세기에도 한국영화는 해외에서 평가받았다. 특히 1980년대 이두용 감독의 〈피막〉(1980)과 〈물레야 물레야〉(1984),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6)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 등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베니스 영화제, 칸영화제, 모스크바영화제 등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일정 정도 오리엔탈리즘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1990년대 한국영화는 잠잠한 상황이었다.

〈미나리〉 스틸컷

그리고 2000년 칸영화제, 한국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공식 경쟁 부문에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초청받았고,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이 주목할만한 시선에,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가 비평가 주간에,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감독 주간에 초청받은 것이다. 21세기 한국영화는 칸영화제를 통해 비로소 국제적인 영화 흐름에 합류할 수 있었고, 변방에서 조금씩 중심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 20세기 한국영화는 전 세계 영화에서 산업적으로 그리고 미학적으로 가장자리에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일종의 쇄국정책이었다.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다고 하지만, 외국영화 수입을 1년에 20~30편 수준으로 제한하는 쿼터 정책을 통해 이후 한국영화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산업적으로 그 어떤 메리트도 없는 한국의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기는 쉽지 않았고, 한국 내에서 국제영화제를 치른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이때 부산국제영화제가 생겼고,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은 국제영화제를 통해 교류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그 결실이 바로 2000년 칸영화제였다. 각 부문에 걸쳐 네 편의 한국영화가 상영되었고, 2년 후 임권택 감독은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더욱 결정적인 계기는 2004년 칸영화제였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는데, 이후 이 영화는 한동안 ‘K-무비’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고, 이후 베를린영화제와 베니스영화를 비롯 선댄스, 로테르담, 로카르노 등 유럽과 북미의 이름 있는 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2019년 칸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다음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석권하면서, ‘K-무비’의 ‘페이즈 1’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OTT를 통한 흐름이 그 뒤를 잇고 있는 ‘페이즈 2’가 펼쳐지고 있는데, 이 모든 시작은 2000년 칸영화제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면에서 한국영화는 산업적 성장이나 정책적 지원이 아닌, 영화제를 통해 감독과 영화가 소개되면서 현재의 위상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감독만 그 흐름 속에 있었던 건 아니다. 1980년대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통해 강수연이 월드 스타 자리에 올랐다면, 2000년 이후엔 문소리(베니스영화제), 전도연(칸영화제), 김민희(베를린영화제) 등이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굳이 수상을 하지 않더라도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등의 영화를 통해 소개된 배우들이 국제 프로젝트와 결합하는 일들도 일어났다. 그리고 선댄스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미나리〉의 윤여정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한국 배우의 깊이를 세계에 알렸다. 현재는 OTT에서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각광 받으며 배우들의 국제적 지명도가 한층 더 올라갔지만, 그 토대는 한국의 배우들이 국제영화제에서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기생충〉 스틸컷

이것은 역으로, 한국의 수많은 국제영화제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부산국제영화제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그리고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고 지원을 받은 필름메이커들은 이후 거장이 되어 다시 한국을 찾곤 했다. 이것은 더욱 확장된 의미의 ‘K-무비’를 보여준다. ‘K-무비’를 한국영화에만 한정하는 건 스스로의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다. ‘K-무비’라는 단어 안엔, 한국영화가 전 세계 영화계에 끼치는 영향력과, 국제 영화계의 일원으로서 수행하는 역할까지 포함된다. ‘메이드 인 코리아’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을 통해 시도되는 다양한 프로젝트와 그 결과물을 중장기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며, 그런 점에서 영화제는 가장 적절한 플랫폼이다. 산업적 부담을 받지 않는 영화제를 통해 유연하면서도 창조적인 작업들이 이뤄질 수 있으며, 이것은 영화를 소개하는 데 집중했던 과거 한국의 국제영화제가 한 단계 도약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국제영화제들은 해결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장기적 생존을 위해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자체의 보조금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현재 한국의 영화제는 정치적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영화제는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위험성을 상쇄하기 위해, 영화제는 그 문화적 영향력을 사회적 합의까지 상승시켜야 한다. 즉 영화제를 지원하는 것이 지닌 문화적 의미를 공적으로 환기시켜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 영화제 문화가 생긴 지 20년이 넘었지만, 이 부분은 여전히 쉽지 않다.

또 하나는 정책적인 면이다. 현재 한국의 영화제 지원은 몇몇 영화제에 현금 지원을 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인 방식이 필요하다. 현재 ‘K-무비’와 ‘K-드라마’가 거두고 있는 성과의 근원에 ‘영화제’라는 축제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지자체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각종 공적 기관이 영화제와 결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조금씩이라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쉽진 않겠지만, 그러한 노력이 조금씩 현실화될 때, 한국의 영화 문화는 좀 더 탄탄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김형석 1971년 서울생.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영화 전문지 《스크린》의 취재기자와 편집장을 거쳐 10년 동안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 《쿨투라》 2022년 5월호(통권 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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