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Theme] 욕망과 품위 사이, 올 여름 가장 로맨틱한 멜로드라마: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
[6월 Theme] 욕망과 품위 사이, 올 여름 가장 로맨틱한 멜로드라마: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
  • 설재원(본지 에디터)
  • 승인 2022.06.04 0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헤어질 결심〉 스틸컷

박찬욱이 그리는 ‘어른들의 로맨스’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6년 만에 돌아온 ‘깐느박’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 제75회 칸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상영 직후 영국의 저명한 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로부터 별 다섯 개를 받는 등 평단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마지막 날까지 《스크린 데일리》 종합 최고 평점을 지킨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에게 감독상Prix de la Mise en Scène을 안겼다. 아쉽게도 황금종려상의 영예는 다음 기회로 미뤄졌지만, 감독상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박찬욱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상이기도 하다.

영화가 공개되는 당일만 해도 칸 현지에서는 같은 날 월드프리미어 상영작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라임스 오브 더 퓨처〉에 대한 관심이 〈헤어질 결심〉보다 더 컸다. 하지만 첫 상영 후 입소문을 탄 〈헤어질 결심〉은 영화제 기간 동안 이번 칸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으로 우뚝 올라섰다. 팬데믹이 만들어낸 올해 영화제의 특징 중 하나로 매일 아침 7시에 온라인 예매가 열리는데 그래서인지 아침 첫 상영은 평소보다 빈자리가 꽤나 보이곤 했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두 번째 날 8시 30분 재상영에서도 2,300여 석의 뤼미에르 대극장을 가득 채웠다. 극장 곳곳에는 나처럼 전날 〈헤어질 결심〉을 보고 다시 한 번 극장을 찾은 얼굴들도 더러 보였고, 이들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도 한동안 극장을 떠나지 않은 채 환호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품위 있게, 헤어질 결심

박찬욱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죄의식’이라면 이번 작품에서의 죄의식은 작품내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품위’와 연결된다. 살인사건의 용의자 서래(탕웨이 분)와 그녀를 수사하는 형사 해준(박해일 분) 사이의 로맨스가 특별한 것은 두 인물 모두 결코 각자의 선을 넘지 않고 품위를 지키기 때문이다.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해준에게 서래에 대한 의심은 점차 관심이되고, 자신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준 해준에게 주도면밀했던 서래 역시 빠져든다.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던 서래는 ‘마침내’ 가장 로맨틱한 방법으로 해준의 마음 깊은 곳에 영원히 남는 방법을 선택한다.

욕망과 품위 사이에서의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멜로드라마인 만큼, 이번 작품에서는 감독의 전작보다 눈에 보이는 거칠고 폭력적인 묘사가 줄어들었다. 허나 두 인물이 안고있는 억눌린 욕망과 내재된 폭력성은 작품 내내 더 깊고 짙게 드리워 있다. 도덕보다는 겸손한 의미에서의 품위를 다루고 싶었다는 박 감독은 파도처럼 서서히 감정을 쌓아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를 연상케 하는 서래와 해준의 절제된 로맨스는 더 차갑게, 그리고 더 담담하게 그려지고 있으며, 여기에 기품 있는 서스펜스가 가미되어 있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헤어질 결심〉 스틸컷

서래를 짓누르는 산과 해방하는 바다

최종 편집단계에서 변경되었지만 본래 〈헤어질 결심〉은 1부 ‘산’, 2부 ‘바다’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산이 전 남편과 어머니의 공간이라면, 바다는 서래와 해준의 공간이다. 부산에서 진행되는 1부가 고전적인 누아르 장르의 틀을 따라 서래의 히스토리를 보여주고, 안개가 짙게 깔린 이포에서 펼쳐지는 2부에서는 비로소 서래가 과거를 떨쳐내고 본격적인 박찬욱식 멜로드라마가 시작된다. 산과 바다의 극적인 대비와 공간을 따라 변화하는 두 배우의 감정선은 영화의 중요한 즐길거리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극을 이끌어 가는 힘은 플롯보다는 안개 자욱한 이포가 자아내는 분위기에 있다. 짙은 바다안개 속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고 추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추측하면 할수록 결국 더욱 깊은 안개에 빠져 허우적댈 뿐이다. 무의미함 속에서 상황상황마다 미묘한 감각을 활용해 극을 끌고가는 감독의 섬세함은 박찬욱의 새로운 발견이며, 마지막 순간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은 전작들에서 보여주던 절정에서의 폭발력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강렬한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헤어질 결심〉 스틸컷
〈헤어질 결심〉 스틸컷
〈헤어질 결심〉 스틸컷
〈헤어질 결심〉 스틸컷

영화의 기본에 충실하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 작품을 소개하며 미묘하게 스며드는 ‘고전’을 이야기한다. 2022년에 고전영화로 돌아간다니 지루한 구식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박찬욱이 만들어낸 우아하면서도 고전적인 영상을 보면 왜 그가 ‘고전’을 말하는 지 알 수 있다. 영화적 표현보다는 메시지 위주의 영화들이 강세를 보이는 세계영화 트렌드에서 박찬욱은 다시 영화의 기본으로 돌아가 카메라의 위치와 조명,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 등을 고민하며 장면 하나하나를 공들여 빚어냈다. ‘말씀’보다 ‘사진’이 좋다는 서래가 떠오르는 지점이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던 정정훈 촬영감독이 아닌, 처음으로 합을 맞춘 김지용 촬영감독과의 협업도 빛났다. 〈달콤한 인생〉으로 이름을 알린 김지용 촬영감독은 누아르와 로맨스가 섞여있는 〈헤어질 결심〉 촬영에 꼭 맞는 적임자였다. 특히 감독이 가장 공들여 찍었다고 하는 후반부의 심문 장면이나 바위를 때리며 밀려드는 파도와 해안선은 압권이다. 압도적인 미장센이 돋보인 〈헤어질 결심〉은 명실상부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또한, 박 감독은 영화제 기간 내내 영화관에서 다같이 영화를 보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가씨〉 이후 TV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이나 유튜브용 단편영화 〈일장춘몽〉도 내놓았지만, 누가 뭐래도 그의 작품은 영화관의 큰 스크린과 사운드로 만날 때 가장 빛난다. 감독의 바람대로 개봉을 1달 남짓 남긴 〈헤어질 결심〉이 엔데믹을 맞아 올여름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길 바라본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1시간 78분은 영화관에서 즐기기 딱 좋은 러닝타임 아니겠는가.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쿨투라》 2022년 6월호(통권 96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