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현실을 담은 영화, 영화를 닮은 현실
[영화 월평] 현실을 담은 영화, 영화를 닮은 현실
  • 조희선(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 승인 2019.03.25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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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때로 KBS 장수 프로그램 <인간극장>의 이름을 지은 주인공의 통찰력에 감탄하곤 한다. 인생이라는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각자의 역할에 충실 한 이들이 모인 이 세상은 정말 거대한 극장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대본 없이 인생의 찰나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선보이는 삶의 궤적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에 어떤 소설보다 흥미롭다. 다수의 영화가 실화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길어 올린 특별한 이야기가 지닌 힘은 생각보다 세니까.

 영화 <그린북>은 뜻밖의 여정에 동행한 두 남자가 나눈 특별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운전석에 탄 백인 남자와 상석에 앉아 두 팔을 벌린 채 정면을 응시하는 흑인 남자가 실린 포스터부터 호기심을 자극 하는 작품이다.

 두 사람의 사연은 이렇다. 1962년 뉴욕의 한 클럽 에서 일하던 이탈리아계 이민자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어느 날 클럽이 문을 닫으면서 졸지에 백수 신세가 된다. 때마침 토니는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돈 셜리는 흑인들에게 특히 위험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기 위해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했던 참이다. 사실 토니는 평소 흑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터라 그의 아래에서 일을 하는 게 썩 내키지 않지만 일을 무사히 마치면 보수를 높이 쳐주겠다는 돈 셜리의 제안에 그의 운전기사 겸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처음엔 삐걱거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돈 셜리와 달리 토니는 운전을 하던 중에 치킨을 우걱우걱 씹어 먹고 닭뼈를 도로에 버리는 것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다. 처음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두 사람은 8주간 동고동락하면서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게 된다.(격식에 예민했던 돈 셜리가 어느새 맨손으로 치킨을 먹게 될 정도였으니 둘이 마음을 터놓게 된 건 분명해 보인다.)

 두 남자의 ‘좌충우돌 로드무비’는 동명인물들의 실제 이야기다.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는 어릴 때부터 들어온 아버지의 극적인 우정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참여했다.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에 배어든 잔잔한 웃음과 감동이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데운다. <덤 앤 더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내겐 너무 가 벼운 그녀> 등을 연출한 피터 패럴리 감독의 노련한 연출력이 한몫한 덕분이다. 돈 셜리가 실제로 즐겨 연주했던 곡까지 들어볼 수 있으니 영화관에서 마주할 영화로 손색이 없다.

 영화의 결은 다르지만 두 여성의 연대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크레이그 맥닐 감독의 <리지>다. 이 영화는 1800년대 미국을 발칵 뒤집은 잔혹한 살인사건이 바탕이 됐다. 메사추세츠의 대부호 보든 가문의 둘째 딸 리지 보든이 자신의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사건이다. 특히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잔혹한 수법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로 떠올라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책, 연극, 드라 마 등의 소재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살인 사건의 전말보다 리지 보든(클로에 세비니)의 내면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호시탐탐 아버지의 유산을 노리는 새엄마와 삼촌에 대한 경멸,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 등 리지가 느꼈던 복잡다단한 감정과 실제 살인 현장에 함께 있었던 하녀 브리짓 설리번(크리스틴 스튜어트)과의 내밀한 관계를 깊이 들여다본다.

 새장 같은 답답한 삶을 살던 리지 앞에 나타난 새 하녀 브리짓은 삶의 활기를 일깨워주는 인물이다. 리지는 브리짓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숨죽이며 집안일만 하던 브리짓은 마음이 힘들 때 리지에게 기댄다. 서로 계급은 다르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절대적인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두 여성이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관계를 자극적이지 않고 긴밀하게 드러내는 건 무엇보다 클로에 세비니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호흡 덕분이다. 특히 광기와 불안에 사로잡힌 리지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 세비니의 연기가 두드러진다.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호 침몰 사건을 소재로 한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영화 <쿠르스크> 역시 사건을 마주했던 당사자들의 내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2000년 8월 러시아 핵잠수함 쿠르스크가 출항 이틀째 두 차례에 걸친 내부 폭발로 침몰한다. 선원 118명 중 23명의 생존자가 살아남은 채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러시아 정부의 안일한 대처로 전원이 사망하고 만다.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깊은 바닷속 잠수함에 고립된 선원들의 태도다. 당장 숨이 멎을지도 모르는 긴박한 순간 속에서도 이들은 애써 서로를 다 독인다. 특히 남아있는 선원들을 침착하게 지휘하던 7구획의 부대장 미하일(마티아스 쇼에나에츠)이 희망을 기대하기 힘든 순간에서 아내 타냐(레아 세 이두)와 아들 미샤(아르테미 스피리도노프)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한편 기술력 부족으로 제대로 된 구조를 하지도 못하면서 국제 사회의 원조도 거부하고 선원 가족들에게는 구조를 하고 있다고 일관하는 정부 관계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차오른다.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하는 어른들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미샤의 서늘한 눈빛은 어떤 일침보다 따갑다.

 실화 그대로를 완벽히 재구성한 것은 아니지만 레바논의 참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 <가버나움>이 지닌 의미는 여러모로 특별하다. 지난 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뉴스로 접했으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지구 먼 곳의 이야기를 심장 가장 가까이로 당겨온다.

 출생 기록이 없어 자신의 나이를 알지도 못한 채 생업 전선에 뛰어든 베이루트 빈민가 소년 ‘자인’이 자신의 부모를 고소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사정을 들여다보면 자인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집안의 장남인 자인은 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어린 동생들과 과일주스를 판다. 자인의 부모는 또래처럼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싶은 자인의 의견은 묵살한 채 돈벌기를 강요한다. 자인은 여동생 사하르를 슈퍼마켓 주인에게 팔 듯 시집을 보낸 부모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난다.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이 세상에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해당 역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실제 인물들로 캐스팅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는 거리에 내몰린 아이들과 함께 불법체류자들의 신산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영화의 유일한 설정은 소년이 부모를 고소한다는 것이라고 밝힌 나딘 라바키 감독은 거리의 아이들이 “나는 여기에 있는 게 행복하지 않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것을 듣고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연 주인공 ‘자인’을 연기한 시리아 난민 자인 알 라피아다. 실제로 거리에서 배달일을 하고 있던 중 라바키 감독의 눈에 띄 어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깡마른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삶의 무게와 큰 눈동자에 담긴 세상에 대한 울 분은 명배우라도 감히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현실적이다.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던 자인 알 라피아는 이 영화가 지난해 칸영화제에 초청된 후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8월 가족들과 함께 노르웨이에 정착했고 생애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게 됐다고 한다. 제작진은 영화에 출연했던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가버나움 재단’도 설립했다. 새삼 영화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가볍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쿨투라》 2019년 2월호(통권 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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