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영화] 도종환 「접시꽃 당신」
[시와 영화] 도종환 「접시꽃 당신」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2.05.0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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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악한 얼굴 한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박철수 감독의 영화 〈접시꽃 당신〉(1988)은 도종환 시인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 원작이다. 교사 발령을 기다리며 시를 쓰던 종환은 카페에서 만난 수경과 알게 되어 결혼에 이른다. 장남인 종환은, 교사생활에 임하느라 맏며느리로서 시부모와 시동생, 그리고 아이들을 보살피며 고된 농촌생활을 이끄는 아내의 괴로움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던 중, 헌신적으로 소임을 다하던 아내는 결국 병을 얻게 된다. 종환은 뒤늦게야 병의 심각함을 알고 입원시키나 아내의 병이 이미 회복 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른 것을 알고 자책한다. 종환은 결혼생활 동안 살펴주지 못했던 사랑을 시를 통해 보여주지만, 아내 수경은 결국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죽음을 앞둔 아내에 대한 순애보를 그린 이 시집은 당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다.
제8회 영화평론가상 여우주연상(이보희), 음악상, 1988년 제24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이덕화), 여우주연상(이보희), 각본상 수상. 제13회 황금촬영상 동상(진영호) 등을 수상하였으며, 제3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품하였다.

 


도종환 시인은 1954년 9월 27일 충북 청주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을 거쳐,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 마을에서」 외 5편의 시를, 1985년 《실천문학》에 「마늘밭에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박하고 순수한 시어를 사용하여 사랑과 슬픔 등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면서도, 역사적 상상력에 기반한 결백(潔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접시꽃 당신』(1986)에서 사별한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이 시집은 독자의 큰 호응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1993)와 같은 시집에는 교사로 재직하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투옥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교육시, 옥중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슬픔의 뿌리』(2002), 『해인으로 가는 길』(2006) 등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관조를 통한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화해와 조화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 외 시집으로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등이 있으며, 다수의 산문집과 동화 등 저서가 있다.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상, 제22회 정지용 문학상, 제5회 윤동주상 문학 대상, 제13회 백석문학상, 제20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제20대, 21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2017년 들어선 문재인 정부 초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 《쿨투라》 2022년 5월호(통권 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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