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김지하 추모 좌담: 생명사상의 선구자 김지하를 위한 변론
[7월 Theme] 김지하 추모 좌담: 생명사상의 선구자 김지하를 위한 변론
  • 유홍준, 임진택, 정성헌, 김형수, 홍용희
  • 승인 2022.07.0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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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_2022년 6월 21일 오전 10시
곳_프레스센타 19층 기자클럽
사진_김한솔 기자
녹취정리_쿨투라 편집부


유홍준(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임진택(창작판소리 명창) 정성헌(한국 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 김형수(시인) 홍용희(문학평론가, 사회)

  홍용희(사회자) 김지하 선생님(1941~2022)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은 ‘타는 목마름에서’에서 ‘생명’의 바다를 횡단한 이 땅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며, 사상가이고, 문화운동가이며, 화가였습니다. 오늘은 김지하 선생님과 가까운 자리에서 문화운동, 생명운동, 문단활동을 하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체험적인 기억, 증언, 평가 등에 대해 경청하고 기록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유홍준 선생님께서 쓰신 추사 김정희 평전에 보면,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하셨는데, 김지하 역시 그러한 것 같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은 ‘저항’에서 ‘생명’에 이르기까지 가없는 지평을 펼쳐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항과 생명은 표면적으로는 변화의 극단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일원론적인 연속성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 지키기라는 방어적인 국면에서 생명의 문화를 일구어 나가는 본질적이고 주체적인 차원으로 나아간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지하 선생님에 대한 언론의 평가나 인식은 주로 저항의 국면만 부각되고 있어서 아쉽습니다.

  오늘 추모 좌담이 김지하 선생님의 삶의 역정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 일생에 걸쳐 크고 높고 위태롭고 환한 길을 숨차게 걸었던 김지하의 삶의 역정의 본모습에 대해 한마디로 ‘이것이다’ 하고 집약적으로 말해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됩니다.

임진택
임진택

  위악자僞惡者 김지하를 위한 변명

  임진택 나도 지금 글을 하나 쓰고 있는데, 독자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서 「위악자僞惡者 김지하를 위한 변명」 이렇게 제목을 붙여놨어요. 위선자僞善者의 반대말로 만들어 본 조어입니다. 위선자는 당연히 비난 받아야지요. 그러나 위악자는 다르지요. 김지하는 선한 사람이면서 악한 역할을 목숨을 걸고 자처한 위악자였어요.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 용공조작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과정이나, 그로인해 사형 언도까지 받은 사람이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고 옥중수기 「고행… 1974」를 통해 폭로한 것은 분명 ‘목숨을 건’ 위악자의 행동이었지요. 그런데 지배권력 쪽 뿐만 아니라 반대로 진보진영 쪽에 대해서도 위악자의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자기 명예를 훼손시키고 오욕을 다 뒤집어쓰면서 말이지요. 한 개인에게 있어 영욕榮辱의 굴곡이 이처럼 큰 경우를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데요. 그 빌미가 소위 1991년 ‘죽음의 굿판’ 사건과 2012년 ‘박근혜 지지’를 둘러싼 풍파였지요.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해 좀 정확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소위 ‘죽음의 굿판’ 사건에 관련해서는, 그 신문 칼럼의 제목을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어요. 신문 칼럼의 원래 제목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습니다. 다만 젊은이들을 향해 질타하는 어조가 매우 강했던 것은 사실인데, 어떻든 김 시인이 하고자 했던 주장은 한마디로 “사람의 생명은 혁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조선일보의 소위 ‘미다시’, 즉 중간제목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로 나오자 그 자극적인 부제副題가 전면 부각되면서 본래의 의도가 왜곡 와전되어버린 것이지요.

  ‘박근혜 지지’ 풍파도 그렇습니다. 김지하는 박정희와 철천지 원수지간이지만, 대선 때 박근혜의 방문을 받아들인 데는 나름 이유와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박정희와의 악연을 끊고 국민통합의 길을 모색하려는 것, 또 하나는 생명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하자면 여성(또는 여성성)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를 만나려면 배론성지 지학순 주교 묘지에 가서 지난날을 참회하고 오라는 것 등이 있었지요. 그런데도 어떤 평론가가 이를 두고 변절 이런 단어를 쓰면서 심지어는 ‘박근혜 품에 안겼다.’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이것은 나는 잘못된 발언이라고 봅니다. 김지하의 행동은 ‘권력자 박근혜 품에 안긴’ 것이 아니라 ‘원수의 딸 박근혜까지도 포용했다’라고 말해야 옳았을 겁니다. 아마 당시 문재인 후보가 찾아왔더라도 김지하는 당연히 방식을 달리하여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두고 민주 진보진영 사람들로부터 ‘배신’ 또는 ‘변절’ 말이 낙인처럼 가해졌는데, 나는 이 단어들의 정확성에 대한 점검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신이나 변절이라는 게 뭐냐 하면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꿔서 자신의 사사로운 안위나 어떤 이득을 취했을 때 쓰는 말이지요. 그런데 김지하는 그 일로 해서 어떤 안위나 이득을 취한 것이 전혀 없어요. 그의 질타는 배신이 아니라 동지 후배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부터 나온 것이고, 그의 포용은 변절이 아니라 더 큰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확장과 통합의 모색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개의 사건은 김지하 시인 스스로도 훗날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라고 술회했지요. 그렇다면 이런 깊은 오해를 불러올 발언이나 판단이 도대체 왜 불거져 나왔을까?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어요. 지하 형님은 오랜 독감방 생활 속에서 깊은 병리학적 증세를 얻은 게 사실입니다. 가혹한 외상外傷으로 인한 트라우마의 일종인데, 감옥에서의 고통스런 인내와 사유는 섬광閃光과 섬망譫妄을 동시에 동반했어요. 섬광은 우주생명·자연생명·인간생명에 대한 깨달음으로 왔고, 섬망은 뇌 활동을 훼방하는 어두운 그물로 작동한 것이지요. 김지하가 불시에 저지른, 정상을 벗어난 언행은 대체로 섬망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 정신착란과 연관이 있었어요.

  홍용희 네. 위악자라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김지하의 삶의 역정을 환하게 조망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특히 후반기의 배신, 변절 등으로 비난받게 되는 주요 사건의 실체를 밝혀 주었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의 삶에서 낙차 큰 영욕의 굴곡을 불러온 사건이지만 정작 제대로 된 차분한 이해와 해석의 과정이 결여되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김지하 선생님의 1991년 5월 5일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일갈 역시 사실은 학생 운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연쇄 분신자살로 이어지는 잘못된 운동 방식을 질타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지요. 죽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슬기롭고 창조적인 저항’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시대적 감성을 고려하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전달하는 어법이나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김형수 선생님은 당시 가장 뜨거운 대척점의 현장에 계셨지요.

김형수
김형수

  「죽음의 굿판…」은 ‘생명운동’을 위한 고언

  김형수 당시에 나는 정말 큰일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조선일보와 민족지성 간의 격전을 불사하는 도발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는데, 내가 속한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후신이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74년 김지하를 구명하려고 전선에 뛰어든 동료 및 선후배 문인들이 만든 결사체였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반드시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될 사안이었으므로 청년위원회의 뜻을 모아 내가 「젊은 벗이 김지하에 답한다」를 쓰게 되었지요. 김지하 시인이 작가회의의 뜻을 버린다함은 당신의 과거를 버리는 것이 되는 국면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젊은 운동권 친구들처럼 저 역시 김지하 미학을 깊이 사사한 신도였으므로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산문 「고행… 1974」 발표 이후, 흑산도에서 체포되어 목포를 통과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숨 가쁜 ‘고행’의 길을 따라 미학에서 정치로, 정치에서 사상으로 한없이 확장되는 김지하의 여정은 그 자체로 저희들의 일상을 깨우는 나침반이고 죽비였지요. 그래서 더욱 더 “선생님이 하루빨리 조선일보 곁이 아니라 ‘남南’의 자리로 돌아와야 우리를 꾸짖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리에게서 김지하라는 스승을 빼앗아간 것이 부와 권력과 명예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매우 중시했으나, 그럴수록 괴로운 것은 모든 게 국가폭력뿐이었겠는가 생각될 때였습니다. 한 인간의 강고한 존엄의 이면에 개체의 나약함은 없었는가, 이런 문제 역시 지금도 숙제입니다.

  그래도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이후 어느 날 갑자기 김지하 시인이 박정희기념관 반대 1인 시위를 마치고 작가회의 사무실에 들렀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김지하 시인은 ‘생명운동’을 위한 네 개의 고언 중 하나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인데, 하필 그 글을 1번으로 조선일보에 발표한 게 잘못이라고, 까마득한 후배들과 마주 앉아 사과했습니다. 이때 저는 개인적으로 ‘매우 위대한 역사적 인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우리 문학사에서 거장이 자기 발언을 사죄한 최초일 겁니다.

  김지하 시인은 공구과일功九過一

  유홍준 사회자가 처음에 숙제 내준 대로 정리하면, ‘김지하는 현실의 부조리와 세계의 모순을 혁파하고 참된 인간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사상을 일으킨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중국 등소평이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어요. 나라를 세운 건국의 공로가 크지만 문화혁명이라는 치명적인 과오를 남겼잖아요. 그래서 공칠과삼功七過三, 공은 7이고 과는 3이라고 평가하고 넘어갔어요. 그렇게 보면 김지하 시인은 공구과일功九過一, 공이 9, 과가 1이라 할 것입니다.

  임진택 그 과過 1도 실제로 과오를 저질렀다기보다 과오를 저지른 것으로 오해를 사도록 한 그것이 과오였을 뿐입니다. 장기간 폐쇄된 감옥 독방 생활에서 오는 심신의 쇠약과 병리학적 착란 증세, 그 불가피한 정상이 참작되었으면 합니다.
홍용희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김지하의 삶의 역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많이 해명되었습니다. 저항도 생명이라는 점에서 오롯이 김지하는 생명사상의 선구자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주제를 좀 바꾸어서 김지하의 구체적인 문학, 미술, 생명 운동에 대해 주목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김지하는 1969년 등단하고 1970년 5월호에 『오적』을 발표하면서 일약 문단은 물론 역사의 중심인물로 떠오릅니다. 김지하는 전통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담시’의 양식을 창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담시’는 장황한 수사, 장면의 극대화, 사설의 부연 등을 통한 집단적 신명과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2016년 촛불을 보면서 김지하의 문학적 출발에 해당하는 담시 「오적」, 「소리내력」 등에서 권력자들로부터 억압, 수탈, 착취당하던 주인공 안도, 꾀수 등의 민초들이 역사의 중심으로 살아서 나왔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지하의 담시는 임진택 선생님의 소리에 실리면서 더욱 높고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의 「오적」을 비롯한 「비어蜚語」, 「똥바다」 등을 직접 소리로 구현하시면서 느꼈던 일들이나 작품에 대한 미적 소회가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분신 정국’이 지속되고,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사망할 즈음인1991년 5월 5일자 조선일보에 발표된 김지하의 기고문은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분신 정국’이 지속되고,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명지대생 강경대 군이 사망할 즈음인 1991년 5월 5일자 조선일보에 발표된 김지하의 기고문은 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김지하 담시와 만난 임진택 창작판소리

  임진택 1970년대에 탈춤의 채희완, 노래하는 김민기, 춤꾼 이애주, 마당극과 판소리를 하는 나, 국악 작곡하는 이종구와 김영동… 이렇게들 몇 사람이 이른바 문화운동 1세대인데요. 당시 우리들이 각기 활동을 하면서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연계성, 그걸 종합하는 것을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한 때에 지하 형님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우리끼리 만났다기보다 지하 형을 정점으로 모여든 후배들이었던 셈이지요.

  담시와 판소리를 말하기 전에, 문화운동의 대선배로서 지하 형님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당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양식의 창출입니다. 김지하는 사실 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고 연극인으로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60년대 대학연극에서 김영일(김지하의 본명)은 그의 외삼촌인 연출가 정일성, 배우 최불암 등과 함께 꽤 알려진 이론가이자 배우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0년경부터 희곡을 직접 쓰기 시작하는데, 1972년에 지하 형님이 쓰신 「금관의 예수」라는 작품을 갖고 김민기 김석만 등과 함께 서울대 연극반 인력이 모여 전국 가톨릭 대교구 순회공연을 한 일이 있어요. 그때 가라주로라는 사람이 이끄는 일본의 천막극단이 와서 서강대 야외에서 합동공연을 한 것이 탈脫 무대연극의 가능성을 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아 1973년에 다시 가톨릭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원주에서 김지하 작 「진오귀」라는 농촌계몽 ‘마당극’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다 불발되어 내가 서울제일교회로 가져와서 공연했는데, 탈춤에 바탕하면서도 사실주의와 서사극 양식이 결합된 이 작품이 한국 ‘마당극’의 효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1974년 긴급조치로 피신 중이던 지하 형님의 지도를 몰래 받으면서 김민기가 앞장서고 이종구가 작곡하고 이애주 채희완 임진택이 출연하고 김영동이 연주하고 해서 「소리굿 아구」라는 일종의 토종 음악극을 공연했는데, 여기 참가한 사람들이 바로 문화운동 1세대가 되는 거지요. 70년대초 김지하가 집필하거나 관련한 몇 개의 작품들이 바로 ‘마당극’의 형성 과정이자 산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담시와 판소리에 관해서는 그동안 문학계나 공연계에서 본격적인 비평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운 것이 사실인데요. 나로서는 김지하의 담시를 판소리로 작창해서 공연한 유일한 소리꾼으로서 할 말이 좀 많기는 합니다만, 짧게 요약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는 김시인의 담시 〈오적〉 〈소리내력〉 〈똥바다〉 이렇게 세 바탕을 판소리로 만들어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오적〉하고 〈소리 내력〉은 김지하 시인이 쓴 담시를 단 한 구절도 바꾸거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소리로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그가 써놓은 판소리 문체의 담시 〈오적〉과 〈소리내력〉은 판소리로 공연함에 있어 완벽한 사설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똥바다〉는 많은 수정을 했어요. 〈똥바다〉는 시 작풍이 ‘슈르 리얼리즘’ 계열에 가깝지요. 꼴라쥬라고 하나요. 현대사의 사건들을 다채롭게 배치하고 덧붙이는 신학철 화백의 그림같이 온갖 현실과 상념들이 초현실적으로 전개되는 거라 판소리로 작창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원래 우리 판소리에도 초현실적인 내용들이 상당히 들어있거든요. 심청이가 용궁에 들어갔다가 환생해 온다든가, 흥부 박 속에서 온갖 돈과 재물이 나온다든가 하는 것이 사실은 초현실적인 상상력이지요.

  김지하 시인은 문학으로서의 판소리 사설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흔히 어떤 작가가 판소리 문체로 사설을 쓴다 또는 서사시를 쓴다 할 때, 대개는 4·4조의 운율로 전체를 가득 채우기 십상입니다. 판소리 사설을 정형의 운문으로 된 서사시로 보는 거지요. 그런데 판소리 문체는 정형의 운문으로만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 판소리 문체는 ‘이야기체’입니다. ‘이야기체’는 운문보다는 산문에 가까운 문체이지요. 그렇다고 판소리가 소설이냐 하면 소설은 또 아닙니다. 물론 옛 판소리 춘향가나 심청가 흥보가 등은 채록되어 춘향전·심청전·흥보전 등 소설 형태로 정착되기도 했습니다만, 그 소설체를 다시 판소리로 부르자면 기실 불가능하게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체’는 산문인 듯 운문이고 운문인 듯 산문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이야기체’에는 글자 수로 규정된 음수율音數律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설이 장단을 타면서 음보율音步律을 갖게 됩니다. 김지하 시인의 담시 문체는 음수율과 음보율을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탁월한 작품이지요. 그것을 증명하는 작품이 그의 담시 「비어蜚語」 중 「육혈포 숭배」라는 작품입니다. 「육혈포 숭배」는 몇 년 후 1979년에 벌어지는 박정희 시해 사건을 예언하는 무시무시한 작품인데, 판소리는 판소리이되 창唱 없이, 소리 대목은 없이 ‘아니리’로만 짜여진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로 읽어나가기만 하는 작품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창唱 없이 아니리로만 전개함으로써 으스스한 살벌한 기운이 감돌면서 그 이면裏面이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김지하 시인의 판소리에 대한 이해는 완벽한 수준이고, 그러한 수준에서 구사한 일련의 담시들은 우리 문학사에 있어 대단한 걸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홍용희 네, 소리 명창의 체험적 현장에서 배어나오는 말씀을 매우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의 문예미학론은 1970년 「풍자냐 자살이냐」를 발표하면서 전통민예의 잠재적 가능성과 의미를 날카롭게 제기한 이래, 「민족의 노래 민중의 노래」(1970), 「민중문학의 형식문제」(1985)등을 거쳐 『율려란 무엇인가』(1999), 『예감에 가득 찬 숲 그늘』(1999),『탈춤의 민족미학』(2004), 『흰 그늘을 찾아서』(2005) 등으로 이어지면서 옛 것으로 들어가 새 것으로 나오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의 방법론에 따라 우리 민족민중 민예의 미학을 유현하고도 새롭게 펼쳐 보여주었습니다. 김지하 선생님 미학의 특성에 대해 유홍준 선생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지요.

유홍준
유홍준

  국뽕으로 흐르지 않은 민족민중 미학

  유홍준 김지하 시인이 우리 동학을 얘기하고 전통을 얘기해도 국뽕으로 가지 않았어요. 그것은 이 분이 서양 미학과 서양 예술을 이미 깊숙이 관통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진정한 예술은 무엇인가? 진정한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 이것을 찾으면서 동학으로 가고 생명으로 갔지, 우리 것을 찾겠다고 이쪽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나한테도 헤겔의 제자 칼 로젠크란츠Karl Rosenkranz라고 하는 사람의 『추의미학』을 강조하였고 이탈리아 형이상학파 화가인 키리코Giorgio de Chirico나 멕시코의 민속 주제를 현대회화로 승화시킨 타마요Rufino Tamayo 같은 화가에 주목하라고 했지요. 또 한편으로 김지하의 난초에 나와 있는 화제를 보면, 거기에는 주역에 나오는 대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게 굉장히 많아요.

  그러니까 동양사상의 가장 본질적인 것도 들어가고, 서양 미학도 깊이 통과를 하면서, 결국은 수운과 해월에서 보여주고 있는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이 찾던 생명사상을 심화시켜 갔다는 것이 김지하라는 예술 철학을 가진 미학자로서의 본질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김지하 시의 파괴적이면서 창조적인 전통 형식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홍용희 김지하 선생님의 민족민중미학이 국뽕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 배경을 짚어 주었습니다. 김지하 선생님은 4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어린 시절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고 술회하곤 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기로 들어올수록 많은 수묵화를 그리고 전시도 하셨습니다. 특히 ‘바람을 타는 난초, 표연난’에 대한 평가가 높다고 알고 있습니다. 유홍준 선생님께서 김지하 그림에 대한 평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유홍준 김지하는 글씨와 그림에서도 시 못지 않은 예술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글씨를 잘 써서 그가 시의 대가라는 게 묻혔다고 하는데, 지하는 시를 잘 써서 그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게 과소평가 됐다고 할 것입니다.

  김지하는 그림을 굉장히 그리고 싶어했대요. 그러나 부모님이 그림 그리면 잘 못 산다고 반대하여 어렸을 적에 어떨 때 손을 묶어놓으면 발가락으로 숯을 집어가지고 벽에다 그림도 그릴 정도로 했다고 해요. 본인이 사물을 보면 형상으로 이렇게 잡혀서 그리고 싶었다고 해요. 그래서 미술대학으로는 못 가고 타협점으로 찾은 것이 미술대학의 미학과로 갔다고 해요. 거기에서 데생도 배우고 했어요. 그리고 미학과의 동양미학 전공이신 김정록 교수님께 그림과 동양철학에 큰 감화를 받았어요.

  김지하는 데생 능력도 있었어요. 인물을 잘 그리는 게 진짜 화가예요. 데생 능력이죠. 이것이 1980년 12월에 석방되고 원주에 머무르면서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과 어울리면서 장일순 선생의 난초 그림에 영향을 받고 지도도 받으면서 춘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초기의 춘란을 보면, 굉장히 매끄럽고 날렵하고 아리땁게 그려요.

  그러던 것이 일산 시절로 와서는 이게 풍란으로 바뀌고 표연란으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어울리는 화제를 써넣어 작품으로서 완결미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나가면서 그거를 더 발전시키고 변화시킨 게 묵매도와 달마도 그림입니다. 매화는 기굴한 줄기에 영롱한 꽃으로 대비되어 김지하의 문학과도 잘 어울립니다.

  김지하의 달마도는 ‘코믹 달마도’라고 할 수 있어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인물화인데 여간한 아마추어는 흉내도 못내요.

  2014년도 선화랑 전시회 때 지하가 보였던 또다른 화제가 수묵 산수화와 모란꽃이에요. 그때 김지하 스스로 하는 얘기가 사실 난초는 나하고 잘 안 맞는다, 그거는 문인 양반 기질에 있는 거고 나는 출신이 상놈 광대 같아서, 내가 진짜 그리고 싶은 것은 우리 집 뒤뜰에 있는 모란꽃이라고 해요. 이후 그 모란꽃을 아름답게 그린 몇 점을 남기죠.

  그리고 화제로 쓰는 글씨가 꼭 난초 그리듯이 써요. 기본적으로 유려한 가운데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절절한 울림이 있어요. 그래서 김지하의 그림은 그림대로 따로 묶어서 보면, 그가 시에서 보여주었던 서정성과 그 다음에 생명사상으로 가면서 우주질서를 찾아가고 있는 것을 농축시켜내려고 하는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잃어버렸던 우리 문인화의 전통을 그대로 구현해낸 현대 문인화로 삼불 김원용이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김지하가 그것을 뛰어넘는 시대성과 사상을 담아 놓았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홍용희 앞으로 김지하의 그림에 대한 연구도 더욱 본격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제를 다시 바꾸어 보겠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고나 할까요. 김지하 선생님이 저항의 극단에서 역동적으로 생명의 화두를 들어 올린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지요. 김지하 선생님은 이렇게 직접 적고 있습니다.

  “철창 아래쪽 콘크리트와 철창 사이 작은 홈 파인 곳에 흙먼지가 쌓이고 거기에 풀씨가 날아와 빗방울을 빨아들여 싹이 돋고 잎이 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날 감방에 돌아와 얼마나 울었던지. 생명! 이 말 한마디가 왜 그처럼 신선하고 힘 있게 다가왔던지. 무궁광대한 우주에 가득 찬 하나의 큰 생명, 처음도 끝도 없이 물결치는 한 흐름의 생명, 그것 앞에 담과 벽이 있을 리 없고 죽음과 소멸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생명의 큰 이치를 마음과 몸에 익힐 수 있을까.”

  여기에서 “감방”은 일차적으로는 시인이 감금된 폭압의 현장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죽임의 세력과 맞서는 투쟁과 저항의 반생명적인 공간, 그 악무한적인 대결 구도의 표상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싹이 돋아 오른 “풀”은 곧 시인 자신의 자화상으로도 해석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것은 김지하 시인이 상극적인 대결 구도를 벗어나서 “생명의 큰 이치를 마음과 몸에” 체득하며 살아가는 우주 생명의 주체로 거듭 태어나는 지점으로 읽혀집니다.

  김지하의 생명운동과 사상의 총체는 1989년 「한살림선언」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김지하의 생명운동과 관련하여 정상헌 선생님께서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지하의 생명운동과 사상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성헌
정성헌

  생명운동과 사상·기후 위기, 팬데믹 40년 전에 예견

  정성헌 「한살림선언」은 생명사상을 압축한 거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사람은 바로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김지하 형과의 처음 만남도 1971년 노

  동자 조직 20만 명이라는 큰 뜻을 가운데 놓고 원주 장일순 형님 댁에서 만났어요. 그때도 만나서 노동자 조직보다 작품 구상 얘기가 호기로웠어요.

  1980년대는 환경오염이라고 그랬지만 칠십 년대는 공해라고 했는데 공해가 농촌 쪽에서는 농약 공해라는 말이 나왔지요. 그렇게 실천적으로 쉽게 이해했는데 그만 5·18을 겪으니까 이게 안 되는 건가? 하는 근본적인 회의랄까 절망에 부딪혔어요. 그때 김 시인이 이제 마침 출소를 해서 우리한테 와서 강연을 했는데 우리가 헤매던 얘기를 상당히 명료하게 얘기해 줬어요. 이제 뿌리 얘기를, 반생명의 뿌리를 넘어서지 않는 한 민주화 운동도 조금 되는 것 같지만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김지하 형은 이것을 분명히 일러 주었어요.

  그게 생명이에요. 참된 해방의 길, 그것이 이제 생명의 길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강조를 했어요. 여기에 영향을 받아서 내가 1983년도로 기억하는데 농업은 생명산업이고 농촌은 생명의 터전이고 농민은 생명이 일꾼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욕 엄청나게 먹었어요, 운동권한테. 지금 막 전두환 파시즘 타도 어쩌고 저쩌고 할 때, 무슨 생명 타령 하느냐고. 지하 형한테 물 들었어? 라고 대답했어요.

  많은 이들은 생명운동이라면 원주 장일순 선생을 먼저 생각하는데, 제가 직접 겪은 바로는 김지하 시인이 길을 열고 뜻있는 이들이 생명체의 특성대로 제각각 역할을 분담하여 진행하도록 물을 주어 가꾸었어요. 장일순 선생은 쉬운 말로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능력이 뛰어났지요. 박재일 형님은 생명살림 협동체 한살림을 만들어서 밀고 나갔고, 이건우 씨는 생명운동이 협동조합운동으로 조직화되도록 애를 썼고요. 그리고 지학순 주교가 김지하, 장일순, 박재일 모두를 후원하고 초기 한살림이 자리잡도록 도왔어요. 이후로 생명운동이 나름대로 확산되고 발전되어 나갔지요. 생명공동체운동, 생명평화운동, 녹색운동 등으로. 그런데 이제 후학들이 자기 취향대로 또는 자기 인연대로 이것을 기록해서 전하다 보니까 다소 잘못 전하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임진택 앞에서 “저항도 생명이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김지하를 저항 시인으로만 칭하는 것은 그의 생애 전반부 반절에만 해당되는 내용이지요. 그리고 방금 「한살림선언」 얘기도 나왔습니다만, 그 이전 1982년에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이 나왔어요. 지하 형님은 그 문건이 완성되자마자 어느 날 조용히 나에게 보여주었어요. “죽음의 먹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로 시작되는 첫 대목부터 나는 그 문건에 완전히 압도되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바로 탐독했는데, 한참을 기다려주던 지하 형님이 평가를 구하길래, 나는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급하게 이렇게 말을 지어냈어요. “형님, 「공산당 선언」 이후 최고의 선언이 나왔습니다.” “그래?” 지하 형님이 뜻밖이라는 듯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어요. 나는 지하 형님이 더 물어보면 어쩌나 좀 걱정이 되었는데, 사실은 내가 「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일동 웃음). 어떻든 한 세기를 풍미했던 「공산당 선언」을 넘어서는 최고의 창조적 선언이 한반도 남쪽에서 나온 겁니다.

  그 문건은 후에 주요 내용이 재정리되어 김지하의 산문집 『남녘땅 뱃노래』(두레출판사)에 ‘삶의 새로운 이해와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우리와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기후 위기와 팬데믹을 40년 전에 벌써 예견하고 있습니다. 나는 김지하가 20세기 말 밀레니엄 전환의 시대에 ‘생명의 세계관’, ‘이원론적 세계관’을 부정·극복한 ‘일원론적 세계관’을 설파한 것은 ‘천동설을 부정한 지동설’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문명 대전환 선언’이었다고 생각해요.

  홍용희 예. 김지하 선생님의 생명 운동과 생명의 세계관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김지하의 생명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이 전개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지막 산문집이 『우주생명학』(작가, 2018)이기도 합니다만, 후반기로 갈수록 생명사상에 대한 논의가 미학, 철학, 과학, 종교학, 미래학 등과 결부되면서 심화, 확장되어 갔지요.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해당하는 김지하의 시 세계에 대한 얘기를 했으면 합니다. 김지하의 시는 탁월한 서정성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의 시편은 투쟁과 반역을 노래할 때에도 깊은 정서적 감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저는 김지하 시의 원형성에 농경공동체의 생명의식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서울길」에 보면,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이렇게 노래하지요. 들녘의 분꽃, 그 못 잊을 여리고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번져 드는 숨결이 그의 시의 씨눈이면서 출발점이고 귀결점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이신 김형수 선생님께서 말씀을 열어주시지요.

홍용희
홍용희

  김지하 서정의 핵심은 ‘전율의 황홀경’

  김형수 아프리카의 어느 평론가가 우리나라에 와서 아프리카 문학사에 대해 강연을 아주 잘 해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강연을 다 듣고 정희성 선생님이 질문했어요. 강연 내용으로 펼쳐진 그 훌륭한 아프리카 문학은 가난한 아프리카 인민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이분이 그 점을 말하려면 강연을 다시 해야 합니다라고 해요. 내가 한 강의는 외부에서 보는 아프리카 문학이고 아프리카 내부에는 또 다른 매우 치열한 문학이 있다는 거예요.

  사실, 여러 나라와 문학적 교류를 하다 보면 우리가 말하는 문학, 즉 근대문학이 아예 없는 나라가 꽤 많아요. 그런데 그곳에 그들의 문학이 왜 없겠습니까? 근대 장르로서 시, 소설 같은 것들과 다른 양식과 간극이 있는 거겠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김지하 시인이 어느 순간 이 둘의 간극을 뛰어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양쪽 다 소통할 수 있는 길에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김지하의 담시를 놓고 당시 대학생이던 김남주 시인이 ‘신문학 100년 사에 찬란하게 떠오른 별’이라고 했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다고 봅니다. 김지하 시인은 한국에 이식된 시 장르 자체가 본디 어떻게 형성되어야 옳은지를 따지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어요. 그로부터 꽤 많은 시인이 민요시, 굿시 같은 걸 시도하면서 자기 영혼을 되찾으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또, 김지하 시인은 사형선고를 받고 “영광입니다” 하고 답한 정치적 수난자의 표현에서 ‘정치와 예술의 통일’을 발견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요. 기나긴 민중 생활사 속에서 축적된 존재와 표현의 관계를 되묻고, 우리 현실에 맞는 장르 모색, 장르 해체, 장르 재구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관심이 컸던 영역은 김지하 시인이 민족적 문학 형식, 어법에 대해 고민한 내용을 밝힌 점인데, 그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의식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백색의 미학, 차단된 숨결, 정지된 호흡 이런 용어들을 사용한 적이 있어요. 저는 이것이 김지하의 초기 시 세계 어문 구조의 특성이라고 봐요. 이것은 전선에 선 자의 극도의 긴장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부분인데, 나는 이를 ‘전율의 황홀경’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초기 시적 서정의 핵심은 전율의 황홀경인데, 점차 후기로 가면 사상 모색이 중심이 되면서 시적 긴장력보다 말씀의 내용이 중요해져요.

  김지하의 시, 민족 속에 살아 숨 쉬는 예술

  유홍준 김지하 시인은 조태일이 펴낸 《시인》 지로 등단하고 이듬해 첫 시집 『황토』를 펴내는데 나는 그의 초기시 중에서 「황톳길」을 읽어가면서 김형수 시인이 얘기한 대로 전율의 황홀경 같은 것을 느꼈어요. 피가 끓어서 올라와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상기되는 거예요. 그런 충격적인 감동은 다른 시에서 못 느꼈던 거예요. “황톳길에 선연한/핏자국 핏자국 따라/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었고/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두 손엔 철삿줄/뜨거운 해가/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나는 간다 애비야/네가 죽은 곳” 숨을 쉴 수 없이 사람을 이렇게 몰아치는 거예요. 이런 것이 단군 이래가 되든지 근대 이래가 되든지 민중들이나 지식인들이나 그들이 갖고 있는 감정을 다시 환기시켜서 삶의 현장 속으로 또는 투쟁의 현장 속으로 끌어내도록 하는 것은 평론가들이 뭐라고 하든 민족 속에서 살아 숨쉬는 예술세계라고 예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진택 내가 젊은 시절 김지하의 시를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우선, 사실 나는 문단쪽 다른 현학적인 시인들의 시는 잘 읽히지 않는 측면이 있었는데... 관념적이랄까 작위적이랄까? 그런데 작가회의쪽 시인들 특히 김지하의 시는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단 말예요. 그게 무슨 이유일까? 마치 소설에서 황석영 형의 소설이 잘 읽히는 것과 상통하는 건데, 또다른 어떤 유명 소설가의 경우 의외로 잘 안 읽히는 것과 대조적이었거든요. 내가 받은 느낌은 시든 소설이든 그 안에 ‘이야기’가 있을 때 흥미가 일어난다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역사적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떤 체험적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 어떤 사연보다도 더 진한 이야기가 있을 때 확실하게 들어온다는 느낌입니다. 백기완 선생은 자신의 시를 ‘비나리’라고 했어요. 기원祈願·절규絶叫이기도 하고 염원念願이고, 그게 절절할 때 확실히 와서 닿는다는 거죠.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데요. 그런데 그거 말고 더 중요한 게 또 있어요. 형식의 측면이랄까 감각의 측면에서… 그게 뭐냐하면 좋은 시는 그 안에 ‘그림’이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영상’이 있는 거예요. 이를테면 황석영의 소설은 ‘영화같은’ 소설입니다. 글로 쓴 영화랄까, 장면이 눈에 선하게 보여요. 김지하 시인의 시도 장면이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역사적 장면이, 그 상황에 처한 인간의 고뇌와 고난이…

  그러면 그 시의 문체는 뭐냐? 그게 비나리이고 기원이고 절규이고 염원이고, 넋두리라는 거지. 이를 춤과 연결해 보면, 그것은 일종의 몸부림이죠. 몸부림 혹은 몸떨림… 앞서 전율이라는 단어와 일치하는 건데, 김지하의 시는 몸부림의 시이고 몸떨림의 시에요. 춤에서 이애주의 바람맞이춤·썽풀이춤이 왜 곱고 화려한 동작이 아니라 처절한 몸부림으로 나왔는가 돌아볼 때, 문학에도 시에도 그런 처절한 절규로서 몸부림의 언어가 있는 거지요.

  홍용희 예. 고맙습니다. 선생님들 말씀을 합하면, 김지하의 시 세계는 전율의 황홀경 또는 몸부림의 언어를 통해 민중들의 가슴 밑바닥에 있는 감정을 환기시키는 힘으로 작동한다고 정리됩니다. 저는 이것을 주술 감응이라고 표현해 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떨리게 하는 파문이고 역동으로 작용하는 것이지요. 오늘 좌담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김지하를 이해하는 매우 유익한 자리였다고 생각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

 

 


 

 

* 《쿨투라》 2022년 7월호(통권 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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