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테마 고양이] 나와 너
[3월 테마 고양이] 나와 너
  • 계피(밴드 가을방학 보컬리스트)
  • 승인 2019.03.25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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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질이 불같은 고양이를 맡아 기를 때였다. 고양이 성격에 대해 내가 불평하자 친구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고양이는 키우는 주인 성격을 닮는대.” 순간 멈칫했지만 내 성격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것은 곧 수긍하고 말았다. 온화하던 고양이가 나와 함께 있다가 성질이 나빠진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나는 무던한 사람은 아니었다. 집 바깥에 나갈 때마다 겁이 나는 탓에 나한테 발톱까지 세우며 매달리는 녀석을 보면서 친구의 말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이게 내 모습이기도 한 것일까, 하고. 나를 비추어보는 과정에서 녀석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쉽게 화를 내는 것은 그저 인내심이 부족해서일수도 있지만 겁이 많아서 스스로를 방어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그런 것처럼 고양이도 그렇다.

사람이 다 다른 것처럼 고양이도 다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을 고양이를 여러 마리 길러보기 전에는 사실 잘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고양이란 개에 비해 자기 멋대로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는 식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양이 중에는 애교가 많아서 거실로 부엌으로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이 있다. 싫은 내색을 하려면 확실하게 콱 깨물어서 본때를 보여주는 녀석이 있고 살짝만 깨물어서 의사표시만 하는 녀석이 있고, 껴안으면 몸에 힘을 다 풀고 흐늘흐늘하게 안기는 녀석이 있고 몸에 힘을 잔뜩 준채로 ‘주인인 네가 안고 싶다니 잠시만 참아줄게’ 라는 식으로 견디는 녀석이 있다. 처음 고양이를 기를 때는 그 솜뭉치 같은 부드러운 몸과 동그랗고 작은 발이 좋았다. 밥 주고 화장실 치워주는 일을 하는 의무를 하긴 했지만 생동감 있는 장난감 이상으로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점점 고양이라는 생물체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면서, 실은 고양이를 덜 귀여워하게 되었다. 고양이는 귀여워하기만 할 대상이 아니었다. 각자의 독특한 마음의 방식과 의지가 있는 생물이었다. 고양이는 내가 사는 공간을 같이 점유하고 있지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료 같은 존재에 가까워졌다. 같이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서로 기분을 알아줄 때도 있고 몰라줄 때도 있다. 언제나 잘해주기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늘 잘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결국엔 더 귀찮아지게 된다.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저서에서 이 세상 모든 관계는 ‘나와 너’가 아니면 ‘나와 그것’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애정이라고 말하면서 대상화하는 관계가 바로 ‘나와 그것’의 관계다. 고양이가 귀여워하기만 할 대상일 때는 귀엽지 않으면 버리게 된다.

고양이의 두 뺨을 손바닥으로 만질 때 고양이는 기분이 좋아서 눈을 감고 가르릉거린다. 모든 주인이 좋아하는 순간이다. 그러다 고양이가 눈을 번쩍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 초록색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걸 나도 볼 수 있다. 일직선으로 지그시 내 눈을 들여다보는 고양이의 시선을 나도 맞받는다. ‘나와 너’, 두 존재가 어떤 아양도 겉치레도 거리낌도 없이 마주보는 순간, 나는 마주한다는 사실에 순간적인 전율을 느낀다. 왜인지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기분이 든다. 그럴 때 고양이는 내가 돌봐주어야 하고 나보다 약한 생물이 아니다. 고양이는 생각하고 느낀다. 살아있고, 그것 자체로 대등하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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