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행복한 봄날, 꿈처럼 듣는 클래식
[클래식 산책] 행복한 봄날, 꿈처럼 듣는 클래식
  • 한정원(클래식칼럼니스트)
  • 승인 2022.05.0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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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신록의 오월이다. 공원 아무 곳에나 걸터앉아 책장을 들추기 좋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길을 나서면 따사로 운 햇살이 온전히 나만을 축복하는 듯 다독이는 듯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고개를 들면 구름 한 점 없는 청명 한 하늘, 눈이 부시다. 새록새록 거친 땅을 비집고 작은 몸뚱이를 내미는 새순들을 마주하며 그저 탈 없이 잘 자라라는 말을 건넬 뿐이다. 오월의 태양 아래서는 이름 없는 잡풀마저도 그렇게 싱그럽기만 하다. 걷는 내내 코끝에 묻어나는 연보랏빛 봄 향기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겨우내 고갈되었던 생명력이 다시금 활기를 찾는 듯하다.

  오월이 되면 자연스레 손길이 가는 노래집이 있다. 성악을 전공한 동료 교수와 호흡을 맞추었던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48』이다. 그중에서 첫 번째 곡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Im wunderschönen Monat Mai〉는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이 곡은 피아노의 부드러운 선율로 시작하여, 성악과 피아노가 서로 대화하고 보완하면서 이중주로 수줍은 사랑의 떨림을 노래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가사는 그의 문학 동료였던 시인 하이네의 『노래집Buch der Lieder』 2부 ‘서정적 간주곡Lyrisches Intermezzo’에서 열여섯 편의 시를 발췌한 것이다. 대표적인 독일 리트인 『시인의 사랑』은 슈만과 유명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비크의 운명적 사랑이 결실을 맺은 1840년에 완성되었다.(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을 반대한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씨는 슈만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들 사이의 치열하고도 긴 법정 싸움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곡은 ‘시인의 사랑’이라는 큰 제목 외에는 각각의 곡에 붙인 시의 첫 구절을 노래 제목으로 사용했다.

  피아노를 사랑한 작곡가

  슈만의 음악에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그것은 평온과 안도감을 주며 모든 것을 숙연하게 만드는 독자적인 깊이를 담고 있다. 그의 음악은 말의 뜻 그대로, 순수하게 낭만적이다. 어느 순간 짙은 우울감에 사로잡혔다가도 돌아서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밝고 천진한 상상력으로 다가온다. 이쪽 부분은 기괴스럽다가도 저쪽 부분은 더할 나위 없이 고상하다. 문학과 음악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했던 청년 슈만. 그의 초기작은 대부분 문학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피아노를 위한 곡들이다. 그의 작품번호에서 볼 수 있듯이 1번 아베크 변주곡부터 23번 밤의 소품집까지 모두 피아노곡이며, 넓게 본다면 30번대까지의 작품들도 피아노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에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평생 우울증과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은 그는 점점 병이 깊어지면서 발작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말년에는 치료를 위해 결국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그때부터 아내 클라라는 남편이 작곡한 곡을 모아 직접 정리하고 철저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슈만과 음악적 동지이기도 했던 그녀는 남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순회 연주에 나섰다. 또한 많은 콘서트를 열었고 그의 작품들을 직접 연주하고 소개했다. 그녀의 행보에 힘이 실렸던 이유는 클라라 자신이 리스트나 쇼팽, 칼크브레너 등 유명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통해 새로이 태어난 슈만의 작품들은 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 등에 버금가는 자리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피아노는 사람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는 악기 중의 악기다. 건반을 누르면 누르는 대로 매 순간 새롭게 구성되어 울리는 피아노 화음은 음악적 표현에서 무궁무진한 다양함을 갖추고 있다. 다른 악기와 함께 리듬이 더해지면 더욱 그러하다. 바흐의 평균율과 모차르트의 수많은 피아노 음악 시대를 거치면서, 건반음악 작품 자체만으로 오케스트라적인 음악 효과를 낸다는 해석은 이미 새롭지 않다. 하지만 4개의 옥타브 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의 피아노로는 아직 그 안에 내재된 오케스트라적인 요소들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슈베르트와 슈만, 쇼팽과 리스트에 이르러 비로소 건반에서의 자유로운 활보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피아노라는 악기 하나만으로 오페라의 섬세함과 관현악곡의 역동적이고도 화려함을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또한 피아노 제작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수준도 함께 높아졌는데, 이로 인해 피아노 음악의 스펙트럼은 급격히 확장되었고 연주자들은 더 이상 연주회장을 울리는 음량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일례로 슈베르트는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과 적정한 다이내믹으로 명민하게 악기를 다루었는데, 그는 피아노를 통해 음악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으며 때로는 그 악기의 역량을 능가하는 실력자이기도 했다.

 

  순수한 동경의 트로이메라이

  창작 욕구가 왕성했던 스물여덟 살의 슈만은 1838년 2월과 3월의 두어 주일 동안 서른 곡의 짧고 재밌는 성격소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단순하고 서정적인 선율만으로 작품을 구성하였고, 그중 열세 곡을 한데 묶어 『어린이의 정경Kinderszenen Op.15』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어른이) 즐겁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를 위한 곡들”이라는 소개와 함께 쉽고 단순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곡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어떤 화려한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슈만의 최대 걸작이라는 〈트로이메라이Träumerei〉를 만나게 된다. 누구든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멜로디일 것이다. ‘꿈’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순수한 어린 시절을 동경하는 마음처럼 꿈결 같은 선율이 조용하면서 느리게 흘러간다. 이 작품은 『어린이의 정경』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전체 열세 곡 가운데 중심을 이루는 일곱 번째 곡이다. 작은 두 도막 형식을 이루면서 악보상의 분량으로는 겨우 한 쪽에 불과한 곡이기도 하다.

  시간 여백이 많고, 급하거나 빠른 템포도 아니며, 어려운 기교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음악 자체가 단순하거나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음악에는 숨을 만한 곳이 도통 없다. 선율과 리듬 어느 하나도 가볍게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주자는 각 음표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정성껏 다루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의미들을 꾹꾹 눌러 표현하거나 그 안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태생의 전설적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미국 망명 후 61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그의 마지막 독주회에서 연주한 트로이메라이. 슈만을 새롭게 느껴볼 수 있는 귀한 영상이다. 유튜브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

 

  봄을 닮은 가벼운 도취의 순간

  좀 더 음악과 가까워지기를 원한다면 클래식이라는 예술음악과 팝 가요 등 대중음악 모두를 편식하지 말고 다양하게 들어보도록 하자. 천상을 울리는 모차르트 교향곡이나 정의롭고도 극적인 베르디 오페라도 좋고, 장르가 30호인 유명가수 이승윤의 〈게인 주의〉나 〈예술이야〉도 환영한다. 어떤 학자들은 나쁜 진동은 사람의 근육과 신경, 혈액 순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역설한다. 또한 파워풀한 사운드로 연속적으로 고음을 내지르는 락이나 격렬한 리듬을 동반한 테크노 음악 등 소위 낯선 음악에 대한 경고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나 찬송가나 가곡처럼 정제된 음악만 들을 수는 없다.

  행복한 봄날이 흘러간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름다운 오월에는 꿈처럼 클래식을 들어보자. 나아가 아무런 조건 없이 친숙하고도 낯선 음악에 봄을 닮은 가벼운 도취의 순간을 허락해보자.

 


한정원 피아니스트.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 대학교에서 독주와 실내악을 전공하고, 최고연주자과정(Konzertexamen)을 마쳤다. 이태리 디노치아니 국제콩쿨 특별대상을 받았고, 유럽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하던 중 귀국하여 십여 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일송출판사에서 악보해설집 출간하였으며, 현재 국내외로 많은 연주 활동 중이다.

 

* 《쿨투라》 2022년 5월호(통권 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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