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속의 詩] 신철규 시인의 「슬픔의 바깥: 낮달」
[새 시집 속의 詩] 신철규 시인의 「슬픔의 바깥: 낮달」
  • 신철규(시인)
  • 승인 2022.06.0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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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바깥
- 낮달

신철규


  보라색 보자기를 든 여인이 사거리에 서 있다 꼼꼼히 싸맨 보자기 안에는 쟁반에 담긴 커피포트와 찻잔 두 개가 있을 것이다 보자기 매듭이 토끼 귀처럼 쫑긋 솟아 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도 바닥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을 힐끔거리며 지나치는 행인들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려 귀 뒤로 넘긴다 오래전 소중한 사람을 배웅하고 난 뒤 한참을 돌아서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 뺨이 파인 낮달이 허공에 떠 있다 그녀 앞 횡단보도가 한없이 펼쳐진 계단처럼 누워 있다 멀리서 불법 유턴을 하고 쏜살같이 달려온 파란색 소형 승합차가 멈춘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차에 올라탄다 그녀가 떠나고 다방 안 낡은 어항속의 금붕어는 숨이 가쁜지 수면 밖으로 입을 내밀고 있다 흐린 유리창에 붙은, 다방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셀로판지의 좌우가 뒤집져 있다 반쯤 남은 커피는 식었고 가라앉아 있던 프림이 떠올라 달무리가 진다

- 신철규 시집 『심장보다 높이』(창비) 중에서

 


신철규 시인은 1980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등이 있음.

 

* 《쿨투라》 2022년 6월호(통권 9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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