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탐방] 예술, 근대로路를 걷다: 서울 고희동미술관 & 1호 서양화가 고희동
[미술관 탐방] 예술, 근대로路를 걷다: 서울 고희동미술관 & 1호 서양화가 고희동
  • 김명해(화가, 본지 객원기자)
  • 승인 2022.05.05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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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15추정)_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15추정)_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번 미술관 탐방은 서울 종로 북촌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한옥 주거지역이자, 사적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거리박물관이라 불리는 곳이다. 특히 경복궁과 마주하는 삼청동길 주변에는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원서동에는 전통 기능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어 어느 곳을 먼저 방문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종각역에서 ‘종로01’ 마을버스를 타고 인사동과 낙원상가를 살짝 거쳐 운현궁을 지나 창덕궁 담장을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면, 고즈넉한 한옥과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북촌이다. 조선시대 궁녀들이 빨래를 했던 빨래터 근처에 내리니, 골목입구에 ‘원서동 고희동 가옥’과 ‘종로구립 고희동미술관’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띈다. 벽돌담장에 조그마한 하늘색 철대문집에 들어서면 잔돌이 깔린 아담한 마당에 오래된 가옥과 더불어 묵묵히 이 곳을 지켰으리라 짐작된 은행나무 한 그루, 그리고 눈썹지붕 아래 집주인을 알려주는 현판 ‘춘곡의 집’. 바로 고희동 화가의 가옥이자 미술관이다.

미술관 전경
미술관 전경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1886-1965)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다. 이 가옥은 그가 일본 유학 후 돌아와 1918년에 직접 설계한 한옥으로, 41년 간 거주하며 생활한 공간이다. 전통 가옥 구조의 단층집으로 사랑채(사랑방, 화실), 행랑채(자료실, 현관), 안채(1·2·3전시실)가 서로 연결되어 구성된 근대적 한옥이다. 즉 전통한옥의 구조를 기본으로 갖고 있으면서 안채와 바깥채를 오가기 편하도록 연결된 복도와 ‘ㅁ’자 구조로 생긴 작은 중정마당과 뒷마당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다. 또한 이곳은 고희동 화가의 다양한 작품이 탄생한 곳이자 당대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한 공간으로, 한국근대미술의 산실인 동시에 일제강점기 한옥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의미 있는 가옥이다. 그렇기 때문에 2000년대 초반 고희동 가옥이 헐릴 위기에 처했을 때 북촌 주민과 시민 단체에서 보전운동을 펼쳐 2004년 ‘원서동 고희동 가옥’이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제84호로 등재되어 2008년 종로구에서 매입하여 2011년 복원 및 보수공사를 하였다. 2012년 화실과 사랑방을 재현하고 2019년 종로문화재단이 위탁운영을 맡아 고희동 화가를 알리는 전시 및 다양한 연계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서울 종로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출발지이자,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살면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교류한 지역으로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미술 분야에서 근대는 서양화풍이 들어온 19세기 말경부터 광복을 맞이한 1945년까지로 ‘근대회화기’라 일컫는다. ‘근대회화기’는 20세기 초 서양화법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면서 전통서화에서 벗어나 근대적 미술로 이행하였고, 서양의 회화·조각·건축 개념이 등장한 시기이다. 그래서 서양화 공부를 위해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화가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귀국하여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개척하는 한편 전통회화와 접목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종로를 중심으로 서양화의 토대를 마련한 화가가 바로 고희동이다.

고희동은 서울 비파동(관수동) 출생으로 역관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외국어 교육기관인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수학한 후 1904년 대한제국시기 광학국 주사로 임명되어 궁에서 프랑스어 통역 및 문서 번역을 하는 관리가 되었다. 궁내부에 근무하면서 외국인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서양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서양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직접 처음 만난 사람으로는 불란서 사람 ‘레미옹’이란 사람이었지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데생을 주장 많이 하는 걸 봤는데 인물 같은 것을 목탄화로 쓱쓱 그려내는 걸 처음 보니까 여간 완연한 게 아니야. 그래 그 때부터 그와 상종을 하다가 결국은 그에게서 자극을 받아가지고 동경으로 간 게지요.
  - 고희동, 「신문화 들어오던 때」, 『조광』, 1941. 6

을사늑약(1905)으로 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관료생활에 회의를 느낀 고희동은 새로운 그림의 세계로 인생행로를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당대 미술계 대가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 문하에서 취미로 전통서화를 배웠지만 중국화풍을 답습하는 데 실망하며,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1909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 동경미술학교 양화과로 관비 유학을 떠난다.

미술관 앞마당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가옥 현관이다. 신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왼쪽 방이 자료실인데, 이곳에 고희동 작품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화작품 〈자화상〉 3점(영인본)이 있다. 이 자화상들은 1915년 졸업을 전후로 그린 작품들이다. 졸업 시기에 그린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현재 도쿄예술대학(전 동경미술대학)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행히 이 학교가 졸업생에게 논문 대신 자화상을 제출하도록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과 〈부채를 든 자화상〉은 1972년 고희동의 며느리에 의해 이삿짐 꾸러미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으로,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화작품이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1915)_도쿄예술대학 미술관 소장
정자관을 쓴 자화상(1915)_도쿄예술대학 미술관 소장

〈정자관을 쓴 자화상〉과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감색의 두루마기 표현과 밝고 투명한 색의 얼굴빛, 단정한 머리에 화가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인 콧수염, 인물과 대비되는 배경처리로 보아 같은 시기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그것도 일본학교에서 한복에 정자관을 쓴 모습의 자화상이 허락되었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한편으론 고희동 화가의 민족애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부채를 든 자화상〉은 1915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해 여름에 자신의 집 화실에서 그린 작품이다. 전통 여름옷인 모시 적삼을 풀어헤치고 부채를 든 채 생각에 잠긴 자신의 모습을 밝고 투명한 색조로 화사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작품 속 자화상 뒤에는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풍경화가 보이고 옆에는 양장본 서적이 여러 권 꽂혀 있어, 전통성을 유지하면서도 서양화된 생활을 누리던 부유한 개화 지식인의 삶을 보여주는 당대의 생활 모습을 짐작게 한다.

신선한 색채의 표현감각, 대범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인 3점의 자화상은 당시 일본의 미술사조인 사실주의와 서구의 흐름인 인상파의 색채감을 동시에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유입되기 시작한 초기의 상황을 보여준다. 또한 자화상은 모두 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인데, 평론가들은 이를 화가의 민족적 자긍심의 표현이라고 평하였으며, 고희동의 막내딸(고계본)의 회상도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언젠가 내가 그랬어요. “아버지는 동경까지 가셔서 공부를 하셨으면서 초상화는 맨날 한복 입고 있는 걸 그리셨냐?” 고 했더니, “내가 한국 사람인데 그럼 뭘 입느냐?”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평생 한복을 입으셨어요.
  - 김란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에디터, 2014

귀국 후 고희동은 국내에 서양화를 이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신문물의 급진적인 수용이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미술계를 새로이 개척해 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 무렵 일반인들이 가진 양화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무지하였는지를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6년 만에 졸업인지 무엇인지 종이 한 장을 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전 사회가 그림을 모르는 세상인데 양화를 더군다나 알 까닭도 없고 유채油彩를 보면 닭의 똥이라는 둥, 냄새가 고약하다는 둥, 나체화를 보면 창피하다는 둥, 춘화도를 연구하고 왔느냐는 둥, 가지각색의 말을 들어가며 세월 보내던 생각을 하면 나 한 사람만이 외로운 고생을 하였다는 것보다 그 당시에 그렇게들 신시대의 신지식과 신사조에 캄캄들 하였던가 하는 생각이 나고…
  - 김란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에디터, 2014

옥녀봉도(1947)
옥녀봉도(1947)

서양화에 대한 주위의 몰이해를 견디지 못한 고희동은 1920년 후반에 서양화 화단의 구심적 역할을 포기하고 동양화로 전향하여 전통 수묵화법에 서양화의 색채 및 기법을 쓰는 절충양식의 새로운 한국화를 시도하였다. 특히 청색을 애호한 고희동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대담한 필치와 화려한 원색을 화폭에 구현하여 말년까지도 기운생동이 넘치는 작품세계를 이어나갔다.

미술관 1·2·3전시실에 전시된 그림이 고희동이 동양화와 서양화의 절충을 시도한 작품들이다. 특히 몇 차례의 금강산 유람을 통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다수의 〈금강산도〉를 제작했다. 〈금강산도〉는 금강산 및 그 주변의 해금강 지역과 관동8경의 명승지를 재현한 그림으로, 금강산은 민족의 자긍심과 정신성을 대변하면서 한반도 분단 이후 갈 수 없게 된 그리움과 한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산수화는 전통 산수화법으로 표현한 것도 있지만 산수를 선보다는 면으로 처리하여 수채화적 경향이 보이고, 채색이 두드러진 점을 통해 동서양 절충양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희동은 1918년 이 가옥을 지을 당시 서화계의 중진들과 뜻을 모아 최초의 한국인 서화가들의 모임인 ‘서화협회’를 결성하고 근대서화 전람회도 개최한다. 서화협회는 식민지 저항 의식에서 출발한 조선의 범미술 단체로 신구서화계의 발전, 동서양미술의 연구, 향학 후진교육을 목적으로 창립하였다. 고희동은 이러한 서화협회를 이끌며 후진을 양성한 교육자로서 신미술 운동을 주도하고, 민족미술운동에 매진했던 행정가로도 큰 업적을 남긴다.

춘강화오도(1964)

고희동 가옥 사랑방 한 편에 그가 그린 작품 〈아회도雅會圖〉가 보인다. 그림에서처럼 고희동은 당대 문화예술인들 - 자애로운 스승 안중식과 조석진, 아버지 친구이자 동지였던 오세창, 시대의 기인인 육당 최남선, 절친 이도영 - 과 함께 신문화와 신미술을 논하고, 친목도모를 위해 이 사랑방에 자주 모였다고 한다. 고희동은 이들과의 만남으로 우리나라 근대회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양화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출입했던 어린 제자들 - 장발, 구본웅, 이제창, 안석주, 도상봉 - 은 훗날 한국 근현대미술의 장을 연 화가로 성장하였다.

고희동 화가가 일생 동안 벌여 온 미술계에서의 복잡다단한 활동에 대해 너무나 짧은 기록만 남아 있어 그의 이름 앞에 늘 따라 붙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말 이외엔 잘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업적에 대한 증빙자료 수집과 활발한 연구로 전기傳記와 평전評傳이 출판되어 이제는 그를 수식하는 표현이 정말 많아졌다는 사실이 기쁘다. 100년 전 고희동과 그의 벗들이 꽃피운 이야기소리가 아직도 이 가옥에 울려 퍼지는 듯하며, 왜 많은 예술가들이 북촌으로 작업실을 구해 모여드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왠지 모를 예술적 기운이 느껴진다.

 

 


참고자료
종로문화재단 https://www.jfac.or.kr
김란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에디터, 2014

이미지 제공 종로문화재단

 

* 《쿨투라》 2022년 5월호(통권 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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